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그 정도 취향은 남자라면 지극히 당연한…….”
“됐으니까 닥치고 식사나 하시죠?”
맞은편에 앉아 빙글빙글 웃는 박건호의 모습이 엄청나게 재수 없었다. 나는 시선을 돌리기 위해 리모컨을 찾아 버튼을 눌렀다.
팟.
[네! 이곳은 현재 길드 관리 본부 앞입니다. 오후에 있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길드 마스터 분들이 연이어 도착하고 있는데요. 아, 말씀드린 순간 로헌 길드가 도착했습니다!]
[꺄아아~!]
[이주하 마스터!]
화면에 차에서 막 내리는 로헌 길드 마스터와 하태헌이 보였다. 검은 정장을 맞춰 입은 두 사람은 내가 보기에도 무척 잘 어울렸다. 환호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로헌 길드 마스터가 웃으면서 손 인사를 보냈다.
[예뻐요, 주하 언니~!]
[꺄아악! 하태헌!]
[이쪽 봐 주세요! 오빠!]
[멋있다, 하태헌!]
묵묵히 서 있는 하태헌의 이름도 꽤 크게 들려왔다. 그의 이름을 울부짖는 여학생들은 아예 플래카드까지 들고 있었다.
“무슨 아이돌 같네…….”
인기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내가 중얼거리자 민아린이 계란말이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하태헌 같은 경우는 아이돌보다 더하죠. SS급이잖아요. 팬카페 회원 수도 장난 아니던데.”
“팬카페요?”
우, 우리 주인공 태헌이에게 팬카페가 있다고?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민아린에게 재차 물었다.
“팬카페가 있다고요? 진짜로? 회원 수가 몇인데요?”
“그, 글쎄요. 정확히는 잘. 아마 따로 사이트가 있을 거예요. 찾아보면 나올걸요?”
“팬카페…….”
하태헌이 팬카페가…… 아니, 그전에 팬이 그렇게 많았다니.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저렇게 잘생기고, 멋있고, 성실하고…. 없는 게 이상하네, 응.
‘팬카페는 어떻게 찾는 거지? 검색하면 되려나? 한이결 정보로도 가입할 수 있을까?’
어쩐지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팬카페에 대해 고민했다. 솔직히… 좀 궁금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어비스’의 독자로서 웬만한 사람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 정도면 팬카페 정도는 들어가도 괜찮지 않나? 아니면 나중에 하태헌을 만날 때 팬카페 얘기를 슬쩍…….
“이결 씨, 혹시 하태헌 좋아해요?”
“예?”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수상하게.”
딴생각 중이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내 이상한 반응에 김우진은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고, 민아린과 박건호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크흠. 수상하기는 무슨. 아니야.”
머쓱함에 괜히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다. 묘한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은 발랄한 리포터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역시 인기 있는 길드답네요! 이제 도착하지 않은 길드는 몇 없는데요. 회의 시작까지는 삼십여 분 남은…….]
나는 내게 꽂혀 있는 세 쌍의 눈을 피하고자 물컵을 들었다. 입 안 가득 물을 채워 넣고 막 삼키려는데,
[레퀴엠 길드다! 레퀴엠 길드 도착했습니다!]
[꺄아아아악! 천사연-!]
[비켜! 천사연 마스터! 이쪽 한 번만 봐 주세요!]
[멋있어요, 오빠! 천사연!]
[우윳빛깔 천사연! 내 사랑 천사연!]
“푸흡-! 쿨럭, 쿨럭! 켁!”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천사연 소식에 나는 머금고 있던 물 반절을 피 토하듯 쏟아 냈다.
“콜록, 콜록! 으윽…….”
“괜찮아요, 이결 씨?”
“미친, 왜 이래?”
“하핫, 하하하!”
잘못 삼킨 물이 제대로 사레들린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거칠게 기침을 해 댔다. 민아린과 김우진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내 등을 두드렸고, 박건호는 배를 움켜잡고 숨넘어가듯 웃었다.
[와, 천사연 마스터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군요. 볼 때마다 놀랍네요!]
[꺄아아악! 천사연! 여기 좀 봐 줘!]
[흐엉, 너무 잘생겼어…….]
[천사연! 천사연!]
[팬들에게 인사하는 천사연 마스터! 정말 다정하네요. 팬들이 많은 이유를 알겠군요.]
“시발.”
다정은 무슨.
화사하게 웃는 천사연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고작 회의 좀 하러 왔다고 저 난리가 나다니, 말이 되나? 정말 어이가 없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천사연 마스터가 하태헌보다 인기가 많습니까?”
“네? 그거야 당연히 그렇죠.”
그게 왜 당연해? 차마 민아린에게 따질 수 없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로헌 길드의 그 친구와 마스터가 같은 SS급이긴 해도, 영향력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지. 국내 1위 길드 마스터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신나게 웃은 박건호가 생수병 뚜껑을 따며 말했다.
“마스터는 국내는 당연하고 외국에서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존재야. 전 세계 SS급들과 다 알고 지낼 정도로 인맥도 넓고.”
“잘 아시네요.”
“오래 봐 왔으니까.”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민아린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 레퀴엠 길드 초기 멤버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었군요.”
박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길드가 여러모로 안정적이지만, 초기에는 많이 불안했지. 그때는 마스터도 나이가 어렸으니.”
“어린 시절의 마스터라. 뭔가 상상이 잘 안 가네요.”
민아린의 말에 나는 조용히 동조했다. 앳되고 어리숙한 천사연이라니. 너무 안 어울린다.
