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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38)화 (38/394)

38화

  

“질문의 의도가 궁금하군요. 제 사적인 부분까지 보고하라는 건 아닐 테고.”

“솔직히 말해서, A급 능력자에 대해 설명을 좀 듣고 싶군요.”

“설명이라 하면?”

“……조사해 보니 언제 능력을 각성했는지, 지금껏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파악되는 정보가 단 하나도 없더군요.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워 낸 것처럼.”

최미진의 날카로운 말에도 천사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슨 관계입니까?”

“흐음. 뭐, 지금으로써는 딱히 자랑할 만한 관계는 아닙니다.”

최미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것치고 꽤 친해 보입니다만.”

“여러모로 능력이 뛰어난 친구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티가 났나 봅니다.”

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대답에 최미진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대형 길드 마스터가 무소속 능력자와 필요 이상으로 어울리는 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텐데요, 천사연 마스터.”

“필요 이상으로 어울린다라……. 글쎄. 나는 그러길 바라는데 그쪽은 아니라서. 그렇지 않아도 섭섭하던 참입니다.”

“농담은 그쯤 하세요.”

“진심으로 대답했는데 농담으로 치부하니 슬프군요.”

따닥.

천사연이 희고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최미진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분위기가 단숨에 천사연에게로 이동했다.

“아시다시피 그는 무소속입니다. 어느 길드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인 만큼, 관리 본부가 끼어드는 건…… 지나친 간섭 같군요, 최미진 게이트 관리 센터장.”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꺼낸 말에 최미진이 입술을 다물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렇게까지 대답을 피할 줄은 몰랐는데…….’

천사연이 매사 가볍게 행동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 다루기 힘든 상대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을 꺼낸 거였는데……. 이 정도로 경계할 줄이야.

최미진은 일단 한발 물러서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지금 더 따지고 들어 봤자 천사연의 경계심만 자극하는 꼴이 되겠지. 나중에 제대로 준비해서 천사연이 아닌, A급 능력자 쪽으로 접근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서류를 챙긴 최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를 끝내겠습니다. 세 분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고, 다음에 뵙죠.”

“나도 갈래. 여기 재미없어. 센터장~ 같이 가!”

천사연과 정체불명 A급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는지 홍시아도 미련 없이 일어나서 최미진 뒤를 따라갔다.

최미진과 수행원들, 홍시아가 빠져나간 회의실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

묵묵히 서류를 챙긴 하태헌은 천사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는 하태헌을 붙잡은 것은 웃음기 띤 목소리였다.

“어제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야.”

뚜벅. 등 뒤로 단정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하태헌의 차가운 시선이 천사연에게로 향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천사연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소식을 들었을지, 궁금하지 않나?”

“관심 없습니다.”

하태헌과 천사연 간의 보이지 않는 기류가 거칠게 부딪혔다. 평소와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천사연을 바라보며 하태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들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고민이라도 해 보지 그래.”

“제 답은 같습니다.”

“그런가. 아쉽군.”

언제나처럼 아쉬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하태헌이 그대로 등을 돌리려는 찰나, 천사연이 이어 말했다.

“그럼 SS급 아이템이 하나 더 등장했다고 언론에 제보해도 상관없는 거겠지?”

하태헌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국내외 상관없이 꽤 시끄러워지겠어. 새로운 SS급 게이트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아이템을 얻어 냈으니.”

“…….”

하태헌의 시선에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천사연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야 관심이 좀 생긴 모양이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서류가 구겨졌다. 하태헌은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혼란을 억지로 짓누르며 침착하게 천사연을 응시했다.

어떻게 알아냈을까. 사실 답은 간단했다. 조금 전에도 보지 않았나. 천사연에게 안겨서 몬스터를 처리하던 그를.

‘한이결.’

천사연과 엮인 놈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최미진이 보여 준 그 영상. 하태헌은 그것을 보며 아주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따져 보자면 불쾌한 쪽에 가까웠다.

‘……틈을 주는 게 아니었다.’

SS급 코트를 건네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자 입 안이 썼다.

천사연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그따위 뻔한 말을 조금이라도 믿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태헌.”

여느 때처럼 무표정하지만, 눈빛은 짐승처럼 번들거리는 하태헌을 마주하며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나와 네 사이를 오가는 그 개새끼가 꽤나 궁금할 텐데.”

“…….”

“길을 잃은 건지, 버려진 건지, 그리워하는 주인은 있는지……. 그런 것들을 알고 싶겠지.”

천사연이 하태헌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그의 기다란 눈매가 살짝 접혔다.

“주인이 없다는 것만 확실해지면, 바로 잡아갈 거잖아. 꽤 쓸 만하니까.”

적나라한 그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하태헌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러나 끝내 부정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태헌, 나랑 내기 하나 할까.”

천사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둘 중 누가 개 목에 목줄을 채울 수 있을지. 먼저 성공한 사람이 목줄을 쥐고 상대방 앞으로 끌고 오는 것으로.”

“왜 하필 저입니까.”

