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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9)화 (29/394)
  • 29화

    8. 새벽 산책 나왔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새벽 2시,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은 무척 고요했다.

    “으음…….”

    소파에 잠든 김우진이 몸을 뒤척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망설임 없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능력을 끌어 올려 바람으로 몸을 감싸자 발아래로 텅 빈 거리가 보였다.

    창문을 닫으며 손에 들고 있던 백팩을 등에 멨다. 이게 무슨 고생인지.

    천사연이 붙인 감시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건물 입구가 아닌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왔다. 공중을 날 수 있는 능력자는 무척 드문 터라 하늘만이 내가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여기가 맞을 텐데.”

    동쪽으로 20분 정도 날아온 나는 주변 건물을 살폈다. 커다란 고급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저 호텔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분명 여기 어딘가에…….

    “아.”

    호텔 바로 옆 골목, 어둠 속에 세워진 검은 세단을 발견한 나는 곧장 그곳으로 날아갔다. 땅으로 내려와 세팅된 차 유리를 똑똑 두드린 후 차 문을 살짝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예상대로 운전석에는 하태헌이 앉아 있었다.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가 턱을 까딱이며 올라타라는 몸짓을 보냈다.

    “그럼 실례.”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며 차 문을 닫았다. 깔끔한 차 안은 살짝 무거운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하태헌이 사용하는 향수인가.

    “바로 출발하지.”

    “아, 잠시만요.”

    이 시간까지 일하다 왔는지, 하태헌은 아직도 정장 차림이었다. 나는 백팩에서 검은 모자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또 무슨 수작이지?”

    수작이라니. 너무하네.

    “게이트 가기 전에 들릴 곳이 있습니다.”

    모자를 내려다보던 하태헌의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가뜩이나 어두운 차 안에서 하태헌의 흉흉한 시선을 마주하니 입 안이 절로 말랐다.

    “이왕 오신 거, 같이 가 주시죠.”

    “…….”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크흐흠. 아이템, S급 이상.”

    당장이라도 꺼지라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내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겨 줬다.

    “……밸트 매라.”

    휴.

    잽싸게 안전벨트를 매자 하태헌이 차를 출발시켰다.

    ***

    제작 능력을 갖춘 이들은 게이트 내부에서 얻을 수 있는 몬스터 시체 재료와 아이템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대체로 레퀴엠이나 로헌 같은 대형 길드에 설립된 연구소에서 아이템을 제작하고 연구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레드 마켓.

    공간 장악 능력자가 비틀어 둔 공간에 있는 아이템 판매 장터로, 음지에서 활동하는 제작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가죠.”

    텅 빈 지하철역 안. 평평한 벽을 바라보며 말하자 뒤에 서 있던 하태헌이 한숨을 쉬며 모자를 썼다.

    “음.”

    천천히 손을 들어 벽을 만지자, 벽이 물처럼 일렁이며 내 손을 집어삼켰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지체하지 않고 벽 너머로 들어갔다.

    벽을 통과하자마자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붉은색 풍등이었다. 연한 보랏빛 하늘 아래로 적색 천을 펼친 상점이 쭉 이어지고, 다양한 아이템이 판매대 위에 진열되어 있었다. 화려한 풍등이 꽃잎처럼 날아다니는 마켓 내부는 축제가 벌어진 것처럼 활기 넘쳤다.

    “빨리 끝내고 나가지.”

    내 뒤를 따라 들어온 하태헌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정장에 모자를 쓴 독특한 차림새인데도 꽤 어울렸다. 역시 주인공인가…….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얻을 수 있으니까.”

    “…얻는다고?”

    하태헌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앞장서서 걸어가며 그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피부에 좋은 달팽이 체액 있습니다!”

    “그레이 터틀 몬스터 등껍질로 만든 검집과 방패 판매합니다!”

    “이거 세 개에 얼마예요?”

    마켓 내부는 아이템을 사고파는 이들로 붐볐다. 나는 소설 내용을 떠올리며 상점을 신중하게 살펴봤다.

