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천사연의 명령으로 내 방에서 쫓겨나게 된 김우진은 굉장히 울적한 얼굴을 했다. 녀석이 배정받은 방은 바로 옆방이나 같은 층이 아닌, 무려 24층 끝방이었다.
방 내부 생김새는 다 똑같았지만, 건물이 워낙에 큰 탓에 24층 끝에서부터 내 방까지 거리가 꽤 됐다.
“가기 싫어…….”
집에서 가져온 짐을 다시 챙긴 김우진이 축 처진 눈꼬리를 하고는 날 바라봤다. 마음에 든 상자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된 고양이처럼 잔뜩 억울하고 처량해 보였다.
“그래도 가야지 뭐.”
안타깝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길드 주인은 천사연이었고, 건물 주인도 천사연이었다. 길드에서 지내는 이상 그가 기라면 기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갔다가…….”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던 김우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보러 와도 돼?”
안 된다고 해도 올 거잖아, 너.
“그러든가.”
“으응.”
대충 허락하자 김우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다음에 놀러 올 생각 때문인지, 녀석은 가기 싫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얌전히 수행원의 뒤를 따라갔다.
‘당분간 좀 조용하겠군.’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김우진이 있든 없든 차이가 없었기에 아쉬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자 편안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 상태로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중요한 계획 중 하나였던 SS급 코트를 하태헌에게 무사히 전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것 같지만, 어쨌든.
한이결의 과거나 천사연의 꿍꿍이를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급한 것은 게이트였다.
게이트를 빨리 해결 봐야 앞으로의 계획에도 문제가 없을 텐데.
‘그럼 게이트부터 확인하고. 그다음에 하태헌을 만나서…… 아, 그러고 보니 박건호도 한번 봐야 하는데.’
대체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은 건지. 이렇게 감당 안 되는 놈들만 줄줄이 엮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쿵쿵!
그렇게 잠시간 여유를 만끽하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귀찮아. 비척비척 일어나서 문을 열자 그곳에는 아까 나갔던 김우진이 서 있었다.
“뭐야.”
어이없어서 쳐다보자 김우진이 당당하게 헛소리를 했다.
“보러 와도 된다며.”
이 자식이…….
“너 간 지 30분도 안 됐거든?”
“방에서 할 게 없어.”
“내 방은 있냐?”
입구를 가로막고 버티자 김우진이 또다시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 어쩌라고. 아랑곳 안 하고 노려보니 뾰족한 눈매까지 처지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와도 된다고 그랬으면서. 나한테 사기 쳤어.”
얼씨구.
“나쁜 새끼……. 너 솔직하게 말해. 나 싫어하지? 그러니까 계속 거리 두고 그러는 거잖아…….”
“허어.”
아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런 짓을 왜 하냐.
나는 적나라하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비켜줬다.
“들여보내 줄 테니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응.”
방으로 들어온 김우진은 싱글벙글 웃으며 주방으로 갔다. 좋냐.
“냉장고는 왜?”
“저녁 먹어야지.”
“지금 5시인데?”
“그럼 간식?”
먹을 거에 귀신 들렸나. 나는 휴일을 맞이한 아저씨처럼 소파에 누우며 말했다.
“됐어. 안 먹어.”
“안 돼. 먹어야 해. 너 너무 말랐어.”
음. 그 말에는 동의한다.
한이결의 몸이 마르고 약한 편이긴 하지. 심지어 내가 잘 챙겨 먹는 성격은 아니라 그런지 이전보다 더 말라 가는 것 같다.
아무래도 관리 좀 해 둬야 하나? 식단조절이랑 운동 정도는 해 둬도 나쁠 것 없기는 한데.
능력이라는 강한 무기를 갖고 있다 보니 몸 단련은 좀 시들시들했다. 일단 몸싸움할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
“이것 봐. 발목 가는 거.”
