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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45)화 (45/394)

45화

12.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다들 물러서요!”

급히 외쳤지만 퍼져 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보랏빛 연기에 발목까지 잠긴 길드원들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휘청였다.

“큭, 잠깐…….”

“으으…….”

철컹.

무기를 떨어트린 길드원들이 공허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힘없이 팔을 흔들며 그들은 어기적어기적 어딘가를 향해 일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세요!”

내 곁에서 겁을 먹은 얼굴로 서 있던 힐러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막아서는 나를 밀치고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한이결 씨.”

우서혁이 내게 달려왔다. 다행히 그는 멀쩡해 보였다. 비틀거리며 몬스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길드원들을 조용히 바라보던 천사연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흐음.”

그가 날 보며 웃었다. 심각한 상황에서 웃긴 왜 웃는 거야.

“마스터! 이 연기는…!”

“응.”

검과 재킷을 꺼내 든 천사연이 돌연 내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윽, 무슨…….”

“어떡하지, 한이결.”

그가 날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너무 재밌어.”

“예?”

“재밌어서, 미칠 것 같아.”

거기서 더 미친다고?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서혁도 놀란 얼굴을 했다.

쿠구궁! 쿠르릉!

돌 무너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거리가 굉장히 가까웠다.

“일단 이거 걸치고.”

천사연이 재킷을 내 어깨에 걸쳐 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우서혁.”

“예.”

“계획을 바꾸도록 하지. 길드원들은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군.”

“읏, 잠깐!”

천사연이 기겁하는 나를 훌쩍 들어 안았다. 그의 멱살을 붙잡으며 물었다.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지.”

천사연이 손바닥을 검으로 그었다. 화려하게 생긴 롱소드. 나는 그 검이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SS급, 릴리스의 검이었다.

“벤시의 주술 능력. 알고 있나?”

“대상 한 명을 복종하게 만드는 능력 말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건.”

“등급이 높아졌으니 그 능력 발동 조건도 달라진 것 같군.”

“벤시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겁니까?”

“고스트도 포함해서.”

벤시는 한 명에게 주술을 걸어서 비교적 몸이 약한 자신을 지키도록 명령한다. S급이었던 벤시가 S+급이 되면서 주술 능력의 범위가 이 정도로 넓어졌다는 건가.

“주술에 걸린 상태라면 몬스터에게 공격당할 걱정은 없지. 그러니 고스트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야. 우서혁. 너는 벤시를 견제해. 쓸데없는 주술을 더 쓰지 못하도록.”

“알겠습니다.”

우서혁이 뒤로 물러섰다. 대화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거리가 벌어지자 천사연이 능력을 사용하며 입을 열었다.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서 말해 주는데, 한이결.”

“……뭐야.”

“A급은 너를 제외한 모두가 주술에 걸렸더군.”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천사연이 이토록 즐거워하는 이유를 알았다. 나는 천사연과 몸이 밀착된 상태로 재킷을 껴입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했더니.”

“가벼운 문제는 아니지.”

끼이이이―

그극, 그극. 기긱.

어둠 너머로 고스트의 울음소리와 함께 시퍼런 불빛이 어른거렸다. 얼핏 봐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마지막 방어선처럼 남아 있는 쇠창살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그래서?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아니면 직접 파헤치고 싶은 거야? 후자라면 협력 관계는 다시 고려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쉽지만 참아야겠군.”

생각해 보면 SS급 게이트에서도, 나와 천사연을 제외하고 모두가 모래 속으로 끌려들어 갔었다. S급이었던 박건호마저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SS급 보스 릴리스의 능력이 나를 비껴간 것이다. 확실히 정상적이진 않다.

끼기긱! 쿠웅!

쇠창살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천사연의 검을 감싼 불길이 한층 더 뜨겁게 타올랐다.

“무슨 이유든 간에, 조심해야 하는 건 사실이지. 무엇보다 우서혁은 눈치가 빠른 편이니 알아챘을 가능성이 크겠어.”

그건 그렇다. 우서혁이라면 섣불리 떠들고 다닐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긴 한데.

“뭐가 됐든 나는 재밌지만.”

우서혁이 알아챘을 상황까지 포함해서 재밌는 거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능력을 끌어 올렸다. 동시에 입구가 무너져 내리며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그극, 그극.

불투명한 몸체와 눈으로 추정되는 새파란 불빛을 일렁이는 고스트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들어섰다.

입구에 서 있던 길드원들이 고스트를 지나쳐 벤시를 향해 걸어갔다. 회색의 거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공중에 떠 있는 벤시는 입을 길게 찢으며 우리를 향해 웃었다.

잔뜩 해지고 지저분한 로브 자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벌린 입 사이로는 썩은 이빨이 보였다. 오래된 동화에서 나오는 마녀와 비슷한 생김새의 벤시 주위를 길드원들이 둘러쌌다.

키히히히. 히히힉.

고스트와 벤시의 숫자를 합치면 S+급 몬스터가 총 16마리. 그 숫자가 주는 공포에 몸이 절로 굳어 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숨을 몰아쉬며 천사연의 몸을 띄웠다.

고장 난 기계처럼 몸을 비틀던 고스트들이 일제히 나와 천사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가각, 그극. 극!

파지직, 고스트의 몸을 감싼 전류가 번쩍였다. 동시에 천사연이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새파란 번개가 꽂히며 바닥이 부서졌다. 나는 비명을 삼켜 냈다.

“으윽!”

