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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30)화 (30/394)
  • 30화

      

    D8 구역에 있는 B급 게이트. 로헌 길드가 하태헌에게 관리를 넘겨준 게이트 중 하나였다.

    “마지막 클리어가 언제입니까?”

    “일주일 전.”

    그럼 몬스터가 있어 봤자 한두 마리겠군. 나는 게이트로 걸어 들어갔다.

    휘잉-

    게이트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강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메마른 황야가 넓게 펼쳐졌다.

    “B급 게이트치고 굉장히 넓네요.”

    내 뒤를 따라 게이트로 들어온 하태헌에게 말하자, 그가 능력을 사용하며 대답했다.

    “네가 요구한 대로 D8 구역의 게이트로 안내했으니.”

    새까만 먼지로 만들어진 기다란 검이 하태헌의 손에 쥐어졌다.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저를 너무 못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계약도 다 했는데.”

    “내가 아닌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믿기 힘들 텐데?”

    “음…….”

    그런가?

    ‘하긴. 나야 하태헌이 낯설지 않지만, 하태헌은 나를 이제 두 번 봤을 뿐이니…….’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좀 아쉽지만, 이번 기회로 관계에 진전이 있지 않을까.

    “에이, 그러지 마시고.”

    내가 싱글싱글 웃으며 바싹 다가서자 하태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뒤로 살짝 물렸다.

    “전 하태헌 씨 아이템 찾아 주려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사기 칠 거였으면 계약하기도 전에 도망쳤겠죠. 그러니까.”

    나는 하태헌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으며 잡아당겼다. 옆에 닿아 오는 하태헌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이템부터 찾고 얘기합시다. 그때 되면 제가 좀 믿음직스러워 보일 테니.”

    “이거…… 놔라.”

    “참아요. 능력 쓰려면 이게 편해서.”

    사실 이 정도도 불편하기는 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박건호와 천사연을 떠올렸다. 그 두 명과 했던 자세를 하태헌에게 요구하는 건 좀 무리겠지.

    능력을 사용하자 나와 하태헌의 몸이 하늘 위로 가뿐하게 떠올랐다. 나는 서쪽 끝에 흐릿하게 보이는 둥근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거 같은데.’

    하태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서쪽으로 이동하죠.”

    “…….”

    왜 또 그렇게 보시는지.

    날 노려보는 하태헌의 눈빛이 엄청나게 서늘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슬쩍 물었다.

    “혹시 하태헌 씨, 고소공포증이라도 있…….”

    “닥쳐.”

    “넵.”

    무섭다고 하면 고도 낮춰 주려고 했는데. 나는 하태헌의 허리를 좀 더 당겨 안으며 몸을 높이 띄웠다.

    “…….”

    시선이 한층 집요해졌다. 역시 높은 곳이 무서운 게 맞나 보다. 쌤통이네.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서쪽으로 이동했다.

    흐릿하게 보였던 무언가는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몸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우와.”

    그것은 어떤 생명체의 사체였다. 잔뜩 메마른 겉가죽은 잿빛 모래가 쌓여 있고, 훤히 뚫린 뱃가죽 너머로 굵은 갈비뼈가 듬성듬성 솟아 있었다. 긴 주둥이가 살짝 벌어지며 드러난 입 안은 뾰족한 이빨이 박혀 있고, 두껍고 짧은 앞발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겉 생김새가 여러모로 악어와 비슷했다.

    “굉장하네요.”

    하태헌에게 뱃가죽 부근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안에 들어가 봤습니까?”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장소는 가지 않는다.”

    그랬을 거다. 남들은 호기심에라도 뒤적거려 볼 텐데. 하태헌은 깔끔하게 몬스터만 클리어하고 게이트를 나가 버릴 성격이었다.

    뚫려 있는 뱃가죽으로 들어가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하태헌은 허리에 감긴 내 팔을 가차 없이 쳐 냈다.

    나는 얼얼한 팔목을 문지르며 불평했다.

    “아프잖아요.”

    “팔이 멀쩡히 달려 있는 것을 감사해라.”

    오싹.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하태헌의 뒤를 따랐다.

    사체의 내부는 마치 텅 빈 건물처럼 어둡고 음산했다.

    “일단 머리 쪽으로 올라가죠.”

    우선 심장을 찾아야 했다. 이 생명체가 악어와 비슷하다면, 심장도 목뼈 아래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거대한 생명체의 내부로 들어가, 심장을 찾아냈다.’ 정도의 간단한 설명만 쓰여 있어서, 심장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혹시 라이터 같은 거 있습니까?”

    심장을 찾으러 돌아다니기에는 내부가 너무 어두웠다. 바닥에 널려 있는 굵은 나뭇가지를 들며 묻자, 하태헌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하태헌 씨, 담배 피우세요?”

    “가끔.”

    담배를 피운다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소설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는데.

    나뭇가지에 불을 붙인 후, 바람을 한번 가볍게 둘렀다. 대충 완성된 횃불로 주변을 밝히며 천천히 이동했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사체 속은 곳곳에 금색 눈을 빛내는 까마귀들이 가득했다.

    까악, 까악.

    몬스터라기엔 크기도 행동도 모두 평범한 까마귀들이었다. 검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던 까마귀들의 시선이 나와 하태헌에게로 몰렸다.

    “이런 곳에 아이템이 있다는 건가?”

    “딱 봐도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것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바닥을 불로 밝히며 걸어가던 나는 낯선 물체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안 오고 뭐 하지?”

    “……갑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돌렸다. 저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 아이템부터 찾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다.

    “하태헌 씨.”

