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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7)화 (27/394)
  • 27화

      

    “잘 쉬고 있나 보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안 들여보내 줄 건가?”

    댁을 내가 왜 들여보내 줘.

    “용건이 뭔데요?”

    “이렇게 서서 할 만한 대화는 아닌데. 같이 식사라도 할까?”

    “하아…….”

    불편한 티를 숨기지 않는 내 질문에도 박건호는 꿋꿋했다.

    저번부터 느낀 건데 박건호는 보고 있자면 비싼 침대 같았다. 흔들리지 않는 뻔뻔함 그런 거.

    “이결 씨, 누구예요?”

    대화 소리가 들렸는지 민아린과 김우진이 얼굴을 내밀었다. 민아린은 문 앞에 서 있는 박건호를 발견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엇, 박건호 팀장님…… 어머!”

    반갑게 인사하던 민아린이 이내 화들짝 놀라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 뒤에 서 있던 김우진의 얼굴도 동시에 일그러졌다. 왜 저래.

    “왜 그러세요?”

    “이결 씨, 이결 씨.”

    내 곁으로 후다닥 달려온 민아린이 팔을 붙잡더니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박건호 팀장님 옷차림이요!”

    “네?”

    갑자기 옷차림은 왜…….

    나는 반사적으로 박건호의 옷차림을 훑어봤다. 박건호도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아, 미친.’

    나는 이마를 감싸며 한탄했다. 아니, 왜 하필.

    “저거군요. 하얀 티에 청바지! 이결 씨 이상형!”

    “이상형?”

    가만히 듣고 있던 박건호가 되물었다.

    “확실히 청순한 느낌이 나네요. 이결 씨의 취향을 알 것 같…….”

    “그만! 그만해요, 민아린 씨.”

    나는 다급히 민아린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박건호는 이미 상황을 파악했는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웃었다.

    “하얀 티에 청바지 차림을 한 청순한 사람이 취향인가 봐?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를 갈며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박건호는 들은 척도 안 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 이해해. 내가 하얀 티랑 청바지가 꽤 어울리기는 하지.”

    “계속 그렇게 헛소리만 하실 거면 이만 돌아가 주시죠.”

    “맞아. 꺼지라고 해.”

    김우진이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박건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너무 가시 세우지 말고. 저녁 식사라도 하면서 서로 알아 가는 게 어때?”

    박건호는 김우진의 말을 무시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가 내게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특수작전부로 들어오라는 제안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설명 정도는 들어 봐도 괜찮지 않나? 내가 팀장으로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객관적으로도 우리 부서는 꽤 일할 만해.”

    나는 불신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객관적은 무슨. 정말로 일할 만한 부서였으면 다른 길드원들이 그런 평가를 할 리 없다.

    “그 말을 믿기에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헛소문이야.”

    “제가 뭘 들었을 줄 알고 헛소문이라고 하십니까?”

    “그게 뭐가 됐든.”

    박건호는 당당하게 대답하며 팔짱을 낀 채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그 눈동자에서 집요함을 읽어 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떨쳐 내기가 쉽지 않겠는데.

    “저는 어느 곳에도 소속될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천사연 마스터를 돕고 있을 뿐입니다.”

    “…….”

    “진지하게 거절하는 겁니다. 저 같은 A급 능력자는 널렸으니 다른 분을 찾아보세요.”

    차분하게 말하자 박건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를 매만지며 무언가 고민하던 박건호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도 힘들게 만드는군.”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어.”

    박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이결. 네 말대로 A급 능력자는 많아. 하지만 너만큼 상황판단이 빠르고 능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이는 드물지. 나는 네가 A급이라서 제안하는 게 아니라, 네 실력을 보고 제안하는 거다.”

    “……그래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참, 아쉬워.”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예?”

    정말 간다고? 이대로?

    예상보다 순순히 물러서는 그 모습에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나였다. 박건호는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깔끔하게 등을 돌리더니 그대로 가 버렸다.