    ‘붉은색 옷감만을 판매하는 상점의 오른쪽 골목이라고 했던가.’

    붉은색, 붉은색……. 워낙에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다 보니 상점 물건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파로 가려진 상점 내부를 보기 위해 기웃거리며 걷는데, 발이 제대로 꼬이며 몸이 크게 휘청였다.

    “헉!”

    “쯧.”

    앞으로 쓰러지는 몸을 하태헌이 재빠르게 붙잡았다. 하마터면 흙바닥 구를 뻔했네.

    나는 허리를 감싸 안은 하태헌을 올려다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감사…….”

    “찾는 게 뭐지?”

    나를 놔주며 하태헌이 살벌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 녀석에게 맡겼다간 아침이 되도록 여길 헤집고 다니겠군. 말해. 찾는 게 뭔지.”

    “아니, 그거야.”

    나도 이렇게 찾기 힘들 줄은 몰랐지…….

    차마 대놓고 투덜거릴 용기는 없는 터라 순순히 대답했다.

    “……붉은색 옷감만 파는 상점이요.”

    너는 뭐 얼마나 잘 찾나 보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저기 있군. 붉은색 옷감만 파는 상점.”

    “예?”

    있나……?

    하태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정말로 붉은색 옷감만 진열된 상점이 있었다.

    ‘뭐야. 이런 것도 주인공 보정 받냐?’

    어이없어.

    허탈해하는 나를 보며 하태헌이 비웃었다. 젠장.

    나는 소설에서 언급한 대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따라 쭉 걸어가니,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낡고 너저분한 상점 하나가 나타났다.

    “계십니까?”

    입구를 가린 천을 걷어 내며 외쳤다. 커다란 가죽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내부는 빈말로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었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하태헌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누구쇼?”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잔뜩 마른 몸에 회색빛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이었다.

    ‘이 사람이다.’

    코에 동그랗고 까만 선글라스가 걸쳐져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빙긋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물건을 좀 보려고 왔습니다.”

    “물건?”

    노인이 관자놀이까지 내려온 긴 눈썹을 치켜떴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눈은 겉모습과 다르게 선명히 빛났다.

    “이 늙은이가 가진 건 보다시피 동물 가죽밖에 없는데. 가죽이라도 보여 주랴?”

    “아뇨.”

    나는 먼지 쌓인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어르신께서 직접 제작하신 ‘인벤토리’입니다.”

    “…….”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하태헌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하지. 이런 허름한 노인이 인벤토리 아이템 제작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

    “미안하네만, 젊은이.”

    잠시간의 침묵 끝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사람 잘못 봤어. 난 그저 이 낡은 상점을 지키는 별거 아닌 늙은이일 뿐이네.”

    노인이 거친 기침을 토해 내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울퉁불퉁한 지팡이를 짚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돌아가게나.”

    “그럼 이것도 필요 없으시겠군요.”

    나는 백팩에 챙겨 온 아이템을 조심히 꺼내 들었다. 의아한 낯으로 돌아본 노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건……!”

    어두운 상점 안에 몽롱한 푸른빛이 번졌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아이템을 본 하태헌이 중얼거렸다.

    “사파이어 꼬리나비?”

    정답.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사파이어 꼬리나비의 날개가 화려하게 반짝였다.

    “자, 잠깐! 자세히 보여 주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없이 굴던 노인이 지팡이를 집어 던지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밝게 웃으며 날개를 쥔 손을 휙 위로 들었다. 그러자 내 키의 반절밖에 오지 않는 노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지었다.

    “이보게, 잠깐만 보재도!”

    “하하, 보셔서 뭐 하시게요.”

    “그거야 당연히 진짜 사파이어 꼬리나비 날개인지 내 두 눈으로 확인을……!”

    “안타깝지만 이건 인벤토리 제작자한테 줄 거라서요. 어르신은 보실 수 없습니다.”

    “뭐, 뭣……!”

