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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46)화 (46/394)
  • 46화

      

    기진맥진한 채로 천사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나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벤시를 상대하는 우서혁을 바라봤다.

    히히힉, 히히히!

    벤시가 쭈글쭈글한 양손을 들어 주술이 담긴 독기를 퍼뜨렸다. 치이이익! 독기에 닿은 벽이 새하얀 연기를 피어오르며 녹아내렸다. 급히 뒤로 물러선 우서혁에게 천사연이 말했다.

    “시선 끌어. 뒤에서 공격할 테니.”

    “예.”

    “한이결. 정신 차리고 우서혁한테 능력 써.”

    그 말에 나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부여잡고 능력을 끌어 올렸다.

    “하아, 아주…… 제대로 부려 먹으시네요.”

    “나와 협력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재수 없는 새끼. 우서혁의 몸이 떠올랐다.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벤시를 향해 우서혁이 먼저 달려들었다. 우서혁의 공격을 피하려고 상체를 뒤로 뺀 벤시의 몸이 살짝 기울었다.

    끼이이이익!

    벤시가 입을 크게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섬찟한 공포심이 몸을 긴장시켰다.

    달려드는 우서혁을 치워 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벤시의 오른편으로 이동한 천사연이 내게 눈짓했다. 나는 다리를 감싸고 있던 바람의 강도를 한층 높였다.

    “윽……!”

    기운을 더 사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통이 찾아왔다. 위로 날아오른 천사연이 벤시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하아악!

    살기를 눈치챈 벤시가 몸을 뒤틀었다. 목 대신 어깨를 베인 벤시가 타오르는 불에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우서혁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발톱을 벤시의 얼굴에 꽂아 넣었다.

    끼이이이익! 끼이이이―!

    발톱이 박힌 두 눈과 입에서 새빨간 피가 쏟아졌다. 어깨에 타오르던 불이 약해진 벤시의 몸을 빠르게 태웠다.

    “허억…….”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이 난폭하게 날뛰며 심장을 아프게 쥐어짰다. 후욱, 눈앞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떨궜다.

    “……결. 한이결.”

    누군가 내 볼을 툭툭 두드렸다. 뻐근한 눈을 억지로 뜨자 다 타 버린 벤시의 시체와 천사연의 얼굴이 보였다.

    “무리를 좀 한 것 같긴 한데.”

    극심한 피로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우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약해서야.”

    “어떻게 할까요?”

    “흠. 아무래도 마무리는 나 혼자 해야겠군.”

    검을 챙겨 든 천사연이 나를 우서혁에게 넘겼다.

    “기절한 길드원들 깨워서 게이트 빠져나갈 준비해. 그동안 나는 남은 몬스터 처리하고 출구 찾아 둘 테니.”

    “알겠습니다.”

    우서혁이 나를 등에 업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놓았다.

    ***

    시원한 공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묵직한 두통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뜨니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천사연이 보였다.

    “한이결. 괜찮아?”

    “……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미간을 잔뜩 구긴 김우진이 보였다.

    ‘게이트 밖인가.’

    마중 나가 있겠다던 김우진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왔구나.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내가 꽤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나 보다.

    “뒷정리는 맡기도록 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서혁에게 명령한 천사연이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더 자. 바로 길드로 갈 거니까.”

    나는 그제야 천사연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만 내릴…….”

    “얌전히 있어.”

    등과 무릎 뒤쪽을 받쳐 든 자세가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어깨에 짐짝처럼 짊어진 쪽이 낫겠다.

    “길드로.”

    대기 중이던 차에 나와 김우진을 밀어 넣은 천사연이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 탁, 차 문이 닫히고 천사연은 타지 않은 채로 차가 출발했다.

    “많이 아파?”

    “머리가…….”

    상처를 피해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만지는 손길이 시원했다. 볼을 타고 내려온 김우진의 손이 목을 만졌다.

    “상처 때문에 열이 오르는 거야. 길드에 도착하면 바로 치료하자. 그, 힐러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

    힐러 여자?

    “민아린 씨?”

    “응, 그 사람. 연락받고 왔대.”

    “민아린 씨 아직…….”

    휴가 아닌가. 나는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웅얼웅얼 말했다.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 보니 처음 보는 장소였다. 현실감이 안 들어서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데, 문을 열고 반가운 이가 들어섰다.

    “이결 씨!”

    오랜만에 만나는 민아린이었다. 곧장 내게로 다가온 민아린이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신이 좀 들어요?”

    “네. 오랜만이네요, 민아린 씨.”

    “그러게요. 사실 며칠 더 쉬어야 하는데, 이결 씨가 아프다는 소식 듣고 그냥 돌아왔어요. 몸은 어때요?”

    “훨씬 좋아요.”

    손목에 링거가 꽂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상처도 모조리 사라지고 기운도 안정적이었다.

    “이곳은…….”

    “레퀴엠 길드 내부 병실이에요.”

    대충 보기에도 크고 시설이 좋았다. 이래서 병원이 아닌 길드로 온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링거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민아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더 쉬셔야 해요. 제가 보기엔 그간 무리해서 몸살이 오는 것 같은데…… 열이 도통 내리질 않네요.”

    아, 그래서 머리가 아픈 건가. 목도 어째 따갑고 불편했다.

    “다른 사람들은요?”

    “우진 씨는 잠깐 옷 갈아입으러 올라가셨고…… 마스터는 뭐, 이래저래 바쁘시겠죠.”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은 민아린이 내 가슴을 가볍게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 신경 그만 쓰고 한숨 더 자요. 열 좀 내리면 식사도 하셔야 하고. 감기나 몸살 같은 건 힐러들이 치료해 줄 수도 없으니까, 관리하셔야 해요.”

