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42)화 (42/394)
  • 42화

      

    구울 처리는 금방 끝이 났다. 원래도 숫자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닌 데다 우서혁이 팔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네다섯 마리가 픽픽 죽어 나가니 오래 걸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공중에게서 내려와 우서혁 앞에 섰다.

    “우서혁 씨. 그 팔… 능력인 겁니까?”

    “예.”

    구울이 모두 처리된 것을 확인하자 우서혁의 팔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훤히 드러난 상체의 근육이 장난 아니다. 두툼한 어깨와 가슴, 선명한 복근까지. 완벽한 역삼각형 몸매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 정도면 골격 자체가 타고난 거네. 운동 좀 열심히 한다고 절대 만들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역시 S급이어서겠지. 생각해 보면 주변에 있는 놈들도 몸은 다 좋았다.

    “그러다 우서혁 몸 뚫어지겠어, 한이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천사연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제정신을 차렸다. 급히 우서혁의 몸에서 시선을 떼자 가만히 서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옷 입어도 되겠습니까?”

    “아, 크흠. 죄송합니다. 몸이 좋으셔서 저도 모르게.”

    혹여 변태로 찍힐까 봐 정중하게 사과하며 물러섰다. 다행히 우서혁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남자 몸이 취향일 줄은 몰랐군.”

    천사연이 피 묻은 칼을 툭툭 털며 놀리는 투로 말했다.

    “으, 미쳤습니까? 그런 생각으로 본 거 아니거든요.”

    “그럼?”

    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저 정도까지 관리한 게 대단해서 그러죠.”

    한이결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근육이 잘 붙는 타입은 아니었다.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남들보다 배로 노력했지만, 끝내 원하는 수준의 몸을 만드는 것은 실패했다.

    그땐 꽤 우울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서혁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나쁘지 않았는데 이상을 너무 높게 잡았던 것 같기도 하고.

    “A급 이상은 웬만하면 일반인보다 신체가 발달해 있으니까. 딱히 공들여 몸을 관리하지 않아도 다들 상태가 좋지.”

    “……저도 A급인데요.”

    “저런. 응원하도록 하지.”

    이 새끼가.

    “필요 없습니다.”

    “근육 만들기 이전에 살부터 좀 찌워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요즘은 잘 챙겨 먹습니다.”

    김우진이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주는 덕분이었다. 심지어 매일 메뉴가 달라져서 만족도도 무척이나 높았다.

    아무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우서혁 씨, 능력이 뭡니까? 보아하니 저만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럴 거야. 한번 보면 잊기 힘든 능력이니.”

    셔츠를 입은 우서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 비슷하게 생긴 것을 꺼내 들었다. 화면을 툭툭 누르자 손에 들고 있던 정장 재킷과 넥타이가 사라졌다. 인벤토리 아이템인가 보다.

    우서혁이 날 바라보며 차분히 설명했다.

    “신체를 정해진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늑대입니다.”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변했을 때 동물 발처럼 생겼다 싶더니 늑대였군.

    “완전히 변할 수도 있습니까?”

    “완전체는 꽤 크기 때문에 이런 장소에서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옷을 벗을 만했다. 그 정도로 몸이 커지고 부풀어 오른다면 뭘 입어도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저것도 불편하겠네.

    “마스터.”

    방을 한 바퀴 둘러본 측정 능력자가 천사연에게 다가왔다.

    “큰 문제점은 없습니다만, 등급 수치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어느 정도로?”

    “처음 왔을 때는 A급 수치가 12.89%였는데, 현재는 57%가 넘었습니다.”

    등급 수치가 100%를 넘어가면 몬스터의 등급이 올라간다. 측정 능력자가 목소리를 줄이며 물었다.

    “계속 알아볼까요?”

    “그래야겠군. 다음 방도 측정하도록.”

    측정 능력자를 보낸 천사연이 나를 바라봤다. 그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딱히 좋은 소식은 아니군요.”

    “더 알아봐야겠지만, 지금껏 없었던 일인 것은 확실하지.”

    우서혁이 옆에서 듣고 있으니 이 이상 자세히 얘기할 순 없었다. 천사연은 이번에도 쇠창살을 여는 장치를 한 번에 찾아냈다.

    촤르륵. 쿵!

    다음 방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번 방은 촛불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새까만 어둠 사이로 희끗한 몸체가 일렁였다.

    “스펙터(specter).”

    자료에서 봤던 이름을 떠올렸다. 내 속삭임에 응답이라도 하듯 기괴한 울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끼이이이이―

    기긱, 긱―

    후욱, 섬찟한 기운이 입구로 밀려왔다. 뭔가 이상하다.

    “……잠깐, 이건.”

    “마스터!”

    새까만 연기가 뱀처럼 우리를 향해 천천히 기어 왔다. 나와 비슷하게 이상함을 알아챈 측정 능력자가 비명처럼 천사연을 불렀다.

    “드, 등급 수치가!”

    하아, 주변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고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에 길드원들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공포감.

    “이상하군.”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선 천사연이 싸늘한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A급이어야 할 스펙터가 S급이 된 것도 모자라, 숫자까지 늘어났어.”

    촤르르륵! 쿠웅!

    천사연이 검으로 손바닥을 베어 낸 것과 동시에, 등 뒤로 열려 있던 문이 굳게 닫혔다.

    샤아아아―

    끼이이―끼이―

    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불로 변하자,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스펙터가 드러났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새까만 천은 마치 연기처럼 흩날렸고, 그 아래로 보이는 손은 지나치게 길고 날카로웠으며, 얼굴에는 세로로 길게 찢어진 입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발, 이제 겨우 세 번째 방인데 뭔 S급이 나와?”

    “스펙터는 A급 아니었어? 미치겠네.”

