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A급 이상의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덩치가 더 크고 호전적인 놈들이 A급, 나머지는 B급인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띄우는 바람은 유지하면서, 천사연의 등 뒤로 달려드는 몬스터의 뼈를 분해했다.
끼에에엑! 키아악!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는 검에 흔적조차 남지 않고 녹아내리는 몬스터를 보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 그쪽도 몰랐던 것 같은데.”
보고 들었을 당시, 혼란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린 천사연의 표정이 떠올랐다. 매사 여유 넘치던 그에게서 자주 볼 수 없는 반응이었다.
천사연이 나와 시선을 맞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눈치가 참 빨라.”
휘잉,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 이상 자세한 설명은 못 해 주니 넘어가 주면 좋겠군. 나도 지금 꽤 당황스러워서.”
당황스럽기는 개뿔이.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어련하시겠어. 어차피 제대로 된 답을 해 줄 거라곤 기대도 안 했어.”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신뢰도 없다니. 슬프군.”
당연하지만 천사연이 해치우는 속도보다 내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정면의 몬스터를 모두 녹여 버린 천사연이 몸을 돌리며 위로 날아올랐다. 고도가 높아지자 발아래로 우리를 구경하는 일반인들이 보였다. 커다란 카메라도 여러 대 있다.
“상관없어. 나도 따로 생각할 게 있으니까.”
“흐음.”
내가 손을 크게 휘두르자 달려오던 B급 몬스터 네 마리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단말마와 함께 죽어 버린 몬스터의 시체는 곧 천사연의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고 보니 데려가 달라고 칭얼거릴 때도 확인해 볼 게 있다고 했었지.”
“잠깐, 방금 뭐라고…… 칭얼?”
어이없어서 천사연을 노려보자 그가 뭐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맞지 않나. 버려진 개새끼처럼 처연한 눈빛으로 졸라 놓고. 어찌나 안쓰럽던지.”
“아니. 내가 언제?”
분위기가 좀 그렇다 보니 살짝 눈치만 본 거지, 처연… 그딴 짓은 기필코 한 적 없다.
“무자각으로 한 거라면 더 문제군.”
“헛소리는 적당히 해.”
치솟는 짜증은 자연스럽게 달려드는 몬스터에게로 향했다. B급 여섯 마리를 한 번에 묶어서 위로 들어 올렸다가, 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비명과 함께 해골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광경을 본 천사연이 웃었다.
“우리 이결이는 터프하기까지 하고. 아주 팔방미인이 따로 없군.”
“…….”
그래, 시발. 네가 내 말을 들으면 그게 이상하지.
한숨을 푹 내쉬며 능력을 갈무리했다. 날 안아 든 천사연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주변에는 타다 만 몬스터 시체가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나는 천사연의 품에서 벗어나 재킷을 벗었다.
“정확히 17분 걸렸군.”
시간을 확인한 천사연이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대충 털어 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내가 한마디 했다.
“최소한 붕대라도 좀 갖고 다녀.”
“붕대? 붕대라.”
재킷과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천사연이 셔츠 단추 두어 개를 툭툭 풀었다.
“그러고 보니 연구팀에서 지혈에 좋은 A급 붕대를 새로 만들어 냈다고 했지.”
오, 완전 괜찮은데?
“나쁘지 않네. 쓸 곳도 많을 거고.”
힐러 능력자가 턱없이 부족한 터라, 치료에 유용한 아이템들은 언제나 중요했다. 나도 상황만 되면 사서 쟁여 둘 텐데.
“그런 거라도 챙기면서 감고 다녀.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계속 내버려 두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다쳤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혀를 쯧쯧 차며 말하는데, 어째 갈수록 천사연의 표정이 묘해졌다.
“…….”
왜 저러지. 아까처럼 이상한 농담도 안 하고.
조용히 날 바라만 보는 시선에 어색해져서 입을 다무는데, 헐떡이는 목소리가 나와 천사연 사이에 끼어들었다.
“처, 천사연 마스터!”
옆을 돌아보니 살짝 통통한 체격의 남자가 땀범벅인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아까 봤던 윤재민도 함께였다.
