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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44)화 (44/394)
  • 44화

    게이트 내부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천사연은 특히 더 조심하라고 말하며,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방 하나 끝날 때마다 충분한 휴식을 갖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나야 좋았다. 어쨌든 부상이 낫지 않은 상태라 몸이 불편하기는 했으니까.

    미리 받아 뒀던 진통제를 한 알 삼키며 벽에 등을 기대고 쉬는데, 길드원들의 상태를 한 번씩 둘러보고 온 천사연이 내게 말했다.

    “뭐 할 말 없나?”

    “……?”

    이건 또 무슨 색다른 시비지. 가벼운 미열에 몸이 살짝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없는데요.”

    “냉정하기는.”

    천사연이 짐짓 서럽다는 얼굴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우서혁에게 시선을 줬다.

    “내가 근래 이런 취급을 받으며 지내고 있어. 어떤가?”

    “놀랍습니다.”

    조금도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우서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는 한이결 널 위해서 모두를 속였는데…….”

    “아니, 잠깐만요.”

    나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감쌌다.

    “속이긴 뭘 속였다는 겁니까?”

    “설마 했는데 이 정도로 눈치가 없을 줄이야. 우서혁. 대신 설명해 봐.”

    “예. 마스터는 사고를 대비한다는 핑계로 한이결 씨가 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갖다 붙이면 다인 줄 압니까? 사고를 대비해야 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마스터께서는 그 어떤 때에도 돌파 시간을 늦추지 않습니다. 이번 일은 이례적입니다.”

    “들었나?”

    듣기야 했는데.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대답 없이 뚱하니 바라보자 천사연이 공부 못하는 학생 가르치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할 말 없나, 한이결?”

    “아. 예. 감사합니다.”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욕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경험상 천사연 같은 또라이는 원하는 거 빨리해 주고 돌아서는 게 상책이었다.

    내 예상대로 감사 인사에 천사연이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슬슬 약효가 도는지 두통이 가라앉고 상처의 통증도 나아졌다.

    “이제 출발하죠.”

    “그러지.”

    문을 여는 장치를 찾는 천사연을 물러서서 바라보는데, 누군가 등을 콕콕 찔렀다. 뒤를 돌아보자 힐러들이었다.

    “한이결 씨. 이거 먹을래요?”

    “빈속에 진통제 먹으면 안 돼요!”

    이미 먹었는데요.

    그렇게 대답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니 감사 의미로 살짝 웃으며 그녀들이 건네주는 것을 받았다. 손 위에 올려진 것은 예쁜 포장지에 감싸진 쿠키였다.

    “제, 제가 만든 거예요. 몇 번 만들어 본 거니까 맛은 괜찮을 거예요.”

    “이런 장소일수록 쉽게 피곤해지니까 달달한 간식도 필요하더라고요. 괜찮으시면 좀 드세요.”

    “잘 먹을게요. 저 단 거 좋아해요.”

    한이결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힐러 두 명은 내 감사 인사에 환하게 웃으며 다음에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귀여운 선물을 받은 나는 입가에 새어 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 가끔은 이런 일도 있어 줘야지.’

    미친놈들 상대는 그만하고 싶다고. 고소한 향이 풍기는 쿠키 봉지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다 좋은데 쿠키를 보관할 가방이 없었다.

    들고 다녀야 할지, 그냥 먹어 버려야 할지 고민하는데 문을 열고 온 천사연이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줘. 내가 보관해 주도록 하지.”

    “인벤토리에요?”

    “그래.”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맡겨도 되겠지? 화사하게 웃는 천사연의 얼굴이 영 신경 쓰였지만 계속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쿠키 봉지를 천사연에게 넘겼다.

    천사연이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리자 쿠키 봉지가 사라졌다.

    “그래도 반 이상은 왔군.”

    이번이 6번째 방이니 그렇기는 했다. 훤히 드러난 입구 너머로 A급의 기운이 느껴졌다. B급이었던 거미 몬스터가 A급으로 등급이 올라 있었다.

