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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33)화 (33/394)
  • 33화

    9. 이상한데

    버거운 정적 속에서 겨우겨우 죽 한 그릇을 다 비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1초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침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혹시 씻을 곳 있습니까?”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하태헌이 침대 오른편에 있는 문을 열어 욕실을 보여 줬다.

    “벗은 옷은 바구니에 넣고, 수건은 수납장을 열면 있다.”

    “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꼴이 어쩌다 이렇게 됐지…….”

    방금 일어났는데도 굉장히 피곤했다. 이런 게 바로 정신공격인가…….

    천천히 병원복을 벗던 나는 하반신을 내려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마땅히 입고 있어야 할 속옷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야? 왜 속옷을 안 입고 있어?

    그 순간, 자신이 옷을 갈아입혔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하태헌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더러워진 겉옷만 갈아입힌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시발.’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욕설을 삼켜 냈다.

    아니, 속옷까지 벗긴 건 좀 그렇지 않아? 겉옷이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지만 아예 올 탈의는……!

    “됐어. 그만 생각하자.”

    더 생각하다가는 욕실을 나가자마자 하태헌의 멱살을 붙잡을 것 같았다.

    개자식. 주인공만 아니었어도…….

    나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찬물을 맞으며 평정심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좋게 생각하자. 엄청나게 쪽팔리지만 이미 벌어진 일, 차수연과 대화만 마무리되면 잽싸게 도망가리라.

    겨우 마음의 평화를 얻어 낸 나는 샤워를 끝내고 수납장에서 수건을 꺼냈다. 이제 새 옷을 입고 나가기만 하면.

    ‘어? 잠깐.’

    새 옷? 그런 걸 챙기고 들어왔던가?

    “미친.”

    하태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허겁지겁 욕실로 들어오느라 미처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못했다.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얹으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벗어 둔 병원복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거라도 입어야지 싶었지만, 이상한 꿈을 꾸느라 식은땀을 있는 대로 흘려서 다시 입기가 영 찝찝했다.

    한참 동안 병원복을 노려보며 고민하던 나는 이를 갈며 수건을 하반신에 감아 묶었다.

    ‘일단, 문을 살짝 열어서 방을 확인해 보자. 하태헌이 있으면 옷 좀 달라고 말하고, 없으면 바로 뛰쳐나가서 침대 위에 있는 옷을 주워 입는 거야.’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역시 난 천재야. 자화자찬하며 욕실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하태헌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문을 좀 더 열어 봤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하태헌 씨?”

    혹시나 해서 이름도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정말로 나갔나 봐.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며 헐레벌떡 침대로 달려갔다. 일단 바지부터 주워 입자.

    침대 위에 놓인 청바지에 손을 뻗는 그 순간.

    벌컥-

    “…….”

    “…….”

    하태헌이 돌아왔다.

    속으로 갖은 욕설을 내뱉으며 급히 두 팔을 교차해 상체를 가렸다.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 행동이었다.

    하태헌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뚝, 뚝. 조용한 방 안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이건… 옷을…….”

    “…….”

    “챙겨 가는 걸… 깜빡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더듬더듬 변명을 뱉어 낸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흐음…….”

    한참을 바라보던 하태헌이 흘린 나지막한 감탄사에 나는 얼굴을 확 구겼다.

    “뭘 보고 있습니까?”

    “이게 필요할 텐데.”

    홀딱 벗은 내게 거리낌 없이 다가온 하태헌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고 보니, 얇은 포장지에 감싸진 새 속옷이었다.

    속옷을 사러 나갔다 온 거구나. 힐끔 올려다본 하태헌은 평소와 같이 무심한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날카롭게 굴었나?’

    속옷까지 벗겼을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나도 모르게 예민해진 모양이다.

    나는 뻘쭘함에 괜히 축축한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감사…….”

    “여기 맞나?”

    벌컥!

    하태헌이 들어오면서 굳게 닫은 문이 갑자기 활짝 열렸다. 나와 하태헌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어…?”

    “…….”

    “…….”

    붉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묶은 미인.

    차수연이 나와 하태헌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엇, 어……?”

    “…….”

    “…….”

    나는 들고 있던 속옷을 떨어트렸다. 차수연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남성 속옷으로 향했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서, 설마, 둘이 그런 관계……?”

    시발!

    “절대 아닙니다.”

    “차수연 씨.”

    기겁하는 나를 등 뒤로 숨기며 하태헌이 침착하게 요구했다.

    “보시다시피 이런 상황이니 잠시만 나가 주십시오.”

    잠깐, 이런 상황이 뭔데? 제대로 설명해. 그리고 너도 나가!

    “태헌 씨…….”

    차수연의 하태헌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 친구 만들 생각 없다는 말씀이, 이런 뜻이었나요…?”

    뭐? 둘이서 언제 그런 대화를 나눈 거야?

    그것보다 나가 달라니까?

    나는 다급히 하태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태헌 씨.”

    차수연 데리고 좀 나가 봐. 내 간절한 눈빛에 하태헌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얘기를 할 만한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차수연이 창백한 얼굴로 입을 가렸다.

    “그, 그렇죠. 상대 분도 계시는데 제가 실수를…… 죄송해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차수연은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엄청 당황스럽지만… 괜찮아요. 태헌 씨가 행복하다면 전 응원할 수 있어요.”

    “……차수연 씨.”

    “그런 쪽 편견도 없거든요, 저. 그야 상대가 저 사람인 건 의외지만…….”

    하태헌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닥치고 꺼져 주세요.”

    ***

    “정말 미안!”

