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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34)화 (34/394)
  • 34화

      

    나는 공중에 둥둥 뜬 상태로 방 안을 살폈다. 거실 반절이 겨우 보이는 창문으로는 내부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째 조용한 게 더 불안하네.”

    레퀴엠 길드로 오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지만, 우선 방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실을 눈치챌 만한 사람은 김우진 말고는 딱히 없었다. 민아린은 휴가를 즐기러 갔고, 박건호도 약속했으니 더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천사연이 문제기는 한데, 괜찮겠지.’

    최초로 SS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천사연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으니, 이번에도 길드에 없을 확률이 높았다.

    다양한 계산을 끝낸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창문을 닫은 후, 백팩을 소파 위에 내려 두고 신발을 벗어서 손에 들었다.

    다행이다. 김우진만 잘 달래면 큰 소란 없이 넘길 수 있을 것 같네.

    안도하며 신발장으로 걸어간 나는, 곧 비싼 가죽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 구두는 뭐지?’

    순식간에 몸이 차갑게 굳었다. 멍하니 구두를 바라보는 내 등 뒤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돌아왔군.”

    “…….”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뻣뻣한 목을 억지로 돌려서 뒤를 바라봤다. 침실 문에 기대어 서 있던 상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었다.

    “외출은 즐거웠나? 한이결.”

    “…천사연.”

    나는 절절한 낭패감을 느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미친놈아…….’

    ***

    정장이나 A급 재킷이 아닌, 크림색 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은 천사연이 커피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새벽부터 돌아다녔을 텐데, 피곤하겠군.”

    “뭐야. CCTV라도 달았냐?”

    혀를 차며 방을 살폈다. 눈에 띄는 건 딱히 없는데, 어디에 설치한 거지.

    “그럴 리가.”

    천사연이 특유의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김우진과 함께 지내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지.”

    달칵. 커피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성격상 김우진에게 구구절절 설명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럼 한 가지밖에 없지. 김우진이 잠든 새벽에 몰래 나가서 아침에 돌아오는 것.”

    거기까지 말한 천사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뭐… 계획대로 된 것 같지는 않다만.”

    “김우진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김우진이 있어야 할 방에 천사연만 남아 있다니, 굉장히 의심스러웠다.

    “이상한 오해는 그만두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뿐이니까.”

    “정말이야?”

    “쓸데없는 통제는 취향이 아니라서.”

    천사연이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김우진과 민아린이 네 목줄이 될 수 없다는 그 말, 나도 동의해. 무엇보다 그런 방식으로 널 묶어 봤자 반항만 거세지겠지.”

    잘 아네. 나는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CCTV도 없고 감시자도 붙이지 않았으니 편하게 행동해. 궁금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핸드폰도 마찬가지다.”

    “…….”

    “나한테 괜히 날 세우면서 기운 빼지 말라는 뜻이야.”

    “그러다가 내가 마음먹고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이런. 안타깝게도 그런 걱정은 안 하는데.”

    “날 그렇게까지 믿을 줄은 몰랐네.”

    “널 믿는 게 아니라.”

    천사연이 소파에 등을 길게 기대며 꼬고 있던 다리를 장난스럽게 까딱였다.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교태로운 몸짓이었다.

    “날 믿는 거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궁금할 텐데. 안 그런가?”

    “…….”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하게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알아봐야 할 정보마다 죄다 천사연이 엮여 있으니까.

    대답하지 못하는 날 향해 천사연이 나른하게 웃었다. ……아, 젠장.

    아무리 등급이 높을수록 외모도 뛰어나다지만, 저 정도면 너무한 거 아닌가. 물론 하태헌도 어마어마하게 잘생기긴 했지만 천사연은 행동이…….

    “흠.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한이결.”

    “……뭐야.”

    “이럴 때마다 매번 표정 관리에 실패하는군.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미인에게 약한 타입인가 봐?”

    나는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여 눈가를 가렸다.

    “본인 입으로 미인이라고 하냐…….”

    “그래서 내 말이 틀리다고?”

    “아니, 근데 내가―”

    창피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순간 울컥해 따지려고 입을 열었다.

    ‘내가 뭐 얼마나 그랬다고? 그래 봤자 이번이…….’

    몇 번째더라?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천사연을 만났을 때, 넋 놓고 얼굴 구경하다가 뽑아 버리기 전에 눈 깔라는 협박을 받았었고.

    그다음에는 게이트의 중간 보스를 잡아 족치던 천사연을 마주하고…….

    그리고 또…….

    “…….”

    나는 어쩐지 분노를 느끼기도 머쓱해져서 급히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마저 해 봐.”

    “됐어.”

    이래서 천사연이랑 오래 대화해 봤자 내 손해다. 나는 화제도 전환할 겸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뭐야? 이렇게 의미 없는 수다나 떨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너무하는군. 나는 꽤 재밌었는데.”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천사연이 차고 있던 은색 메탈 시계의 중앙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그러자 허공에 네모난 모양의 작은 액세서리함이 나타났다.

    ‘시계가 인벤토리 아이템인 건가?’

    저 정도로 작은 크기에 자동으로 내용물을 뱉어 내는 인벤토리 아이템이라니. 차수연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값진 인벤토리다.

    “받아.”

    천사연이 액세서리함을 내밀었다. 나는 덥석 받는 대신 찜찜한 눈으로 그것을 노려봤다.

    “이게 뭔데?”

    “선물.”

    조심스럽게 받아서 열어 보자 붉은색 보석이 박힌 은색 팔찌가 보였다. 기운을 보아하니 평범한 액세서리는 아니었다.