“지금 모습을 보면 그럴 만해. 원래도 예민한 타입이었는데, 혼자서 길드 키우느라 고생을 좀 하더니 성격도 더 꼬인 것 같고.”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길드를 혼자서 키웠다고?’
소설에서는 천사연의 과거가 언급된 적 없던 터라 굉장히 흥미로웠다. 박건호에게서 이런 값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이었다.
‘외모는 재벌 집 도련님처럼 생겨서는…….’
나는 의자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박건호를 힐끔 살폈다.
“뭐, 과거가 어쨌건 지금은 돈 잘 주는 상사니까 만족하고 있지.”
“그게 제일 중요하죠.”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걸 보아하니 천사연의 과거에 대해서는 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민아린과 대화하는 박건호에게서 시선을 돌려 TV를 바라봤다. 화면은 어느새 방송이 끝났는지, 음료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
“덕분에 즐거웠어요.”
민아린이 날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하하……. 저도요.”
나는 가식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다음에 또 놀아요! 우진 씨랑 팀장님이랑 같이.”
아니, 그건 좀.
“찬성.”
“기대되는군.”
“…….”
이 이상 떠들게 내버려 뒀다가는 날짜까지 잡아 버릴 기세라 급히 민아린의 등을 밀었다.
“네네. 어서 가세요, 민아린 씨. 버스 시간 맞춘다면서요.”
“에이, 가기 싫어라. 저 그냥 약속 취소할까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분들이라면서요. 그럼 안 되죠. 재밌게 노세요.”
민아린은 사교적인 성격답게 휴가 동안 잡혀 있는 약속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중 몇 개를 취소하고 나와 김우진과 하루를 보낸 거라는데, 다음에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휴가 끝나고 봐요!”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민아린이 방을 나갔다. 나는 닫힌 문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뒤에 서 있는 박건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쪽은 안 가십니까?”
“난 한가한데.”
특수작전부는 일정이 빡빡하지 않다던 민아린의 설명이 떠올랐다. 젠장…….
“전 쉬고 싶거든요…. 나중에 따로 한번 만나 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시죠.”
“흐음?”
내 말에 박건호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만나 준다니, 영광이긴 한데.”
“뭐? 따로 만난다고? 왜… 왜?”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던 김우진이 깜짝 놀라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래. 나도 궁금하군.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뭐지?”
“그건…….”
이유야 당연히 천사연의 과거를 알기 위해서지만, 솔직하게 대답하기엔 양심이 좀 찔렸다. 자칫하면 박건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서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이리저리 고민하던 나는 가장 무난한 대답을 꺼냈다.
“그쪽한테 관심이 좀 생겨서요.”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관심이 생긴 건 맞으니까.
“관심?”
“뭐? 과안심?”
김우진이 내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왜 이래, 아까부터.
자꾸만 치근거리는 김우진이 귀찮았지만, 지금은 박건호와의 만남이 더 중요했다. 나는 박건호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덧붙여 말했다.
“만나는 날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뭐, 나야 좋지.”
박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락 싸 들고 방까지 찾아왔던 사람치고는 담백한 반응이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약속도 얻어 냈겠다, 목적을 이룬 박건호는 미련 없이 방을 떠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박건호를 노려보던 김우진은 문이 닫히자마자 내게 매달려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왜 만나? 만나서 뭐 하게? 나도 갈래!”
“네가 거길 왜 와?”
“너 감시하러!”
“웃기지 마. 그런 명령 없었잖아.”
내 말에 김우진이 움찔하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긴가민가해서 던져 본 말인데 진짜인가 보다. 하긴. 천사연이 바보도 아니고, 김우진에게 내 감시를 맡길 리가 없지.
‘그럼 더 복잡해지는데…….’
김우진이 아닌 다른 능력자를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 워낙에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아, 김우진.”
머리 아프게 고민해 봐도 마땅한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나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김우진을 불렀다.
“됐으니까 가서 커피나 좀 사 와.”
“커피?”
어차피 붙어 있을 놈이라면 심부름이나 시켜야겠다. 숙식을 제공 받았으니 그 값을 치러라.
“어. 건너편에 카페 있잖아.”
“……뭐 마실 건데.”
“바닐라 라테. 아이스로.”
질문에 대답하던 나는 문득 티셔츠에 무언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짙은 남색이라 티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계속 입기에는 영 찝찝했다.
“성격에 안 맞게 단걸…… 으아악!”
“엉?”
망설임 없이 팔을 교차해서 티셔츠를 휙 벗어젖히는데, 투덜거리며 지갑을 챙기던 김우진이 날 보고 비명을 질렀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시끄러웠다.
“뭐, 뭐야! 오, 옷을 왜, 벗, 벗는……!”
“뭐라는 거야. 미쳤냐? 빨리 가서 커피나 사 와.”
“하, 시발. 존나… 내 심장, 아…….”
“가라고.”
김우진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욕을 줄줄 뱉어 냈다. 한동안 말 좀 가려서 하나 싶더니, 그럼 그렇지.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김우진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포장을 뜯어 흰 셔츠를 꺼내 입은 나는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을 만족스럽게 둘러봤다. 역시 혼자가 편하다니까.
“흐음, 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능력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게이트 들어가기 전에 숨겨 놨던 물건은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전원을 켜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은 받기 힘드려나.’
길드 관리 본부에서 진행하는 회의 시작 시각은 지금으로부터 3시간 전. 회의가 길어졌다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통화에 실패하면 또 언제 시도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던 그때, 달칵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하태헌 씨?”
[……말해.]
통화상으로도 못마땅한 감정이 느껴질 만큼 서늘하고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나는 웃음기를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데이트하게 시간 좀 내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