천사연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가각! 가까이 있던 고스트의 몸 중앙이 갈라지며 따가운 전기가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튀며 몸이 퍼뜩 튀어 올랐다.

전류가 몸에 흐르는 몬스터인 만큼, 죽일 때마다 강한 전기가 검을 타고 올라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직접 공격을 해야 하는 천사연은 SS급이기 때문에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는 거였다.

찢어진 볼에 흐르는 피를 천사연이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다치는 것을 신경 써 봤자 도움 될 거 하나 없었다. 천사연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검을 휘두르는 손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키아아아악!

귀를 찌르는 벤시의 비명과 함께 독기 결정체가 여럿 날아왔다. 나는 재빨리 주변의 바람 흐름을 바꾸며 천사연의 몸을 높이 띄웠다. 바닥에 부딪힌 독기 결정체는 지글지글 타오르며 땅을 녹였다.

“오른쪽!”

내 외침에 천사연이 상체를 앞으로 크게 숙이며 동시에 검을 횡으로 그었다. 독기 결정체가 내 머리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가자마자 뜨거운 전류가 다시 한번 몸을 훑었다.

“으윽!”

그어억! 그극!

시야에 하얀빛이 터지며, 이마에 후끈한 고통이 느껴졌다. 주륵, 질척한 것이 눈을 지나 볼 아래로 흘러내렸다. 콰광! 쾅! 천사연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번개가 내리꽂혔다.

또다시 몸이 번쩍 튀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 냈다. 남은 고스트의 숫자는 12마리.

고스트들 사이로 벤시와 교전을 벌이는 우서혁이 보였다. 자신을 막아서는 길드원들을 피해 공격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심장을 감싸고 있는 기운을 강하게 끌어냈다.

후우웅! 강한 바람이 나를 중심으로 점차 크기를 키워 나갔다. 손에 차고 있는 팔찌에 보석이 빛나며 기운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지만, 빠져나가는 양이 어마어마한 터라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가가각, 기긱! 그극!

고스트가 멈춰 설 정도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길드원들을 덮쳤다. 내 의도를 눈치챈 우서혁이 변이한 팔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바람을 버텼다.

끼아아악!

벤시를 지키고 있던 길드원들이 내 능력에 우수수 날아가 벽에 부딪혀 기절했다. 공격이 담기지 않은, 그저 강도가 센 바람일 뿐이라 부상은 없었다.

길드원들이 모조리 바람에 날아가자 벤시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잦아들자 우서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벤시에게 달려들었다.

“나쁘지 않은데.”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지켜볼 심산으로 고스트를 공격하지 않고 있던 천사연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읏……!”

파지직, 전류와 함께 고스트가 타오르는 불에 먹혀들었다. 나는 천사연의 옷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견뎌 냈다.

어깨에 있는 상처가 크게 욱신거리며 뜨거운 액체로 젖어 들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어코 상처가 터진 것이다.

“한 마리씩 처리하다가는 몸이 버티지 못하겠군.”

“뭐, 하려고…….”

검을 감싸고 있던 혈화가 주변을 태울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천사연이 대답 대신 나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고스트가 몰려 있는 중앙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뭘 하려는지 눈치챈 나는 욕을 뱉으며 녀석의 몸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어어어! 그극! 그어!

후웅, 검을 휘두르자 고스트 세 마리가 동시에 불에 타올랐다. 불투명한 몸이 새까만 재로 변하며 강한 전류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흐, 으아, 악!”

한 마리를 죽였을 때와는 다른 강도에 허리가 절로 뒤틀리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등과 허벅지에 가느다란 상처가 그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개, 같…….”

“버텨.”

천사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고스트가 죽을 때마다 검을 타고 흐르는 전류에 고통받는 나와 달리, 조금의 타격도 없는 천사연은 이 전투가 너무나도 즐거워 보였다.

쿠르릉! 쿠릉!

어두운 방 안이 푸른 번개로 번쩍였다. 고스트들이 천사연을 붙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천사연이 다리를 벌리며 상체를 낮게 숙였다. 어깨와 팔에 근육이 도드라지며 손목을 살짝 틀었다. 방향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사연의 검 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각! 그악!

뜨거운 불길에 가까이 다가오던 고스트 육체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몰려든 고스트들 사이로 번개가 번쩍였다. 동시에 천사연의 검이 바람의 힘을 싣고 빠르게 움직였다.

새빨간 불과 새파란 번개가 맞닿아 화려하게 타올랐다. 검에 녹아내린 고스트 채액이 바닥으로 후드득 쏟아졌다.

“흐으, 아…….”

견디기 힘든 통증에 몸이 덜덜 떨렸다. 몸을 타고 올라온 전류가 등을 찢고 지나갔다. 심장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뛰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세 마리 남았네.”

자신을 노리고 내리꽂히는 번개를 피하며 천사연이 피가 흐르는 내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물었다.

“어떡할까, 이결아. 많이 힘들어?”

“닥쳐…….”

신나게 즐기고 있는 주제에 이제 와서 다정한 척하는 꼴이 아주 가증스러웠다.

“한 마리씩 죽여 줄까, 한 번에 죽여 줄까. 응?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한 번에.”

“흐음.”

천사연이 축 처진 나를 고쳐 안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잘 버텨 봐, 그럼.”

후욱,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가자마자 불꽃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그어어, 고스트의 마지막 울음소리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통증이 허리를 지나쳐 뒷목을 뜨겁게 달궜다.

“으읏, 으…… 흐윽.”

천사연이 고스트 시체를 태우는 불길 속을 걸어 나가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몸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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