    샤아아악!

    꾸륵, 꾸르륵!

    털이 숭숭 돋아난 거미 등 위에는 똑같이 생긴 작은 거미 수십 마리가 눈을 번뜩였다. 길드원들이 질린 표정으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게이트를 전전하며 별의별 몬스터를 만난다지만, 거미 같은 놈들은 익숙해지는 게 쉽지 않았다.

    대형견만 한 크기의 거미들이 천장에서 거미줄을 타고 줄줄이 내려왔다. 다각, 다각. 딱딱한 다리로 벽을 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한이결 씨, 이번에는 아까 그거 하시면 안 돼요!”

    “바람에 날아다니는 거미랑 부딪힐 상상하면 너무 끔찍해요!”

    “그냥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부상자는 물러서세요!”

    앞으로 나서려던 나를 길드원들이 기겁하며 막아섰다. 이런 반응은 생각지도 못한 내가 당황하는 사이, 길드원들이 헐레벌떡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커다란 거미는 A급이고 등에 매달려 있는 작은 거미는 C급도 안 되니 걱정할 건 아니긴 한데.

    “개 해골은 괜찮고 거미는 안 된다니…….”

    “저는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이렇게 섬세하지 못해서야.”

    우서혁과 천사연은 길드원들 의견에 공감하는 눈치였다. 나는 머쓱함에 뒷머리를 매만졌다.

    ‘섬세한 거랑 무슨 상관이지.’

    어쨌든 부상자는 맞았기에, 나는 나서지 않고 천사연 곁에 가만히 서서 처리되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모든 몬스터를 처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체를 돌아다니며 세세하게 수치를 파악한 측정 능력자가 한껏 침울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B급 11.6%에서 A급 56.8%까지 올랐네요. 어째 방을 지나면 지날수록 수치도 심하게 오르는 것 같아요.”

    “흐음.”

    지금 천사연은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게이트는 S급 게이트. 그렇다는 것은 언제가 됐든 S급 이상의 몬스터가 등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높은 확률로 S+급 몬스터가 나타나겠군.’

    측정 능력자와 다른 길드원들의 걱정거리기도 했다. 그나마 천사연이 있어서 다들 침착하게 돌파하고 있는 거겠지.

    ‘S+급 몬스터가 한 마리만 등장한다면 괜찮겠지만…….’

    어제 상대했던 스펙터가 떠올랐다. A급에서 S급으로 등급이 올라간 것으로 모자라, 숫자까지 늘어났다. 심지어 이전에는 없던 능력도 새로 추가됐고.

    독이 묻어져 있던 스펙터의 손톱을 떠올리니 반사적으로 어깨에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S+급 몬스터가 여러 마리를 좁은 방 안에서 상대해야 할 텐데, 과연 아무 피해 없이 처리할 수 있을까.

    “한이결.”

    측정 능력자를 돌려보낸 천사연이 내게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앞으로 4개의 방이 남았는데.”

    팔짱을 낀 상태로 손가락을 툭툭 움직이던 천사연이 물었다.

    “너는 어떤 몬스터가 가장 골치 아플 것 같나?”

    나는 천천히 자료 내용을 떠올렸다. 나오지 않았던 몬스터의 목록을 하나하나 따져 본 후에 신중히 대답했다.

    “……고스트.”

    남은 몬스터는 S급 둘, A급 둘. 그중 나는 S급 고스트를 선택했다.

    “이유는?”

    “지금 이대로라면 어차피 고스트뿐만 아니라 벤시도 S+급이 됐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등급이 아니라, 몬스터 숫자가 되겠죠.”

    벤시는 혼자 등장하지만, 고스트는 5마리나 된다. 만약 스펙터처럼 숫자가 늘어나고 능력이 추가된다면 벤시보다 고스트가 더 까다로울 것이다.

    “S+급 몬스터가 5마리 이상입니다. 실질적으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인원은 마스터와 우서혁 씨뿐이고요.”

