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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39)화 (39/394)
  • 39화

      

    천사연에게서 호출이 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온 김우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진짜 혼자 가도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냐.”

    원래도 혼자 만났다만. 별걸 다 물어보네.

    새삼 김우진의 바뀐 태도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한이결의 몸에 들어왔을 때는 내 팔에 상처가 있건 말건 천사연이 있는 방으로 밀어 넣었고, 두 번째로 만났을 때는 온갖 욕을 다 늘어놓으면서 날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었지.

    “너 많이 변했다.”

    “변했다고? 내가?”

    “이 정도로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았잖아.”

    내 말에 녀석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힘들건 말건 관심도 없지 않았나?”

    문득 이전에 김우진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은 웬일로 멀쩡하네? 맨날 질질 짜면서 나오더니.」

    그게 김우진이 한이결을 대하는 진짜 모습이다. 내가 한이결의 몸에 들어오게 되면서 김우진도 변한 거고.

    내가 아니었다면 김우진은 여전히 한이결을 싫어하고, 천사연의 명령대로 하태헌의 미행이나 했겠지.

    그가 내게 호의를 갖게 되면서 미래가 바뀌었다. 천사연도 더는 김우진을 곁에 두지 않았으니.

    “……내가.”

    내 말뜻을 이해한 김우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때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녀석이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을 약하게 붙잡았다.

    “어떻, 어떻게 해야…….”

    “됐어. 그만해.”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나는 김우진의 손을 떼어 놓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굳이 이제 와서 쓸데없는 말 할 필요 없어. 들을 생각도 없고.”

    김우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한이결이 되었다고 해서 저 감정까지 감당하고 책임져 줄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따 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마주한 김우진의 얼굴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나는 녀석을 외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상층에 도착하자 수행원이 문을 열어 줬다. 대표실로 들어서니 응접용 소파에 앉아서 태블릿PC를 보고 있던 천사연이 내게 인사했다.

    “어서 와, 한이결.”

    환한 웃음에 나는 쓴 음식을 삼킨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엄청나게 불길한데.

    “오자마자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아무리 나라도 좀 서운한데.”

    “헛소리.”

    터벅터벅 걸어가서 맞은편에 앉았다. 그에 맞춰 태블릿PC를 내려놓은 천사연이 느긋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뉴스는 이미 본 모양이군.”

    “…아, 그거.”

    그렇지 않아도 할 말이 있던 참이었다.

    “방송을 내보낸 이유가 뭐야?”

    “음?”

    “시치미 떼지 말고. 막으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잖아.”

    천사연이 오묘한 얼굴을 했다.

    “막아 주길 바랐던 건가?”

    “그것도 그렇지만……. 앞으로 나를 써먹으려면 막았어야 했을 텐데.”

    원작 소설에서 한이결이 그랬듯, 무소속으로서 천사연이 시킨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얼굴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방송이나 언론 쪽은 웬만하면 천사연이 다 막아 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라니.”

    천사연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쓰레기 처리나 시키기에는 아까워졌을 뿐이니. 중요한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은 일이 있는 법이지.”

    ……생각보다 쓸 만해 보이니 더 빡세게 굴리겠다는 건가.

    “그래서 얼굴 팔리는 것도 내버려 뒀다?”

    “굳이 막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어차피 A급 정도면 언제가 됐든 이목이 집중될 텐데.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지.”

    웃기고 있네. 본래 한이결이었으면 끝까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손썼을 거면서.

    “귀찮아졌잖아.”

    “걱정하지 마. 나름 재밌을 테니.”

    그게 싫다니까. 천사연이 말하는 ‘재밌다’는 정상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터라 영 불안했다.

    ‘그보다, 이렇게 되면 소설대로 진행할 수가 없잖아.’

    가뜩이나 지금도 바뀐 부분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

    이미 손써 볼 틈도 없을 만큼 달라져 버린 건가. 내 행동으로 인해 오차 범위가 어느 정도로 벌어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C13 구역의 게이트가 터진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했다. 원작에는 없던 사건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확인해 보기 위해 직접 가 봤지만 알아낸 정보가 없으니, 나로서는 아주 답답했다.

    “다음 주에 클리어 일정이 잡힌 게이트가 세 군데 있어.”

    천사연이 태블릿PC를 몇 번 두드리더니 내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세 장의 게이트 사진이 떠 있었다.

    C32 구역, C18 구역, N42 구역.

    “C 구역 게이트 두 곳은 이번 사건으로 블런 길드에서 넘어온 게이트고, N42는 우리 길드 게이트인데…….”

    잠시 설명을 멈춘 천사연이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C32와 C18 구역 경우는 둘 다 B급이니 다른 길드원으로도 충분하고. 문제는 S급인 N42 구역 게이트지. 본래 계획은 박건호를 보내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거든.”

    “설마…….”

    “N42 구역 게이트를 좀 가 줘야겠어, 한이결.”

    천사연이 싱긋 웃었다.

    “물론 나도 함께.”