    차수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겨우 옷을 챙겨 입은 나는 그 모습을 뚱하니 바라봤다.

    “그게, 내가 좀 길치인데… 방을 여러 번 잘못 찾아간 탓에 이번에도 빈방인 줄 알고 노크도 안 하고 열어 본 본 거라! 저, 절대로 의도한 건…….”

    “네. 알겠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잠깐 사이에 10년은 늙어 버린 기분이었다.

    “일단, 제가 차수연 씨를 부른 이유는…….”

    백팩을 테이블 위로 올리며 설명하려던 나는 말을 멈추고 나와 차수연을 바라보고 있는 하태헌에게 물었다.

    “차수연 씨와 둘이서 대화하고 싶은데, 안 됩니까?”

    “될 것 같나?”

    역시 그렇겠지. 나는 차수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양심 있으면 뭐라도 좀 해 봐. 뜻을 담아 집요하게 노려보자 차수연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태, 태헌 씨. 자리 비켜 주면 안 될까요?”

    “차수연 씨.”

    “태헌 씨와 약속도 지킨 사람이고,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차수연과 나는 같은 A급이다. 어느 한쪽이 공격을 시도한다면 분명 큰 소란이 벌어질 것이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하태헌은 나와 차수연을 번갈아 보며 고민했다.

    “문밖에서 10분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내가 한마디 덧붙이자 하태헌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10분 뒤에 들어오겠다.”

    시계로 현재 시각을 확인한 하태헌이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백팩에서 인벤토리 아이템을 꺼냈다.

    “그때 약속했던 대로, 인벤토리 아이템입니다. 리웨이에게 직접 받은 거예요.”

    “헉. 정말?”

    차수연이 인벤토리 아이템을 손에 쥐었다. 신중하게 기운을 살핀 그녀는 곧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잖아? 어떻게 얻은 거야?”

    “그건 영업 비밀.”

    처음 차수연을 만나서 납치 협조를 구할 때, 내가 내세웠던 조건이었다. 계획을 도와준다면 리웨이가 만든 인벤토리 아이템을 구해 주겠노라고.

    차수연은 불을 다루는 강한 원소 능력자이지만, 큰 단점이 하나 있다.

    스스로 만들어 낸 불은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도 그 과정에서 옮겨붙은 불은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것.

    차수연에게 교섭을 시도하기 위해 나무 많은 숲으로 데려간 이유도 그래서다. 차수연의 능력은 게이트가 아닌 장소에서 마구잡이로 사용하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그래서 그녀는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화력을 높여 주는 아이템 외에도 물과 관련된 아이템도 상시 착용했다. 문제는 그 아이템들이 지나치게 거추장스럽고, 무거웠다.

    일반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차수연은 자연스럽게 인벤토리 아이템을 탐냈다. 구할 방법이 없어서 곤혹스럽던 차에 내가 나타난 것이다.

    차수연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거 엄청 비싼데……. 정말 가져도 되는 거 맞아?”

    “가지셔도 됩니다. 대신,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나는 인벤토리 아이템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 크기든, 얼마나 무겁던 무조건 100개의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인벤토리입니다. 그중 3개만 저에게 양보해 주세요.”

    “3개라면?”

    “우선은 이거부터.”

    나는 백팩 깊숙한 곳, 신중하게 넣어 놨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본 차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때 그 목걸이잖아?”

    “네.”

    하태헌에게 짓밟혀 보석이 깨져 나간 싸구려 목걸이.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인벤토리에 넣어 두면 파손 위험 없이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엇, 응…….”

    “목걸이를 저 대신 보관해 주세요. 저는 제대로 간수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차수연이 머뭇거리며 목걸이를 받아 갔다.

    “나머지 두 개는 나중에 부탁드릴게요.”

    목걸이는 내가 보는 앞에서 인벤토리 아이템으로 들어갔다. 목걸이를 보는 내내 답답했던 가슴 한구석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있잖아.”

    망설이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차수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목걸이, 역시 중요한 거 맞지?”

    “중요한 거라…….”

    차수연에게는 말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여동생 주려고 산 겁니다.”

    “뭐? 선물하려던 게 망가진 거야, 그럼?”

    “네. 근데 상관없어요. 죽었으니까.”

    담담하게 대꾸하자 차수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안.”

    “차수연 씨가 왜 사과를 해요.”

    사과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나는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이제는 그것도…….’

    확실하지 않잖아. 지금 상황으로는 그 무엇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럼 아이템도 줬으니, 이만 가 볼게요.”

    “뭐? 간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팩을 멨다. 차수연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덩달아 일어났다.

    “정말 이거 주려고 부른 게 다야?”

    “당연하죠.”

    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하네. 나는 창문을 열며 차수연에게 말했다.

    “하태헌 씨 들어오면 전 갔다고 말 좀 전해 주세요.”

    “인사도 안 하고 가게?”

    “그게 좋을 것 같네요…….”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나는 천천히 능력을 끌어 올렸다. 휘잉, 부드러운 바람이 다리를 감싸고 올라왔다.

    예상치 못했던 기절이었지만, 어쨌건 푹 쉬고 나니 심장에 뭉쳐 있는 기운의 양이 제법 많았다.

    “그럼 다음에 봐요, 차수연 씨.”

    “어? 으응.”

    넋을 반쯤 놓은 차수연이 멍하니 인사했다. 차수연도 오늘 하루가 참으로 다이내믹했으니, 그럴 만했다. 동질감이 느껴지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창밖으로 빠져나왔다. 일반인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고도를 높이며 근심 어린 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서 대체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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