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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32)화 (32/394)

32화

  

밝은 웃음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앞에 앉은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사과하더군. 몰라봤다고 하면서.”

“저런.”

나는 입가를 가리고 웃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이 남자의 옆모습을 환하게 비췄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반짝이고, 살짝 접힌 눈웃음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신기하네요. 마스터를 몰라보고…….”

“뭐, 한국과 다르게 미국 땅은 넓으니까 모를 수도 있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아무리 그의 정체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얼굴을 보면 예사로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챌 만한데.

“바보 같은 사람.”

소리 죽여 중얼거리자,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스리피스 슈트에서, 재킷은 벗고 조끼만 걸친 차림새의 남자는 나른한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모처럼 맞이하는 여유로운 시간이 퍽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나는 가파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끼며 메마른 입술을 축이고자 찻잔을 들었다. 향긋한 차향이 맴돌았다.

“내가 미국에 다녀오는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나?”

남자의 질문에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냥, 네. 별일 없었어요…….”

남자의 곁에 있기 위해서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길드 생활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가 없으면 언제 어느 때고 죽은 동생이 그리워졌고,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며칠 전에는 1층 화장실에서 울다가 수행원과 마주쳤는데, 그가 날 보자마자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나가 버렸다. 항상 검은 정장에 깔끔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다른 수행원들과 달리 그는 머리도 붉었고 피어싱을 했던 터라 유독 기억에 남았다.

“한이결.”

그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이렇게 부족한 내게 항상 웃어 줬던 동생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절로 눈앞이 흐려졌다. 굵은 눈물방울을 툭 떨구는 내 눈가를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조심스럽게 쓸어 만지며 속삭였다.

“죄, 죄송해요. 저는―”

“괜찮아.”

기다렸다는 듯이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남자가 인내심 있게 닦아 줬다.

“얼마든지 슬퍼해도 돼. 하나뿐인 가족이었잖아.”

“흐윽, 흑……. 네. 정말, 흐…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더는 동생을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나 슬펐지만, 동시에 행복했다. 남자의 손길에 몸을 맡긴 이 순간이 무척 편안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봤다.

“내게 의지해. 넌 혼자가 아니야.”

“…….”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누구보다 다정하게 위로해 주고 있는 남자의 눈빛은.

“죽지 마, 한이결.”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

“허억……!”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번쩍 떴다. 새하얀 이불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자 살짝 현기증이 돌았다.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몸은 놀라울 만큼 차가웠다. 나는 쿵쿵 울리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꿈 내용을 곱씹었다.

‘…대체 뭐야.’

한이결과 천사연이 사이좋게 티타임을 즐긴다고? 가능 여부는 제쳐 두고, 소설에서 그런 내용은 나온 적 없는데.

‘그냥 단순한 꿈인 건가?’

한이결이나 천사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 확신할 수 없었다.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는데,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정신이 들었군.”

“하태헌 씨.”

정장 대신 차이나 카라의 흰 셔츠를 입은 하태헌이 나를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안색이 나쁜데.”

“괜찮습니다. 그보다 여긴…….”

“로헌 길드의 입원실이다.”

“로헌 길드? 아.”

그제야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기절했었다는 게 떠올랐다. 나는 경악하며 급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지, 지금 몇 시입니까?”

다급히 묻자 하태헌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32분.”

“미친…….”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탄했다. 망했네.

김우진이 일어나기 전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지금쯤이면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도 남았을 텐데, 대체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벌써 골치가 아팠다.

“뭐지?”

“…으, 아닙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간다고?”

메고 있던 백팩을 찾기 위해 방 안을 둘러보는데, 성큼성큼 다가온 하태헌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기절했다가 방금 깨어난 주제에 어딜 간다는 거지?”

“그게…….”

“곧 힐러가 올 거다. 기절한 너를 봐준 힐러지. 몸 상태를 한 번 더 확인받기 전까지는 보내 줄 수 없어.”

“저 멀쩡합니다. 진짜로. 지금 컨디션 최고예요.”

일부러 활짝 웃으며 의견을 피력했지만, 하태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돌덩이처럼 내 어깨에서 꿈적도 안 하는 하태헌의 손을 밀어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서요. 그냥 보내 주시면 안 됩니까?”

SS급에게 붙잡혀서 낑낑거리는 내가 안쓰럽지도 않은지, 하태헌은 날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보내 주면, 그 몸을 하고 어디를 가려고? 레퀴엠 길드 마스터 만나러?”

“그게 아니라…….”

“하태헌 씨- 들어가도 됩니까?”

낯선 목소리가 하태헌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하태헌이 내 어깨를 놔주며 뒤를 바라봤다.

“들어와.”

하태헌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얼굴을 내민 건 새하얀 가운을 입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한이결 씨.”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에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날 보며 싱긋 웃었다.

“반가워요. 로헌 길드 소속 S급 힐러, 도하석이라고 합니다.”

“기절한 너를 살펴 준 힐러다.”

도하석이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예. 폐를 끼쳤네요.”

“뭘요. 하태헌 씨가 아픈 사람 데려오는 거,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쓸데없는 소리.”