“모, 몬스터는 다 처리된 건가?”
“보면 모르나?”
느릿하게 내게서 시선을 뗀 천사연이 남자를 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이봐, 천사연 마스터. 이번에는 나도 정말 억울해!”
허둥지둥 변명하는 남자의 행동은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천사연의 뒤로 슬쩍 물러서며 생각했다.
‘이번?’
천사연이 별다른 말이 없자 남자가 안색이 살짝 밝아지며 더욱 열심히 변명을 늘어놨다.
“진짜야! 클리어팀이 다녀간 지 얼마 안 됐고, 오늘 마침 내가 외부 일정이 있어서 갔다 오느라…….”
“언젠데.”
“어, 뭐?”
천사연이 고개를 천천히 한쪽으로 기울이며 조용히 말했다.
“언제냐고, 마지막으로 클리어한 날짜가.”
“그, 그…….”
남자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천사연이 살짝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길드 마스터라면 담당 구역의 게이트 클리어 시기 정도는 모두 알고 있을 텐데?”
“크흠, 그렇, 그렇지. 아마… 2개월 좀 넘어서…….”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게이트마다 클리어 주기는 2개월. 말이 2개월이지, 안전을 위해 레퀴엠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길드는 50일 간격으로 게이트를 관리해 오고 있다.
‘클리어 시기를 놓쳤다는 뜻이네.’
2개월이 넘었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인데, 그마저도 불확실하다니.
“2개월 넘어서라.”
천사연이 남자를 삐딱한 자세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강승건 마스터.”
블런 길드의 S급 마스터, 강승건이 천사연의 서늘한 부름에 몸을 흠칫 떨었다.
“내가 그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게이트 관리 제대로 못 하겠으면 길드 해체하고 외국에 처박혀 살라고.”
짓씹듯 읊조리는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에서 벌건 불길이 타올랐다.
“C12 구역 사건도 제대로 정리 못 한 이 시점에서 C13 구역까지 터졌으니, 이번에야말로 본부의 징계를 피하기 힘들겠어.”
“처, 천사연 마스터! 내가 정말 미안해! 그, 그러니까 본부에 얘기 좀 잘해 줘, 응? 본부 놈들은 네 말이라면 껌뻑 죽잖아! 게다가 이번에는 큰 피해도 없, 커헉!”
“헉, 마스터!”
강승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사연이 그의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뒤에서 대기 중이던 윤재민이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하하, 적당히 쓰레기 같아야지. 귀가 썩을 것 같아서 더 들어 주기도 힘드네.”
“크, 허억, 잠…….”
“그새 잊었나, 강승건 마스터? C12 구역 사건 때 나는 분명 마지막 기회를 줬어. 기회만 줬나? 몬스터로 인해 쑥대밭이 된 지역 재건 비용은 고사하고 벌금 낼 돈도 없다고 별 지랄을 떨어서 다 대 줬었지. 피해자들 장례도 치러 주고. 이 은혜 잊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 3개월 만에 이딴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쳐?”
“헉, 수, 숨이… 제발……!”
강승건의 발이 허공에 떠올랐다. 천사연의 오른손에 신체가 붙잡힌 그는 능력도 쓰지 못한 채 발버둥을 쳤다.
“C12 구역 사건 때문에 레퀴엠에서 C 구역 전체 게이트 서브 관리권을 떠맡았는데.”
“천사연 마스터, 그만하십시오!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납니다!”
“내가 서브 관리를 맡은 구역에서 이런 좆같은 일이 생겨서, 지금 기분이 아주 더러워. 이걸 다 어떻게 보상할지 궁금하네.”
천사연이 강승건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콰앙, 땅이 움푹 파이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거친 기침을 뱉어 내는 강승건에게로 윤재민이 헐레벌떡 달려갔다.
“마,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크허헉, 이런 시발, 헉, 천사연 이 개새끼야! 네가 감히 나한테!”
강승건이 시뻘건 손자국이 선명한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소리쳤다.
“너 같은 새끼는, 아버지한테 말하기만 하면 그날로……!”
“가지.”