    내 말에 노인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전 세계에 800개밖에 안 되는 인벤토리 아이템의 제작자이자 최초의 공간 제어 능력자, 리웨이. 그는 반짝이는 물건에 제대로 환장한 노인네였다.

    능력을 이용해 온 세계를 누비며 반짝이는 물건을 죄 모아 대는 리웨이는 특히 좋아하는 아이템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파이어 꼬리나비 날개였다.

    “저도 매우 아쉽군요. 분명 이곳에 계실 거로 생각해서 날개를 챙겨 온 건데, 헛걸음이었다니.”

    리웨이가 사파이어 꼬리나비 날개를 모으고 있다는 건 극소수만이 아는 정보였다. 그 말은, 구해다 주는 이가 몇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심지어 4장이나 되는데 말이죠.”

    “4장!”

    노인, 리웨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넘어오지 않을 리가 없다. 리웨이가 현재 모은 사파이어 꼬리나비 날개의 숫자는,

    “내가, 내가 리웨이야! 인벤토리 제작자라고! 당장 보여 줘!”

    96장이었으니까.

    “예? 어르신이요? 하지만 아까는 아니라고…….”

    나는 짐짓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야 웬 얼간이 같은 놈들이 하도 찾아오니까 대충 쳐 내려고 한 거지! 어서 보여 달라니까!”

    리웨이가 답답한지 다리를 쿵쿵 굴렀다. 어이쿠, 정정하셔라. 나는 히죽 웃으며 이번에는 날개를 등 뒤로 숨겼다.

    “이놈 자식이! 보여 달라니까 왜 숨기고 지랄이야?”

    “에이. 저만 보여 드리면 손해잖아요.”

    “이런 염병할 놈을 봤나? 에잉!”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던 리웨이가 등을 팩 돌리고는 매장 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옆에 서 있는 하태헌과 눈이 마주쳤다.

    “…….”

    “…….”

    나를 보는 하태헌의 눈빛이 영 찜찜했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기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옜다, 받아라!”

    한참을 뒤지던 리웨이가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가방이었다.

    “오.”

    가방을 만져 보자 독특한 기운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인벤토리 아이템이 확실했다.

    “크기는 얼마나 됩니까?”

    “크기 상관없이 물건 100개.”

    “200개짜리는 없어요?”

    “없어!”

    100개의 물건을 넣을 수 있다라. 200개짜리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도 충분했다.

    구하려면 최소 7억이 필요한 인벤토리 아이템을 사파이어 꼬리나비 날개 4장으로 얻는 거니까.

    “여기요, 날개.”

    “오오…!”

    백팩에 인벤토리 아이템을 챙겨 넣으며 날개를 리웨이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날개를 받아 든 리웨이는 희열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폴짝폴짝 뛰었다.

    “드디어 100장 다 모았어! 히히히히! 예쁘다, 예뻐! 히히힛!”

    “…….”

    반쯤 정신 나간 눈으로 날개를 쓰다듬는 리웨이를 보고 있자니 소름이 다 돋았다. 저것이 진짜 광기…….

    나와 비슷하게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태헌을 문으로 잡아끌며 외쳤다.

    “그럼 어르신, 다음에 또 올게요.”

    “썩 꺼져! 다신 오지 마!”

    리웨이는 공간 제어 능력자이지만, 동시에 뛰어난 제작자이기도 했다.

    인벤토리 아이템만 얻고 끝내기엔 여러모로 아까운 인물이다. 나중에 또 이용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점을 빠져나왔다.

    “휴, 필요한 것도 얻었으니 이제 게이트로 갑시다.”

    “…….”

    계획했던 대로 수월하게 아이템을 얻어 냈더니 뿌듯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환하게 웃으며 하태헌에게 말하는데, 어째 그가 아까보다 훨씬 복잡해진 시선으로 날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요? 뭐 할 말 있습니까?”

    “……아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하태헌은 이내 별다른 말 없이 내게서 몸을 돌렸다. 앞서 걸어가는 하태헌의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런대.

    물어봐 봤자 대답해 줄 만한 상대도 아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태헌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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