    한참을 걸어가던 중, 나는 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태헌 씨가 보기에 저건 뭐일 것 같습니까?”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불을 위로 들었다. 어둠이 물러나자, 커다랗고 둥근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타원형에 가까운 그것은 비교적 진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줄기가 내벽을 향해 있었고,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처럼 선명한 핏줄이 겉면에 돋아 있었다.

    “심장?”

    “맞습니다.”

    어딜 봐도 저건 심장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심장 근처에 있는 숨겨진 장치를 발견하는 것뿐인데.

    「하태헌은 심장 주변을 살피던 중,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구멍을 발견했다.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숨겨진 장치의 위치도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아, 결국 직접 돌아다니면서 찾아야 했다. 나는 나뭇가지를 땅에 내려놓고 몸을 띄웠다.

    “자세히 보고 올게요.”

    심장부터 확인해 봐야겠다. 심장 가까이 다가가자 경계하듯 날 응시하던 까마귀 여러 마리가 시끄럽게 울어 대며 날아갔다.

    ‘살아 있는 생명체 심장 같네.’

    무채색만 가득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붉은색이라 그런 걸까. 나는 심장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닿은 심장은 차가웠다.

    나는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며 심장을 꼼꼼히 관찰했다. 찾고 있는 문양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상한 점은 있었다.

    ‘왜 이렇게… 딱딱하지?’

    죽은 생명체의 심장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차갑고 딱딱했다. 마치 기계를 만지는 것처럼.

    불현듯 오면서 발견했던 물체가 떠올랐다. 이거, 설마…….

    “한이결.”

    “예?”

    하태헌의 부름에 생각을 멈추고 아래를 바라봤다. 하태헌이 바닥에 쌓여 있는 먼지를 발로 쓱 밀며 말했다.

    “이걸 찾는 건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먼지가 지나간 자리에 나타난 것은, 내가 찾던 그 문양이었다.

    “맞아요.”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문양을 자세히 살폈다. 바람을 일으켜 남아 있는 먼지를 쓸어 내자, 감춰진 문양이 모두 드러났다.

    “열 수 있는 건가?”

    하태헌이 문양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꾸부렁거리는 글자가 새겨진 문양은 처음 보면 정체를 알기 힘들다. 소설에서 하태헌도 문양은 금방 발견했지만, 정체를 알아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백팩에서 미리 챙겨 온 두 번째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이 장치를 여는 데 필요한 겁니다.”

    A급 이상 게이트에서 얻어 낸 큰뿔푸르스름나무 꼭대기 뿔가지. 이게 없다면 장치를 작동시킬 수 없다.

    삼각 형태의 뿔가지를 거꾸로 뒤집어 가운데가 움푹 파인 장치에 꽂아 넣었다.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뿔가지와 장치는 딱 들어맞았다. 제대로 끼운 것을 확인한 나는 뿔가지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달칵.

    쿠구구궁!

    바닥 너머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양이 새겨진 장치가 입을 벌리듯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며 뿔가지가 장치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상자를 꺼내 들었다.

    “짜잔~ 이것 봐요, 하태헌 씨. 보물입니다.”

    꽤 무거운 상자를 으쌰, 들어서 하태헌에게 보여 주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안 기뻐요? 제가 이걸 얻으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생각 없이 열어 보기에는 꽤 위험하게 생겼군.”

    “걱정도 많으시네.”

    바닥에 상자를 내려 둔 나는 거침없이 뚜껑을 열었다.

    “잠……!”

    “괜찮다니까요.”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SS급이 옆에 있는데 무서울 게 있나. 뚜껑을 집어 던지며 상자 속을 확인했다.

    ‘역시.’

    가지런히 접힌 군청색 코트를 발견한 나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SS급 코트. 굳이 측정을 받아 보지 않더라도, 풍기는 기운이 남다르다. 나는 코트를 들어 하태헌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하태헌 씨. 그쪽 겁니다.”

    하태헌은 내 손에 들린 코트를 천천히 살폈다. 내 말대로 S급 이상인지 확인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능력치를 확인하고 싶다면 측정을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 예상으로는 SS급이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S급 이상인 건 확실하군.”

    그러나 하태헌은 코트를 바라보기만 할 뿐, 건네받지 않았다. SS급 아이템을 얻어서 기뻐할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하태헌을 감싼 공기는 어째서인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뭐야, 왜 그러지?

    “하태헌 씨?”

    “…….”

    생각에 빠진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히 서 있던 하태헌이 돌연 내 손목을 붙잡아 강하게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놀라서 바라보자, 하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대체 뭐지?”

    새까만 눈동자가 불신으로 일렁였다. 손목을 쥔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레드 마켓부터 이 코트까지. 모두 계획한 건가?”

    “읏, 잠깐…….”

    “뭘 노리고 내게 접근한 거지? 레퀴엠 길드 마스터가 시키던가? 아이템을 찾아 주는 척, 신뢰를 얻어 내라고?”

    얼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강한 고통이었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느끼며 나는 억지로 웃었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뭐?”

    “제가 무슨 이유로 하태헌 씨에게 접근했건, 결과는 SS급 아이템 아닙니까?”

    나는 반대 손으로 하태헌의 손을 감쌌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로헌 길드에 압박을 가하는 레퀴엠 길드를, 제대로 된 아이템 하나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너……!”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어차피 수상해 보일 거라는 정도는 예상했다.

    소설 속 민아린처럼, 하태헌에게 동료로서 인정받기를 기대한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저 아는 것 많은 쓸 만한 녀석,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했다.

    “천사연과 저는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나는 차가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마주했다.

    “전 천사연에게서 벗어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로헌이 지금보다 강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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