    “착용하면 기운 회복 속도를 2배 빠르게 높여 주는 A급 아이템이다. 러시아에서 넘어오느라 생각보다 도착이 늦더군.”

    “이걸 날 왜 주는데?”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보자 천사연이 보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왜긴. SS급 게이트를 얻어 낸 대가를 받아야지.”

    아, 그거. 그때 했던 뼈아픈 실수가 떠올라 입가가 굳었다.

    “하급 아이템 2개는 너 스스로 얻었으니, 따로 준비해 본 거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그런 이유라면 받아도 되지 않을까. 마땅히 거절할 핑계도 없긴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뺏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은 자존심 상하는데. 마음껏 쓰시지요.”

    그렇다면야. 나는 왼쪽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지금은 기운이 넉넉한 터라 별다른 차이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똑똑.

    짙은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보석을 바라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수행원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지금 바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뭐지?”

    “C13 구역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보고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천사연도 마찬가지로 처음 듣는 내용인지, 표정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상황은?”

    “몬스터를 막으며 민간인을 대피시키고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현재 측정 완료된 몬스터 등급은 B급과 A급입니다.”

    “C13 구역 담당 길드가 어디지?”

    “블런 길드입니다.”

    하. 천사연이 짜증스러운 숨을 뱉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나도 따라 일어서며 급히 말했다.

    “같이 가, 천사연.”

    내 말에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날 향했다.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시선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확인해 볼 게 있어.”

    “…….”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몬스터를 빠르게 정리해야 하잖아. 내가 도와줄게.”

    천사연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한참 동안 날 바라보던 천사연이 이내 등을 돌렸다.

    “따라와.”

    휴우. 긴장으로 차갑게 식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천사연의 뒤를 쫓았다.

    ***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천사연은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가 빠져나온 것은 심각한 상황이 맞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더 있는 듯했다.

    ‘뭐지.’

    나는 팔찌를 매만지며 고민했다. 선물이랍시고 아이템을 넘겨줄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몹시 예민해진 천사연의 곁에 있으려니 나 또한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수행원의 말에 차에서 내리자마자 멀리서 쿠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안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일반인들을 지나쳐 통제선 너머로 들어가자 대기 중이던 능력자들이 천사연을 발견하고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 레퀴엠 마스터야.”

    “이렇게 빨리…….”

    “젠장. 어서 마스터에게 연락 넣어!”

    그중 신경질적인 인상의 마른 남자가 허겁지겁 천사연에게로 달려왔다. 왁스로 범벅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남자가 불편한 웃음을 지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레퀴엠 마스터.”

    “블런 마스터는 어디 있지?”

    “그, 그게…….”

    천사연의 질문에 남자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입만 벌렸다 닫았다 하며 마땅한 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에 지켜보던 내 얼굴도 찌푸려졌다.

    담당 구역의 게이트도 제대로 관리 못 해서 몬스터가 터져 나왔는데, 길드 마스터가 자리에 없다고? 뒤늦게 출발한 천사연과 나도 도착했는데?

    쿠우웅!

    “꺄아악!”

    “조심해!”

    블런 길드에서 급히 세운 것처럼 보이는 허술한 방벽이 크게 흔들리며 비명이 들려왔다.

    “한이결.”

    천사연이 나를 불렀다. 곁으로 다가가자, 인벤토리에서 A급 재킷과 S급 검을 꺼낸 천사연이 재킷을 내게 건넸다.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S급 검을 쥔 천사연이 남자에게 명령했다.

    “방벽 치워.”

    “예?”

    반사적으로 되물은 남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됩니다. 지금 몬스터들이 통제가 안 돼서, 방벽을 치우면 사방으로 튀어 나갈…….”

    “윤재민 부마스터.”

    나는 흠칫 몸을 움츠리며 천사연을 바라봤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시린 기운을 정면으로 마주한 남자, 윤재민이 온몸을 덜덜 떨었다.

    “치우라고. 왜 두 번 말하게 하지?”

    “큭…. 죄, 죄송…….”

    “그리고.”

    천사연이 옆에 서 있던 내 허리를 한쪽 팔로 감으며 휙 끌어당겼다.

    “20분 줄 테니까 그때까지 무조건 내 앞에 블런 마스터 끌고 와.”

    “예, 예?”

    “몬스터를 다 처리하고 왔는데도 블런 마스터가 없다면…….”

    천사연이 날 품에 안은 상태로 손바닥을 검으로 베어 냈다. 새빨간 핏방울이 품에 안겨 있던 내 볼에 조금 튀었다.

    “뭐, 그건 그것대로 재밌겠네.”

    “아, 알겠습니다. 20분 내로 마스터를 반드시……!”

    천사연은 윤재민의 필사적인 대답을 듣는 척도 안 하며 내 볼에 묻은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훑어서 닦아 냈다. 가까이서 마주한 천사연에게선 딱 보기에도 언짢은 심기가 느껴졌다.

    하아. 한숨을 쉬며 천사연이 넘겨준 재킷을 입었다. 체격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헐렁했다.

    “빨리 끝냅시다.”

    윤재민에게 들릴 것 같아서 반말 대신 존댓말로 재촉하자, 눈을 휘며 웃은 천사연이 게이트에서 했던 것처럼 나를 훌쩍 들어 안았다. 그래도 두어 번 해 봤다고 처음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나와 천사연의 몸이 붕 떠올랐다. 동시에 윤재민이 지시를 내렸는지 시멘트 같던 방벽이 모래처럼 파스스 흩어졌다. 한창 전투 중이던 방벽 너머는 이미 피로 바닥이 흥건했다.

    키에에에엑!

    키아아악! 캬악!

    검은빛의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해골 전사들이 나와 천사연을 향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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