    길드원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들었다. 5m는 훌쩍 넘는 스펙터 스무 마리가 기괴하게 입을 벌리고 빠르게 날아들었다.

    끼아아아아―!

    끼이이익! 끼이이!

    어둠을 가르고 새빨간 불이 흩날리며 선두에 있던 스펙터를 베어 냈다. 그사이, 대열을 갖춘 길드원들도 달려드는 스펙터 한 마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드득!

    양팔이 변화된 우서혁이 스펙터의 머리를 노리고 뛰어올랐다. 나는 능력을 끌어 올려 우서혁의 신체를 받쳐 주는 동시에, 검을 휘두르는 천사연의 몸을 감쌌다.

    양쪽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에 차고 있던 팔찌가 옅게 진동하며 보석이 반짝였다.

    “나쁘지 않은데.”

    기운이 차오르는 속도가 빠져나가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괜찮았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천사연과 우서혁에게 집중했다.

    천사연은 한두 번 받아 보는 서포팅이 아닌 만큼, 내 힘을 곧바로 눈치채고 활용하기 시작했다. 마치 춤을 추듯 유연하게 스펙터 사이를 오가며 검을 휘둘렀다.

    반대로 우서혁은, 공중에 떠오른 몸이 낯선 듯 몇 번 허우적거렸지만 스펙터 한 마리를 죽인 이후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좀 더 이동하는 범위를 넓혔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벽을 밟고 뛰어 올라간 우서혁이 스펙터의 팔을 잡아 뜯고 입 안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검은 피를 쏟아 내며 스펙터가 울부짖었다.

    “후우.”

    내 능력 덕분에 움직임에 제약이 사라진 천사연과 우서혁이 신나게 날뛰었다. 천사연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빨간 불이 타올랐고, 우서혁 근처는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S급 20마리라는 걱정도 잠시,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상황이었다.

    끼이이이익, 끼이익―

    스아아악―

    ‘하나, 둘, 셋…… 열넷. 열다섯.’

    바닥으로 추락한 스펙터 시체의 숫자를 세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펙터 한 마리 처리 완료했습니다!”

    길드원들이 방금 막 처리한 한 마리 추가. 천사연과 우서혁이 상대 중인 세 마리. 그럼 총 열아홉 마리인데.

    나머지 한 마리는…….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리며 바람을 방패처럼 펼쳤다.

    끼이이이익―!

    기괴한 스펙터의 울음소리와 함께 후끈한 고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미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스펙터의 손이 바람 방패를 뚫고 들어와 내 어깨와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깊게 팬 상처 위로 검은 연기가 마치 독처럼 퍼져 나갔다.

    “크윽!”

    능력으로 공격을 늦춘 사이에 피하지 않았다면 어깨가 아예 뜯겨 나갔을 것이다. 도망가려고 능력을 사용했지만, 기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발동되지 않았다. 급히 일으킨 몸이 마비라도 걸린 것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샤아아악―

    스펙터가 입을 벌리며 내게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타이밍에 맞춰 옆으로 피할 준비를 하던 내 앞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콰직!

    스펙터의 팔을 잡아채 꺾어 버리는 이는 우서혁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스펙터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겨우 버티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으로 기울었다.

    “이런.”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를 천사연이 붙잡았다. 감기려는 두 눈을 억지로 뜨며 그에게 말했다.

    “이, 거… 독이 있는 것 같은…….”

    “본래라면 없는데. A급에서 S급이 되었으니 그런 능력 하나쯤은 생겨도 놀랍지 않군.”

    나를 가뿐하게 안아 든 천사연이 웃음기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방심해서야. 앞으로는 항상 품에 끼고 싸워야겠어.”

    “개소리…….”

    A급이 S급 몬스터를 어떻게 상대하냐. 이럴 줄 알았으면 길드원들 틈에 숨어 있을 걸 그랬다. 스펙터가 천사연과 우서혁을 상대하느라 나한테까지 못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천사연의 부름을 듣고 달려온 힐러들이 내 상태를 보고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S급 몬스터의 공격인 데다 독까지 묻어 있어서 완치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이번 클리어에 참여한 힐러는 둘 다 B급이었다. 민아린은 휴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갑작스럽게 떠맡은 C 구역 게이트도 있는 터라 B급 두 명이 최선이었다. 한마디로 인력 부족이다.

    “이번 방에서 쉬도록 하지. 가능한 만큼 치료해 두도록.”

    천사연이 조심스럽게 나를 눕혔다. 힐러 두 명이 빠르게 내 옷을 벗겨 내고 상처를 확인했다.

    “한이결 씨? 정신 차려 봐요.”

    “지금부터 독을 밀어낼 건데, 좀 고통스러울 거예요. 참을 수 있겠어요?”

    “……후우, 네.”

    상처를 만지는 손길에 나는 신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곧이어 상처를 덮은 힐러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

    몸이 퍼뜩 튀었다. 상처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강하게 다문 입 안으로 무언가 비집고 들어왔다. 흐으, 헉, 거친 숨을 내뱉으며 올려다본 그곳에는 천사연이 있었다.

    “괜찮으니까 물어.”

    미처 대답하기 전에 또다시 새하얀 빛이 번쩍이고, 견디기 힘든 감각이 몰아쳤다. 흐으윽, 머리가 뒤로 젖히며 입 안에 들어온 천사연의 손가락을 강하게 물었다. 식은땀과 눈물이 뒤섞여 얼굴이 축축했다.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덜덜 떨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할게요. 정신 놓으시면 안 돼요.”

    독을 밀어내느라 상당한 기운을 소진한 힐러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치료를 거부하고 싶었지만, 나는 억지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에서 옅은 피 맛이 느껴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