    “의외네요. 박건호 팀장님이 집요한 건 길드 사람들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한데.”

    민아린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문을 닫으며 민아린에게 물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그렇게 자주 합니까?”

    “자주는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엄청나게 쫓아다니면서 팀으로 들어오라고 꼬신대요.”

    “뭐야, 그게. 쓰레기 같아.”

    내 옆에서 설명을 듣던 김우진이 투덜거렸다. 쓰레기는 좀 심하지 않냐.

    “근데 대부분 받아들여요. 그도 그럴 게, 특수작전부는 복지도 다른 부서보다 좋고 연봉도 세거든요. 위험한 게이트만 가다 보니 위험수당도 따로 있고……. 일정도 빡빡하지 않아서 게이트 들어갈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한가하다고 하더라고요.”

    “확실히…… 나쁘지 않네요.”

    “나쁘지 않긴 개뿔. 완전 별론데.”

    김우진이 자꾸 한마디씩 끼어들었다. 얘는 아까부터 뭐가 이렇게 불만인 거야.

    “뭐, 어쨌든……. 확실히 거절했으니까 이젠 찾아오거나 그러진 않겠죠.”

    “그래. 저딴 새끼는 그만 신경 쓰고 과자나 먹어.”

    김우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에 과자봉지를 쥐여 줬다.

    “과자 말고 차라리 뭐라도 시켜 먹는 건 어때요? 근처에 유명한 피자집 새로 생겼던데. 우리 피자 시켜 먹어요!”

    “갑자기 피자요? 아니, 근데 둘 다 언제까지 여기에…….”

    “좋네요, 피자. 당장 시키죠.”

    지금까지 민아린의 말은 듣는 척도 안 하던 김우진이 피자 시키자는 의견에 적극적으로 가세했다. 까칠하고 경계심이 강해 친해지기 어려운 김우진이 맞장구를 치자 기분이 좋아진 민아린이 활짝 웃었다.

    “그렇죠? 역시 이럴 때는 피자예요! 우진 씨는 좋아하는 피자 있으세요?”

    “저는 뭐 다 괜찮은…… 야, 한이결. 너 뭐 먹을래?”

    “어? 나는 이왕이면 매콤한 쪽으로…….”

    “그럼 이거 어때? 핫 치킨.”

    “헉. 새우도 들어간대요. 새우 알레르기 있는 사람 없죠? 그럼 이거로 해요.”

    “예에…….”

    그렇게 피자에 휩쓸린 나는 민아린과 김우진을 내쫓는 데 실패했다.

    피자 한 판을 뚝딱 해치운 둘은 이번에는 영화를 보자고 졸라 댔고, 어쩔 수 없이 영화 한 편을 결제해서 보고 나니 한밤중이 되었다. 결국 나는 둘에게 잠자리까지 내줘야 했다.

    침대가 하나밖에 없었기에 민아린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김우진과 나는 함께 소파에서 구겨 자기로 했다. 소파가 아무리 크고 좋더라도 성인 남성 두 명이 자기에는 굉장히 비좁았는데, 김우진은 의외로 군소리 없이 얌전히 몸을 뉘었다. 조금이라도 불만을 내뱉으면 가차 없이 내쫓으려고 했는데.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귀신같은 놈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맞이한 다음 날 아침.

    쿵쿵!

    “으…….”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음에 나는 비몽사몽 눈을 떴다.

    “아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김우진의 티셔츠 위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였다. 왜 이렇게 덥고 갑갑한가 했더니, 이 자식이 나를 죽부인처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뻐근한 상체를 일으킨 나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김우진의 배를 가볍게 걷어찼다.

    “으억!”

    김우진이 비명을 내지르며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남을 베개 취급한 대가다.

    쿵쿵!

    “간다, 가.”