내 뒤를 따라 소파에 앉은 김우진이 발목을 슬쩍 잡아 왔다. 생각도 못 한 부위가 만져지는 감각에 흠칫 놀라 시선을 내렸다.
김우진의 손이 내 발목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저렇게 보니까 손 크네.
‘그보다 이거 혹시 복수인가?’
테이핑하면서 내가 발목 좀 만졌다고 너도 똑같이 만지겠다 이거냐.
“어차피 발목이나 손목은 좀 먹는다고 안 쪄.”
“그래도.”
김우진이 시선을 내려 내 다리를 바라봤다. 발목을 감싸고 있던 손이 점차 위로 올라왔다. 바짓단 안으로 들어온 손이 종아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마사지해 줄까.”
복수가 아니라 순수한 호의였나 보다.
“…할 줄은 아냐?”
어째 의심스러운데.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몸을 살짝 끌어당겼다.
“아니, 잠깐…….”
종아리 안쪽에 위치한 손이 살결을 조심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종아리를 몇 번 힘줘서 쓸어내리던 손이 그대로 쭉 올라와 무릎 뒤를 꾹 눌렀다. 다리가 반사적으로 움찔 떨렸다.
“야, 그만.”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허벅지 쪽으로 향했다. 넉넉한 바지는 이미 무릎까지 올라와 새하얀 종아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순한 마사지라기에는 어딘가 묘한 감각에 이마를 찌푸렸다.
반쯤 뜬 종아리를 반대 손으로 쭉 훑어 내린 김우진이 발목을 지나 복숭아뼈 아래를 감쌌다. 다리 한쪽이 김우진의 어깨 위로 걸쳐지자, 내 자세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해졌다.
“……김우진.”
남의 다리에 완전히 집중한 김우진에게 말했다.
“걷어차이기 전에 놔라.”
“…….”
김우진이 잠시간 갈등하더니, 천천히 손을 물렸다.
그러고 보니 김우진은 이미 한번 걷어차였지. 제대로 차서 꽤 아팠을 텐데, 그 고통을 기억하나 보다.
“반대쪽 아직 안 했는데.”
“필요 없어.”
미련 남은 표정을 짓는 김우진의 옆구리를 발로 꾹꾹 밀며 몸을 일으켰다. 이 자식은 누워 있지도 못하게 하네.
혹시 심심한 건가. 예전에 듣기로 고양이나 강아지는 심심하면 주인한테 치근덕거린다던데. 차라리 다른 일을 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김우진. 가서 밥해. 그냥 빨리 먹고 치우게.”
“…….”
내 말을 들은 김우진의 표정이 영 별로였다. 녀석이 새초롬한 얼굴을 하고는 내게서 고개를 휙 돌렸다. 이게 아닌가.
“아니……. 하기 싫으면 말고.”
“할 거야. 너 먹여야 해.”
네가 밥 안 한다고 저녁 굶을 생각은 없는데. 시켜 먹는다는 선택지도 있잖아.
그러나 내가 붙잡기도 전에 김우진은 주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삐친 티를 팍팍 내던 김우진은 내가 맛있다고 몇 번 칭찬하자 금세 귀를 붉히더니 히죽 웃었다. 단순한 놈 같으니.
“야.”
그 이후로는 평화로웠다. 나는 천사연에게 받은 게이트 자료나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김우진은 무엇을 하든 내 옆에 붙어 있었다. 그때까지는 다 괜찮았다. 괜찮은데.
“너 안 가냐?”
밤 11시가 넘어 12시가 되도록 김우진은 본인 방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내 말에 기분이 또 상했는지 녀석이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꺼졌으면 좋겠어?”
“어.”
리모컨으로 TV를 끄며 말했다.
“가서 자. 나도 이제 자게.”
“여기서 자고 갈래.”
얘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네.
“네 방에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여기서 자?”
“소파 커서 괜찮아.”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
“오늘만!”