    “절대 싫어.”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천사연이랑 또 게이트를 들어가라고? SS급 게이트에서 겪었던 일들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거절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당연히 거절하지. 애초에 나는 이쪽 길드 소속도 아니고.”

    무소속을 내세우기까지 했는데도 천사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김이 샜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따라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뭐라 해도 나는 안…….”

    “게이트 내부에 생긴 문제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나?”

    “…….”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C13 구역 게이트 클리어 기록을 확인해 보니 이상한 점이 있더군. 마지막 클리어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58일 전. 안전성을 위해 모든 길드가 50일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솔직히 따지자면 58일도 터질 정도는 아니지.”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는 뜻이야?”

    천사연이 눈을 느긋하게 깜빡였다.

    “블런 길드의 잘못은 딱 하나. 강승건이 50일 기준을 지켰다면 최소한 몬스터가 터져 나오지는 않았겠지.”

    뭐, 애초에 기대도 안 하긴 했다만. 천사연이 심상히 덧붙였다.

    “두 달 만에 몬스터가 터져 나올 만큼 게이트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나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하태헌과 함께 SS급 아이템을 꺼냈다가 보스를 깨워 버린 D8 구역 게이트. 갑작스럽게 몬스터가 터져 나온 C13 구역. 둘 다 원작의 흐름과 달라진 게이트들이다.

    “C13 구역 게이트를 다시 확인해 보는 건?”

    “C13은 어제 이후로 이미 클리어가 완료됐어. C13만이 아니라, 다른 게이트도 똑같은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봐야겠지.”

    맞는 말이었다. 모든 게이트의 문제라면, 최대한 빨리 확인해서 대책을 세워야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유가 있는 거면 설명부터 하라고.”

    “반응을 보고 싶어서.”

    천사연이 눈을 휘며 화사하게 웃었다. 하여간 재수 없는 놈.

    “언제 출발하는데?”

    “다음 주 목요일.”

    “설마 둘이서만 가자는 건 아니겠지.”

    “그럼 좋았겠지만…….”

    천사연이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정식 일정이라 인원을 채워야 해서. 데이트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데이트 같은 소리 하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꼴을 보아하니 본론은 끝난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 끝났으면 간다.”

    “성질 급하기는. 아직 할 얘기 남았으니까 앉아.”

    더 정할 게 있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라보자 천사연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 방금이랑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메시지 내용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

    “메시지?”

    갑자기? 나는 소파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김우진을 데려왔다는 게 무슨 뜻이지?”

    “아, 그거.”

    너무 간단하게 보내기는 했지.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대충 설명해 줬다.

    “김우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협박당하는 걸 보고 도와줬는데…… 내가 상대를 좀 패서. 괜히 김우진한테 화풀이할 것 같아서 방으로 데려왔어. 집에 두고 오기 좀 애매했거든.”

    “흐음…….”

    “너도 알겠지만, 김우진이 가진 능력이 좀…… 그렇잖아? 얘기를 들어 보니까 나랑 마주친 놈 말고도 여럿한테 시달렸더라고. 어차피 도와준 김에 겸사겸사 같이 지내자 한 거지.”

    “음.”

    열심히 설명해 줬는데 천사연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뭔가 마음에 안 드나 본데.

    “타인과 함께 지내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 그건…….”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한이결 성격이면 그럴 만하지. 나야 워낙 어릴 적부터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서 상관없지만.

    나는 급히 덧붙였다.

    “이제 어, 괜찮은 것 같아.”

    “그럼 나와 같이 사는 것도 가능하겠군.”

    “뭐?”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잘못 들었나?

    나는 귀를 한번 후비며 되물었다.

    “뭐라 했냐?”

    “나랑 같이 살자고.”

    시발.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바싹 붙였다. 최대한 천사연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미친 소리 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집 정도는 슬슬 구해 주려던 참이었는데. 아예 내가 사는 곳으로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쯤 되니 이제는 무서웠다.

    왜 이래, 천사연. 너 이런 성격 아니잖아.

    “네가 워낙 혼자 지내고 싶어해서 배려해 준 거였는데, 괜찮아졌다니 다행이군. 당장 내 집에 들어와 살아도 되겠어.”

    “아니, 아니! 됐어. 난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

    기겁하며 고개를 젓던 나는 천사연이 유독 진하게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

    이 개자식이 설마 또?

    “너 지금 내가 거절할 거 알고 이러는 거지?”

    “들켰군.”

    천사연이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간다.”

    그럼 그렇지. 이딴 장난질에 장단이나 맞춰 주고 있었다니. 시간 아까워 죽겠네.

    천사연은 내 싸늘한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다음 주에 들어갈 N42 구역 게이트 정보다. 상세히 읽고 숙지해 오도록.”

    녀석을 노려보며 서류를 거칠게 뺏어 들었다. 우리 제발 게이트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마주치지 말자.

    “그리고 김우진은 다른 방을 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잘나셨어, 아주.

    ‘짜증 나는 새끼.’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대표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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