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상처는 완벽하게 치료할 수 없었다. 독기를 없애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다다른 힐러들에게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붕대를 들고 쩔쩔매는 힐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힐러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죄송해요. 제가 힐러로 각성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배운 게 많이 없거든요.”
“저도…….”
……인력 부족이란.
“괜찮습니다. 두 분도 가서 쉬세요.”
힐러들이 물러가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천사연이 돌아왔다. 내 손에 들린 붕대를 본 천사연이 눈썹을 슬쩍 올렸다.
“그거 말고 이거 써.”
내 손에서 평범한 붕대를 뺏어 간 천사연이 인벤토리에서 다른 붕대를 꺼냈다. 뭔가 싶어서 붕대를 바라보자 기운이 느껴졌다.
“저번에 말한 A급 붕대?”
“이거라면 중간에 상처가 터져도 지혈에 도움이 되겠지.”
붕대를 손에 푼 천사연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내 어깨와 팔에 붕대를 감아 줬다.
“천사연. 너 손은…….”
“신경 쓰지 마.”
천사연의 손가락은 예상했던 대로 상처가 생겼다. 고통을 참아 내느라 있는 대로 씹어 댄 탓이었다.
그나마 SS급 신체라서 저 정도지, 평범한 일반인의 손가락이었으면 크게 다쳤을 것이다.
“A급 게이트고, 우서혁에 나까지 있다 보니 일부러 능력 있는 힐러는 다른 클리어팀에 배정했는데.”
천사연의 시선이 내 어깨로 향했다.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 같군.”
“방심했을 뿐이야.”
붕대를 모두 감은 후 새 셔츠로 갈아입은 나는 주변에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조용히 물었다.
“원인은 알아냈어?”
“측정 능력자 보고에 의하면 등급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는군. 그것 말고는 딱히.”
“현재 S급 수치가 몇이라는데?”
“31.2%. 이전에는 A급 24.6%.”
A급 24.6%에서 S급 31.2%까지 올랐다는 건가.
“그 정도 차이면 SS급이 나타날 것 같지는 않네.”
“S+는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하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우서혁이 내게로 다가왔다.
“다친 곳은 괜찮으십니까?”
“네, 위험할 뻔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서혁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그보다…….”
짧은 순간, 천사연의 눈치를 살핀 우서혁이 말을 이었다.
“전투 중에 공중을 날 수 있었는데. 한이결 씨 능력입니까?”
“네, 제가 바람 능력자라서요. 혹시 불편하셨습니까?”
우서혁이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몬스터를 손쉽게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람을 그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니, 놀랍군요.”
“A급은 S급 상대로 공격이 잘 안 통하니까요. 그렇게라도 도와야죠.”
내 말에 우서혁이 잠시 침묵했다. 어딘가 복잡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뉴스를 보고 저도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직접 받아 보니 예상보다 훨씬 좋아서 놀랐습니다.”
뉴스를 봤다는 건 C13 구역에서 찍힌 영상을 말하는 거겠지. 다시 생각해도 짜증 나네. 나는 천사연을 흘겨봤다.
“지나친 참견처럼 들리시겠지만, 앞으로는 함부로 타인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타인이라면 우서혁 씨도 포함입니까?”
“저는 이미 경험해 봤으니 예외입니다.”
“…….”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뻔뻔한 면이 있네.
나와 우서혁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천사연이 끼어들었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하지.”
“아니, 그런 걱정을 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은 아닌 것 같은데요.”
“확실히 보기만 할 뿐이라면 그렇게 특별히 느껴지지는 않습니다만…….”
“직접 받아 보면 다르지.”
천사연이 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한이결. 너는 네 능력의 희귀성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어. 대다수의 능력자가 비행 능력을 얼마나 탐내는지, 알고 있지 않나?”
“으음…….”
“반대로 몬스터는 A급 이상부터 대부분 비행 능력을 갖추고 있지. 능력자 입장에서는 번거로울 수밖에.”
“제 도움이면 신경 쓸 게 훨씬 줄어든다는 겁니까?”
“그 이상이지. 움직임에 제약이 없어지는 것이니.”
설명은 이해했지만 딱히 와닿지는 않았다. 바람 능력 없이 몬스터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낮은 등급 능력자라면 상관없지만, 높은 등급이라면 한이결 씨 능력에 큰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그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 같지는 않군요.”
우서혁의 설명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계 능력자들은 기본적으로 호전적이며, 등급이 높을수록 그 성향도 강하니까 확실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도와준다는 생각만 했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일단 높은 등급의 능력자를 만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뭐. 내가 순순히 동의하자 천사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쉬어. 내일부터 다친 몸으로 이동해야 할 테니.”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독을 빼낼 때 꽤 고생해서 그런지 몹시 피곤했다.
***
그래도 힐러에게 치료받고 좋은 붕대를 감아 둬서 그런지, 자고 일어나자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내 상처를 확인하러 온 힐러들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자 크게 안도했다.
“아직 기력이 덜 차서요. 지금은 좀 힘들고, 저녁에는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아요.”