김우진이 소파 팔걸이 부분을 붙잡으며 외쳤다. 능력이라도 써서 쫓아낼까 고민하는데, 녀석이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잔뜩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밥도 해 줬잖아! 맛있었다며. 이용할 거 다 이용하고 이젠 쫓아내냐?”
“…….”
나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알겠어. 대신 내일부터는 고집부리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라.”
“응.”
결국 똑같네. 방을 나눈 의미가 있나, 이거.
그러나 김우진은 내 허락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바를 이뤄 내지 못했다. 12시가 지나자 천사연의 수행원이 내 방을 찾아왔고, 그들은 김우진의 반항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녀석을 끌고 갔다.
방으로 데려다줄 뿐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수행원의 말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우진이 배신자를 보듯 날 노려봤지만 어쩔 수 없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건물의 주인은 천사연이니까.
***
시간이 흘러 약속했던 목요일이 되자, 수행원이 나를 찾아왔다. 자기도 갈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땡깡을 부리는 김우진을 힘겹게 떼어 낸 후 길드 건물 입구로 내려가니 천사연이 날 반겼다.
“오랜만이군, 한이결.”
“저번 주에 봤잖아.”
오랜만은 무슨. 천사연이 차 문을 열어 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하루가 멀다 하고 너를 그리워했는데.”
“어떤 식으로 부려 먹을지 계획 세우느라 정신없었나 보네.”
“예리하기도 해라.”
차에 올라타자 천사연이 내 옆에 앉으며 차 문을 닫았다.
“게이트 정보는 숙지했나?”
“어느 정도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 성심성의껏 알려 주도록 하지.”
“고맙지만 정중히 거절할게.”
“이런.”
차가 출발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간 말이 없던 천사연이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한이결.”
“뭐야.”
“나는 너와 내가 어느 정도 신뢰를 쌓은 관계라고 생각 중인데, 네 의견은 어떻지?”
뭐라는 거야.
나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그게 가능하겠냐?”
“안 될 건 뭐가 있지? 다른 문제는 서로 숨기는 부분이 있으니 이해하지만, 게이트에 관해서는 다르지 않나. 아주 좋은 협력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천사연.”
나는 짜증스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너라면 죽은 동생 붙잡고 협박이나 하는 놈을 믿을 수 있겠어? 차라리 지나가는 개를 믿는 게 쉽지 않겠냐?”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뜬 천사연이 이내 고개를 기울였다.
“의외인데. 그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그야 당연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와 나는 똑같을 텐데.”
천사연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동생이 죽은 것을 알고도 계속 모른 척하지 않았나. 이용하려고.”
“…….”
“그래서 나는 네가 동생이 죽은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판단했는데. 내 말이 틀렸나?”
그제야 나는 그가 어째서 이토록 쉽게 협력을 제안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천사연은 내가 동생에게 집착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긴. 그는 내가 여동생이 아닌 아이템을 대가로 원한 그 순간부터 변했다고 의심했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천사연.”
근데.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 해도.
“네가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입장은 아니지 않냐?”
어쩐지 울컥이는 속을 참기가 힘들었다.
아니, 하나뿐인 친오빠와 생판 남이 어떻게 똑같아? 물론 친오빠 속에 들어가 있는 나도 생판 남인 것은 맞지만, 적어도 나는 함부로 한이결의 동생에 대해 떠들지는 않는데.
“……그런가. 내가 실수했군.”
조용히 내 말을 듣던 그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미묘한 표정으로 무릎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천사연이 잠시간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게이트는?”
“…….”
“이런 상황에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아니겠지? 게이트 문제를 알아내려면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이놈이고 저놈이고 끈질기기는. 나는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게이트만.”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천사연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지. 게이트에 대한 부분은 내 책임도 어느 정도 있고……. 천사연이 나서 준다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으니, 거절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협력 관계가 됐으니 부려 먹힐 각오 정도는 하시겠죠, 천사연 마스터.”
“물론. 아주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