    소음의 정체는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아침부터 누구야. 불평을 늘어놓으며 문을 향해 걸어간 나는 짜증을 담아 문을 거칠게 열었다.

    “좋은 아침.”

    “…….”

    박건호가 나를 보며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어제가 오버랩된 상황에 내 표정이 짜게 식었다.

    “지금 일어났나 보군.”

    “……이봐요, 박건호 팀장님.”

    “아, 잠깐. 잠깐.”

    한마디 하려던 내 입을 박건호가 막았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게 아니야.”

    “뭐가 아닌데요?”

    “오늘은 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거지.”

    내가 의심을 담아 노려보자 박건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봉투를 내밀었다.

    “자.”

    “이건 또 뭡니까?”

    “아직 아침 먹기 전이지? 같이 먹자고.”

    “필요 없어요.”

    잽싸게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박건호가 더 빨랐다. 문틈으로 발을 집어넣은 박건호는 힘을 줘서 문을 억지로 열었다.

    “이, 미친……. S급 힘을 이런 데다 씁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발이나 치우고 모른 척하시죠?”

    “그저 아침 식사를 같이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취급이라니. 억울하군.”

    “억울한 사람이 다 죽었답니까?”

    한참을 끙끙거리던 나는 결국 포기했다. A급이 S급을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쓸데없는 곳에 기운을 빼 봤자 내 손해다.

    “알겠으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먼저 온 손님이 있으니까.”

    “그러지.”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 안으로 돌아왔다. 나와 함께 일어난 김우진은 박건호가 찾아온 것을 알아챘는지 잔뜩 불만 어린 표정이었고, 이제 막 침실에서 나온 민아린은 아직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

    “전 괜찮아요. 이결 씨가 방 주인인데요, 뭐. 전 씻고 나올게요.”

    박건호가 왔다고 말하자 민아린은 흔쾌히 들어와도 좋다고 말하며 욕실로 향했다. 내심 민아린이 거절해 주기를 바랐던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박건호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

    “한이결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여러 개 사 왔는데. 잘됐군.”

    “우와. 이거 엄청 비싼 한식당 도시락 아니에요?”

    민아린에 이어 김우진과 내가 씻고 나오자, 박건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봉투에서 도시락을 줄줄이 꺼냈다. 도시락 뚜껑에 박혀 있는 로고를 본 민아린이 반색하며 외쳤다.

    “여기 정말 먹어 보고 싶었는데, 예약이 다 차서 엄두도 못 냈거든요. 어떻게 사 오셨어요?”

    “관계자랑 아는 사이라.”

    나는 젓가락을 입에 물며 아무 도시락이나 들었다. 확실히 반찬도 다양하고 때깔도 고운 게, 비싸 보이긴 했다. 생당근만 아니면 딱히 싫어하는 음식이 없는 나는 별다른 불만 없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김우진. 안 먹어?”

    “…먹기 싫어.”

    맛있게 먹는 민아린에 비해 김우진은 뚱한 얼굴로 박건호를 노려볼 뿐, 도시락은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도시락을 살펴보다 돈가스와 소세지가 들어간 도시락을 김우진에게 건넸다.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지. 이거 맛있겠네.”

    “으응.”

    아기자기하고 어린애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게 김우진과 딱 어울렸다. 내 예상대로 김우진은 거절하지 않고 도시락을 받았다.

    “혹시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지?”

    턱을 괴고 나와 김우진을 지켜보던 박건호가 내게 질문했다. 나는 두부를 입에 넣으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알아서 뭐 하시게요.”

    “야박하군. 순수하게 궁금할 뿐인데.”

    “속지 마.”

    김우진이 허둥지둥 음식을 삼키며 끼어들었다.

    “저 사람, 오늘도 하얀 티에 청바지를 입고 왔잖아. 분명 너한테 흑심이 있다고.”

    “호감을 사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좋은 마인드네요!”

    “……그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될까요?”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이 세 명 감당하기 정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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