“그런 질문은 내가 아닌 개에게 해야지.”

그렇게 대답한 천사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도 몰랐는데…… 개가 생각보다 멍청한 모양이야. 그게 아니면 SS급을 둘 다 손에 쥐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많든가.”

가볍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천사연은 정말로, 하태헌에게 SS급 아이템을 넘겨준 한이결을 이해할 수 없었다.

SS급 정도의 아이템이라면 A급인 본인이 써도 충분히 좋을 터였다. 그런데 왜 굳이 하태헌을 찾아가서 넘겼을까.

하태헌이 강해서? SS급에게 빚을 달아 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것도 아니면…….

‘하태헌을 키우고 싶은 건가.’

뭐가 됐든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봐 온 한이결은 지루하지 않았으니.

‘뭐, 그건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천사연은 상념을 끝내고 싱긋 웃었다.

“내 제안, 받아들이는 거겠지? 각자 노력해 보자고.”

천사연은 일부러 하태헌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린 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하태헌은 자신의 말을 듣고 한이결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전에는 그저 파악하지 못한 상대를 지켜보자는 쪽에 가까웠다면, 지금부터는 어떤 방식으로든 확인하고 싶겠지.

순진하기는.

냉정한 성격이라도 그 나이대의 혈기가 들끓는 놈이었다.

가진 패가 많은 그로서는 굳이 한이결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로헌이 가진 기밀 한두 개쯤은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천사연은 기분 좋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때마침 한이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

싱글거리며 메시지 내용을 읽어 가던 천사연의 표정이 점차 미묘하게 굳어 갔다.

***

달칵,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하태헌은 시선을 내렸다.

마치 거미줄에 몸이 걸린 벌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실수다.’

자신이 SS급 아이템을 얻었다는 것은 한이결과 길드 마스터인 이주하, 힐러 도하석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이주하는 주변 상황이 정리된 후에 공개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고, 하태헌은 동의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천사연이 알아챘다. 그것도 꽤 정확하게.

「내 제안, 받아들이는 거겠지? 각자 노력해 보자고.」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SS급 아이템을 언론에 공개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하태헌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정보를 누설한 이가 한이결이 아닐 가능성은?’

이주하와 도하석을 의심하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많았다. 이주하는 길드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마스터였고, 도하석은 그런 귀찮은 짓을 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한이결 말고는 의심 가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한이결은 무엇을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인가. 천사연의 말대로 그저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지금껏 이토록 무력한 적이 있었던가.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로헌 길드에 압박을 가하는 레퀴엠 길드를, 제대로 된 아이템 하나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게이트 안에서 들었던 한이결의 말이 떠올랐다. 맞는 말이다. 천사연과 자신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이결에게 좀 더 제대로 따져 물었어야 했다.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동시에 자신도 놀랄 만큼, 거칠고 흉포한 감정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스러운 상대였다. 자신을 향해 뻔뻔하게 짓는 웃음 하며, 무언가를 바라듯이 반짝이는 시선까지.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이결을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문득, 한이결과 했던 계약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 제게서 아이템의 대가를 받아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연락해 올 터.

“…….”

차분하게 가라앉은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우우웅- 우웅-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태헌은 피곤한 눈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회의 끝났어?]

“예. 방금 끝났습니다.”

이주하였다. 중국 출장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이주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오. 별일 없습니다. 회의 관련 서류는 챙겨 뒀습니다. 도착하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고마워. 난감했는데. 강승건 그 사람은 꼭 사고를 쳐도 이렇게 바쁠 때 치네.]

“괜찮습니다.”

[…음, 있잖아, 태헌아. 그냥 이쯤에서 못 이기는 척 부마스터 맡아 주면 안 돼?]

“마스터.”

[알아. 부담스럽고 신경 쓸 거 많아져서 싫은 거. 근데 솔직히 너 지금 일하는 거, 부마스터랑 다른 거 하나 없다? 그냥 직급만 달리는 거야.]

달래듯 말하는 이주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철철 넘쳤다.

[그리고 명색에 국내 둘밖에 없는 SS급 능력자인데 일반 길드원으로 내버려 두는 내 입장도 좀 살펴 주라. 눈치 보여 죽겠어.]

그 말에 하태헌은 잠시 침묵했다.

평소처럼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그는 이내 마음을 바꿔 나지막이 대답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처음으로 나온 거절이 아닌 답에 이주하가 반색했다.

[웬일이야? 고민? 그래, 고민 좋지! 이거 녹음했다? 나중에 빠져나갈 생각하지 말고. 꼭 진지하게 생각해 봐. 부마스터 자리가 얼마나 좋은 건데.]

“예.”

[남들은 달라고 무릎 꿇고 비는 건데. 어휴, 내 팔자야.]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던 이주하가 곧이어 미안해하며 말했다.

[이제 끊어야겠다. 오늘 고생했어. 들어가서 쉬어. 내일 한국 도착하면 연락할게.]

“네. 한국 오면 뵙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하태헌은 핸드폰을 쥐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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