“네, 부탁드립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힐러들도 까르르 마주 웃어 주었다. 좋은 사람들이네.
힐러들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진 후, 이동을 위해 앞으로 오자 일찌감치 대기 중이던 천사연이 나를 돌아봤다.
“몸은 좀 어떻지?”
“괜찮습니다.”
지끈거리는 약한 둔통은 계속해서 느껴졌지만, 진통제를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천사연이 아주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새 힐러들과 친해졌더군.”
“…그건 또 왜 묻습니까?”
민아린, 김우진과 친하냐고 묻던 기억이 절로 떠올라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런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천사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인기가 많아서 말이지.”
저게 대체 칭찬이야, 욕이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출발하시죠.”
싸늘하게 말하자 천사연도 진지하게 꺼낸 얘기는 아닌지 순순히 문을 여는 장치를 찾아냈다. 역시나 이번에도 한 번에 성공이었다.
“이거 무작위 맞습니까?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나를 좀 더 믿어 줬으면 좋겠는데.”
“욕심이 과하시네요.”
촤르륵, 쿵!
다음 방은 다행히 S급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박쥐가 끼이익 울어 대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B급 몬스터. 흡혈박쥐였다.
방으로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마주한 B급에 길드원들이 신이 났다. 나나 천사연, 우서혁이 나서기도 전에 박쥐들은 길드원의 공격을 받고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를 열심히 뛰어다니며 측정을 마친 측정 능력자가 천사연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B급 수치 78.9% 떴습니다. 이전 수치는 31.44%입니다.”
“역시 올랐군.”
“수치 오르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78.9%라니. 조금만 더 늦게 들어왔으면 A급 흡혈박쥐를 상대했겠군.
“저기, 마스터.”
측정 능력자가 불안한 얼굴을 했다.
“괜찮은 거, 맞죠? 수치가 계속 이상해서…….”
“나머지 방도 조사해 보면 확실해지겠지.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어느 등급 몬스터가 뜨건 모두 안전하게 나갈 수 있게 해 줄 테니.”
천사연의 여유로운 대답에 측정 능력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측정 능력자가 자리를 뜨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웬일입니까? 그런 말까지 해 주고.”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어졌다. 우서혁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편하게 말한 터라 뒤늦게 눈치가 보였다.
“마스터로서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천사연이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이래 봬도 꽤 다정한 마스터라.”
“아, 예. 그러시군요.”
양심이 있나 싶다.
“흐음…….”
재밌어 죽겠다는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천사연이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질투하나?”
“미―”
반사적으로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외치려던 나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알 만하다는 듯 웃은 천사연이 박쥐가 모두 처리된 것을 확인하며 다음 방 입구로 향했다.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조금만 긴장을 풀면 기다렸다는 듯이 헛소리를 해 대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다음 방으로 가는 이번 장치는 천장에 위치했다. 공중으로 올라간 나는 천사연의 설명대로 천장에 새겨진 여러 벽화 중에 꽃 모양을 찾아 눌렀다. 달칵 소리와 함께 쇠창살이 올라가며 다음 방 입구가 드러났다.
크르릉…….
문이 열리자마자 짐승 울음소리가 어둠 너머로 들려왔다. 자료대로라면 이번 방의 몬스터는 스켈레톤 케르베로스. 머리 세 개 달린 개 형태의 A급 해골 몬스터다.
컹! 컹!
방 안으로 들어서자 질척한 침을 질질 흘리며 몬스터들이 짖어 댔다. 거리를 벌리고 힘을 가늠하듯 으르렁거리는 케르베로스를 보다가 슬쩍 우서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서혁 씨.”
“예.”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덩치가 좀 큰 개처럼 생긴(정확하게는 해골이지만) 케르베로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갯과는 강한 동족을 만나면 겁먹고 꼬리를 내리잖아요?”
“예.”
“우서혁 씨가 나서면 다들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이 어떠세요?”
“…….”
“큭!”
큰 개와 큰 늑대면 당연히 늑대가 이기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건데, 우서혁은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애매한 표정을 지었고 천사연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겁먹으면 죽이기 편할 것 같아서…….”
“……동족 이전에, 등급 차이가 심한 마스터를 보고도 겁을 먹지 않으니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혹시나 통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투를 시작한 길드원들 틈에 섞여 들었다. A급이면 나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한 상대였다.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케르베로스를 바람으로 쳐 내며 기운을 끌어 올려 방 안 전체에 강한 돌풍을 생성했다. 발톱을 세우고 버티던 케르베로스들이 강력한 바람에 속절없이 날아가 여기저기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났다. 시험 삼아 해 본 건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넓은 외부에서는 하기 힘들겠지만, 꽉 막힌 실내에서는 쓸 만하네.’
단점은 주변에 있는 길드원들도 공격을 멈추고 바람을 견뎌야 한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돌풍 공격에 케르베로스가 모두 죽자 길드원들은 입을 모아 괜찮다며 내게 엄지를 들어 주었다.
정말 괜찮아서 그러는 건지, 내가 천사연과 친해 보여서 사회생활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