심드렁한 표정의 천사연이 강승건에게서 등을 돌렸다. 미련 없이 떠나가는 천사연의 뒤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악에 받친 고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더러운 고아 새끼 주제에! 내가 너 가만 안 둬! 죽여 버릴 거야, 이 씹새끼야!”
***
주차된 장소로 돌아오니 타고 왔던 차 외에 다른 차가 한 대 더 서 있었다.
“길드로 돌아가. 나는 바로 갈 곳이 있으니.”
“혼자 갈 수 있는데.”
천사연이 그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차 뒷좌석 문을 열고 날 바라봤다. 뭐, 나야 편하지. 순순히 올라타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김우진 집이 어딘지 알아?”
“그건 왜 묻지?”
왜 묻기는. 가 보려고 한다, 왜.
“물어볼 수도 있지. 알아, 몰라?”
“안다면?”
“장소 찍어서 핸드폰으로 보내 줘.”
천사연은 잠시간 말없이 날 바라봤다. 아까부터 왜 저런대.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사연에게 시선을 맞추고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블런 길드 마스터를 실제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던가?”
“……아마. 왜?”
섣불리 그렇다고 답할 수 없어서 일부러 뭉뚱그려 대답했다.
“어떻던가? 블런 길드 마스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질문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떻기는. 딱히, 뭐…….”
“…….”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천사연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김우진의 거주지는 메시지로 보내 주도록 하지. 이만 가.”
차 문이 단호하게 닫혔다. 밖에서 천사연에게 몇 마디 말을 들은 수행원이 고개를 끄덕인 후, 운전석에 올라탔다.
“길드로 가겠습니다.”
“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릎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천사연의 질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블런 길드의 마스터 강승건. 그에 대해서 왜 물어보는 거지?
‘한이결과 연관이 있는 놈인가?’
소설에 등장한 적 있는 인물이던가. 잘 모르겠다. 나는 차창에 이마를 툭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
길드로 돌아와 23층 방문을 열었다. 외출했다가 곧바로 천사연을 따라 C13 구역으로 가느라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백팩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에 나갔을 때와 달리 텅 빈 백팩은 옷장 안에 잘 넣어 두고, 하태헌이 준 핸드폰은 저번처럼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그 아래에 숨겼다.
C13 구역에서 전투를 치르느라 찝찝해진 몸을 씻고 새 옷을 갈아입으니 7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본래 갖고 있던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쯤이었다.
한이결의 몸에 들어온 후로 그 어떤 연락도 온 적 없던 핸드폰의 매끈한 화면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의 메시지입니다. 금전 요구 및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천사연: (사진)」
「천사연: ^^」
사진은 지도 일부분이었다. 위치를 보아하니 길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였다. 이 정도면 혼자 갈 만하네.
답장 없이 핸드폰 화면을 닫으려다 말고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읽고 씹는 건 조금 그런가. 나는 천천히 키패드를 터치했다.
「한이결: ㅇㅋ」
「한이결: ㄱㅅ」
이 정도면 되겠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 화면을 닫았다. 바로 나가려고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천사연: 그게 끝인가?」
「천사연: 너무하네.」
답장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열심히 키패드를 눌렀다. 조심조심 눌러도 오타가 자꾸만 생겼다.
「한이결: ?」
「한이결: 원한는게ㅁ뭔데」
이번에는 화면을 끄지 않고 계속해서 노려봤다. 예상대로 답장은 금방 왔다.
「천사연: 글쎄.」
「천사연: 진심이 들어간 인사?」
뭐 그런 것쯤이야. 코웃음을 친 나는 이번에는 오타가 생기지 않도록 신중하게 답장을 작성했다.
「한이결: 감사합니다.」
「천사연: ^^…….」
눈웃음 이모티콘을 보자니 재수 없는 천사연 얼굴이 떠올랐다. 꼭 지 같은 이모티콘만 쓰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배가 고팠다. 낮에 먹은 전복죽은 소화된 지 오래였다.
‘뭐 먹을 거라도 사서 가야겠네.’
뭐가 좋을지 메뉴를 고민하며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