아. 그제야 나는 소설에서 등장했던 도하석을 떠올렸다. 하태헌이 여자들을 데려올 때마다 죄 많은 남자라고 혀를 쯧쯧 차며 치료해 주던 힐러. 등장한 횟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로헌으로 이적해 온 민아린과 친하게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군요.”

“아! 그래도 남자는 처음이에요. 매번 여성분들만…….”

“도하석.”

하태헌이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도하석의 말을 끊었다. 남들이었으면 그 싸늘한 시선에 겁먹을 텐데, 도하석은 미소를 유지하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까칠하기는. 아무튼 다행입니다. 처음 왔을 때,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송장 치우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하아…….”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심했습니까?”

“음. 송장 치운다는 말은 농담인데, 상태가 나빴다는 건 사실입니다.”

도하석이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봤다.

“능력자에게 기운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기운이 바닥나면 몸이 받는 충격이 엄청나게 큽니다. 일반인으로 따지자면, 위험할 때까지 피를 뽑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그러고 보니 천사연도 기운이 흐트러졌을 때가 제일 위험하다고 말했었지.

“당장이야 힐러도 있고 며칠 쉬면 괜찮아지지만, 충격은 누적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절대 좋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음, 네. 그럴게요.”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기운을 그렇게 써 대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요.”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도하석은 이내 몸을 돌렸다.

“상태도 괜찮다고 하니, 난 이만 가 볼게요. 일이 바빠서. 하태헌 씨, 나 갑니다.”

하태헌에게 살랑살랑 손 인사를 보낸 도하석이 방을 나갔다. 이런저런 말을 하던 그가 가 버리자 싸한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

“…….”

“크흠. 하태헌 씨. 혹시 제 백팩…….”

“앉아라.”

조심스럽게 백팩에 관해 물어보려던 내 말을 하태헌이 가로막으며 침대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불만을 표했다.

“힐러에게 확인받으면 가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저 진짜로 가 봐야…….”

“누가 가지 말라고 했나?”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차수연 씨를 불렀다. 1시간 내로 도착한다고 하니, 만나고 가.”

“차수연 씨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정말 불러 주셨어요?”

“부르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머쓱하게 웃으며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어쩔 수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차수연을 만나고 계획했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천사연이 모르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태헌 씨.”

“말해.”

“그래서 제 백팩은 어디 있습니까?”

하태헌이 날 노려봤다. 나는 그에게 헤실 웃어 줬다.

“아니, 거기에 얼마나 중요한 게 들어가 있는지 아시잖아요. 레드 마켓에서 힘들게 얻어 낸…….”

“하아.”

나 들으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쉰 하태헌이 왼쪽 벽에 있는 붙박이장을 열었다. 내가 찾던 백팩은 그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똑똑.

내게 백팩을 집어 던진 하태헌이 노크 소리에 문으로 다가갔다. 그사이 나는 백팩을 열어서 안에 내용물을 살펴봤다. 다행히 사라진 것 하나 없이 모두 멀쩡하게 들어 있었다.

문 너머로 누군가와 대화하던 하태헌은 곧 방으로 돌아왔다. 부스럭거리는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그가 이번에는 팔에 걸쳐 둔 옷을 던졌다. 졸지에 옷으로 얼굴을 얻어맞은 나는 투덜대듯 말했다.

“아니, 좀 좋게 주면 안 됩니까? 왜 이렇게 던지세요.”

“바라는 것도 많군.”

어째 익숙하다 싶더니, 내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드라이클리닝을 맡겼는지 게이트에서 이리저리 구르느라 잔뜩 지저분해졌던 옷이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었다.

‘어? 잠깐.’

나는 더듬더듬 현재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평범한 병원복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저 기절했을 때, 옷 갈아입힌 겁니까?”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요?”

“내가.”

나는 질색하며 물었다.

“제 의사는요?”

“기절한 놈을 상대로 그딴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별걸 다 따지는군.”

하태헌이 비닐봉지에서 그릇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거나 먹어.”

뭔가 싶어서 다가가 보니, 고소한 향이 풍기는 전복죽이었다.

“저는 환자가 아닌데요…….”

“주는 대로 처먹어라.”

“넵.”

나는 얌전히 수저를 들었다.

전복죽은 굉장히 맛있었지만, 멀쩡한 몸으로 병원복을 입고 죽을 먹으니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하태헌 씨.”

“뭐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체할 것 같거든요. 같이 드실 거 아니면 좀 나가 주시죠.”

앞에 앉아서 살벌한 시선으로 날 노려보던 하태헌이 대답했다.

“네놈을 뭘 믿고 혼자 두지?”

“아니, 그럼 시선이라도 돌려 주시든가요.”

그 말을 들은 하태헌이 눈썹을 까딱이더니, 다리를 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한층 더 거만해진 자세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하태헌이 저런 성격이었나?’

어째 소설이랑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나는 하태헌의 시선을 견뎌 내며 죽을 꾹꾹 씹어 삼켰다. 아무쪼록 차수연이 빨리 와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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