    천사연의 등 뒤에 서 있던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책이 필요하군요.”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비슷해. 벤시보다는 고스트가 훨씬 까다롭겠지.”

    그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단순히 할 말이 있어서 본다기에는, 새까만 눈동자가 묘한 빛을 품고 있었다.

    “한이결.”

    “…뭡니까?”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은 알지만, 나와 함께 움직여 줘야겠어.”

    “헤집는 역할입니까?”

    “그래. 우서혁은 길드원들과 뒤로 빠져 있도록. 나와 한이결이 놓친 몬스터를 상대해.”

    “알겠습니다.”

    “다른 게이트였다면 좀 더 다양한 방법을 구상해 봤겠지만, 하필 이곳이라. 괜히 어중간한 수단을 썼다가는 더 큰 피해를 볼 테니.”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마음 편하게 전투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고, 한정적이었다.

    “팔찌를 착용 중이기는 해도 마스터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 못 합니다. 제 상태 봐 가면서 하세요.”

    “흐음. 그건 좀 실망스러운데. 역시 A급은 어쩔 수가 없는 건가.”

    “선물로 주신 아이템이 꾸진 거겠죠.”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름 우서혁의 눈치를 봐서 본심은 숨기고 싶었는데, 이틀 정도 지나니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저 재수 없는 깐족거림을 어떻게 당하기만 하냐고.

    다행히 우서혁은 나와 천사연이 무슨 대화를 하든 별 반응이 없었다.

    “우서혁 씨는 괜찮으세요? 이 계획.”

    “예. 괜찮습니다.”

    “SS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S급보다 높은 S+급이에요. 방심하시면 다치실 수 있습니다.”

    “한 번쯤 상대해 보고 싶었습니다.”

    “예에…….”

    감정이 없는 것처럼 무뚝뚝하기만 하더니, 우서혁도 S급은 S급인가 보다. 아니면 강한 상대와 한 번쯤 부딪혀 보고 싶은 남자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거나.

    “남은 방 중 어디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항상 긴장하도록.”

    ***

    대책이 무색하게, 7번째 방은 A급 몬스터가 등장했다.

    “A급 89.34%입니다. 아슬아슬하게 S급으로 넘어가진 않았네요.”

    “다행이군.”

    천사연이 널려 있는 나방 몬스터 시체를 정리하는 길드원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짐 정리하고 쉬도록.”

    모두가 한숨 돌리는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지하의 갑갑한 공기와 자꾸만 치솟는 몬스터의 등급으로 인한 긴장 때문인지, 다들 굉장히 피로해 보였다.

    “죽겠다…….”

    “깨끗한 천 남는 사람?”

    “시체 태울 때 날개는 따로 빼 둬. 가져다주면 연구팀 애들이 환장해.”

    각자 휴식을 취하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는데, 새 붕대를 든 힐러팀이 내게 다가왔다.

    “한이결 씨,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치료해 드릴게요. 붕대로 새로 가져왔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셔츠 단추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이번에 치료받으면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 것이다. S+등급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니 몸의 부담은 최소한으로 줄여 둬야 했다.

    “A급 붕대예요. 마스터가 챙겨 주셨어요.”

    힐러의 말에 손에 든 붕대를 바라보니 정말로 아이템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일반 붕대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천사연은 A급 붕대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치료받을 텐데 A급 붕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에이, 그래도요. 이왕 얻었는데 아깝잖아요.”

    “맞아요.”

    그런가.

    설득당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셔츠를 마저 벗으려던 그때였다.

    쿠구구궁!

    주변이 크게 흔들리며 굉음이 울렸다. 천장에서 후드득, 돌가루가 떨어지며 촛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불안하게 빛났다.

    “뭐, 뭐야?”

    “무슨 소리지?”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놀라며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췄다. 나도 셔츠 단추를 다시 채우며 몸을 일으켰다.

    우우우웅―!

    쿠궁!

    아직 열리지 않은 입구 너머로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둠 사이로 조용히 퍼져 나가는 보랏빛 연기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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