    “예에…….”

    민아린은 집요하게 날 바라봤다. 아무래도 잠들 때까지 지켜볼 심산인 것 같았다.

    휴식. 그래, 좋지. 나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몸살은 3일이나 나를 괴롭혔다. 시도 때도 없이 치솟은 열과 먹기만 하면 토하는 탓에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미치겠네…….’

    나는 새삼 한이결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 느낄 수 있었다. 몸살은 고사하고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던 나에겐 여러모로 충격적인 몸이었다.

    심지어 얘 A급이잖아. 만약 일반인이었으면 얼마나 빌빌댔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 정도로 아픈 A급은 처음이네요.”

    민아린마저도 당황할 정도로 극심하게 앓은 나는 나흘째 아침, 겨우 정상 체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죽는 줄 알았어…….”

    “내가 할 소리야.”

    김우진이 떠다 준 물을 마시며 중얼거리자 녀석이 뾰족한 눈초리로 대꾸했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보고 있으면 이결 씨는 본인 몸을 너무 막 다뤄요.”

    3일간 내 병간호를 하면서 잔소리가 많이 늘어난 민아린도 한 소리 했다. 양쪽에서 쏘아지는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왜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너만 업혀서 나오는 거야?”

    그건 그쪽 상사가 나를 마구 부려 먹어서…….

    “맞아요. 심지어 이결 씨보다 등급 낮은 길드원들도 다친 곳 하나 없었다면서요.”

    다들 벤시 주술에 걸리는 바람에…….

    설명해 봤자 의미가 없는 대답들뿐이라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들의 걱정을 받아들였다.

    [속보입니다. G21 구역 게이트에 입장한 제이나 길드 클리어팀의 귀환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섣부른 판단은 위험하다는 의견을…….]

    똑똑.

    한가하게 TV나 보는데,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찾아올 사람이 없던 터라 누군가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우서혁이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예, 뭐….”

    검은 정장에 과일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서 있는 우서혁은 며칠 전과 같이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어머, 우서혁 비서님. 간만이네요.”

    “예. 오랜만입니다. 민아린 힐러.”

    반갑게 인사하는 민아린에게 우서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마스터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천사연의 명령? 어리둥절하는 사이, 우서혁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그것은 카드 두 장이었다.

    “하얀 카드는 한이결 씨 명의로 만든 카드고, 검은 카드는 마스터 카드입니다.”

    갑자기 웬 카드?

    “이번 게이트에서 용병으로 참여해 주신 값은 한이결 씨 카드에 들어가 있습니다.”

    “예?”

    “마스터 카드는 혹여 돈이 부족하시다면 마음껏 쓰라고 하십니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검은색 카드를 내려다봤다. 새까만 몸체에 금색 숫자가 박혀 있는 카드가 형광등 불빛에 매끈히 빛났다.

    “마스터가 드라마 좀 보셨나 본데요?”

    민아린은 재밌다는 반응이었고, 김우진은 나와 비슷하게 그다지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다. 역시 김우진이 뭘 안다니까. 이런 지나친 호의는 덥석 받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저기, 우서혁 씨.”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전달을 명받았을 뿐이라. 만약 거절하고 싶으시다면 마스터를 직접 만나시길 바랍니다.”

    우서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우서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나는 손에 들린 두 장의 카드를 바라봤다.

    “얼마 줬으려나.”

    “아마 2천 정도 아닐까요? A급 용병 계약 금액이 그 정도라고 하던데.”

    민아린이 바구니에서 과일을 꺼내며 알려 줬다.

    2천이라. 나는 핸드폰을 꺼내 앱을 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2천이면 나쁘지 않지.

    “그 정도면 쇼핑이나 한번 가야겠다.”

    “저도 갈래요!”

    “나, 나도…….”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치료 중에 최고는 금융 치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잔액을 확인했다.

    “……이게 뭐야, 시발.”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숫자를 확인했다.

    「잔액 100,000,000원」

    0을 하나 잘못 셌나? 아니, 맞는데?

    “…….”

    “뭐야. 왜 그래?”

    “이결 씨?”

    나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 후, 잔액 표시가 떠 있는 앱을 끄며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잠시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알겠어요. 우진 씨랑 카페 좀 다녀올게요.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바닐라 라테 사다 줘?”

    “응. 다녀와.”

    별 의심 없이 민아린과 김우진이 사이좋게 병실을 나갔다. 나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워낙에 바쁜 놈이니 받을 가능성은 없긴 한데. 포기하려던 찰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달칵.

    [응, 이결아.]

    “제정신이야?”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따지듯 묻자 건너편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안타깝게도 제정신이긴 하지.]

    “남의 명의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언제까지 아이템을 대가로 치를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넣어 놨다고?”

    [연락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드나 돈이나, 다 필요 없어. 가져간 쿠키나 내놔.”

    [필요 없어도 받아 두는 게 좋을 텐데. 있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쿠키는 나중에 주도록 하지.]

    “따지자면 돈은 잘못 없긴 해. 준 사람이 문제니까.”

    [한이결.]

    천사연이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게 쓸데없이 날 세우느라 기운 빼지 말라고.]

    “워낙에 당한 게 많아서 그런가, 쉽지가 않네.”

    [나는 그저 대가를 치렀을 뿐이야. 이번 게이트는 특히 위험했으니.]

    “…….”

    [마음 편히 받기를 바라지.]

    으음. 노을이 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기회를 봐서 블랙카드라도 돌려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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