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천사연은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쳤다.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낸 릴리스가 급히 몸을 뒤로 빼며 외쳤다.
『기, 기다려!』
릴리스의 왼쪽 팔은 불에 타올라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 나는 새삼 천사연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날 죽이면 다른 인간들은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겁에 질린 릴리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인질이 붙잡힌 경우에는 상대방과 협상하는 것이 최선인데, 몬스터를 상대로도 통하는 방식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상관없어.”
“자, 잠깐!”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천사연이 달려드는 몬스터를 베어 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놀라서 녀석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너 미쳤어? 어쩌자고 그런―”
“흠. 이 자세는 뭐지? 키스라도 해 주려고?”
이런 시발…….
“헛소리하지 말고!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정도면 분명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장치나 함정이 있을 거야. 섣불리 죽이면 안 돼.”
나와 천사연이 멈추자 릴리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흥, 후회할 텐데? 그 장소는 나 외엔 아무도 알지 못해! 내가 죽는다면 네놈들은 평생…….』
릴리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릴리스의 말을 듣던 천사연이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고, 릴리스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우뚱, 뒤로 넘어간 시체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이 또라이 새끼가!”
키아아아악!
끼아아아! 캬아악!
릴리스가 죽자 정신 나간 것처럼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홀을 가득 채웠던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자 남은 것은 경악한 나와 느긋한 천사연, 그리고 릴리스의 시체뿐이었다. 천사연은 나를 품에서 놔주며 갖고 있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뭐 하려고?”
바닥에 떨어진 릴리스의 SS급 검을 주워 든 천사연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검을 한번 휙 돌리더니, 그대로 릴리스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
“오른팔만 멀쩡하면 돼.”
오른팔이 잘려 나간 릴리스의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불에 집어삼켜졌다. 오른팔을 챙긴 천사연은 활활 타오르는 시체를 뒤로하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천사연, 제대로 설명해.”
“직접 보는 게 빨라.”
바닥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커다란 돌조각을 뛰어넘으며 천사연의 뒤를 쫓아갔다. 커다란 샹들리에 아래, 천사연이 평평한 벽 어딘가를 힘주어 눌렀다.
쿠구구궁!
그러자 평평했던 벽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지며 중앙에 둥근 구멍이 드러났다. 천사연은 그 구멍에 릴리스의 오른팔을 망설임 없이 쑤셔 넣었다.
콰르르릉, 쿠궁!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로 지면이 흔들거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홀 중앙 바닥이 반으로 갈라지며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내려가자.”
천사연이 검에 묻은 릴리스의 피를 툭툭 털며 말했다. 그 자연스러운 태도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사연.”
설마설마했지만, 너 진짜로.
“그저 클리어 방법을 알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
“그게 다가 아닌 거냐?”
지하실 입구로 걸어가던 천사연이 나를 돌아봤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랑 나는 같아, 한이결.”
“무슨 뜻이야?”
“서로 히든카드를 숨기고 눈치 보는 입장이라는 뜻이지.”
히든카드. 그 단어에 나는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네. 난 하나 알려 줬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알려 준 게 아니라 들킨 거고.”
쪼잔하긴.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내게 천사연이 흥미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꽤 재밌을 것 같지 않나? 서로의 히든카드를 예측하고, 발견하고, 이용하는 거.”
“난 관심 없어.”
사실 관심이야 많았지만, 굳이 티 내봤자 좋은 꼴은 못 보겠다는 생각에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안타깝군. 넘어와 주길 바랐는데.”
말과 달리 조금도 안타까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천사연이 몸을 돌렸다.
“나머지는 다음에 이어 하지. 우리 대단하신 A급의 목줄을 지키려면 슬슬 내려가 봐야 하니.”
어두컴컴한 계단을 거리낌 없이 내려가는 천사연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복잡한 숨을 내뱉었다.
***
도착한 지하실은 생각보다 넓었으며, 새하얀 전등이 천장에 박혀 있어 어둡지 않았다.
나는 수북이 쌓여 있는 모래 사이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갔다.
“김우진!”
제일 가까운 김우진부터 살펴봤다. 눈을 꾹 감은 채 고른 숨을 내쉬는 김우진은 잠들었을 뿐, 다행히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빨리 사람들 깨워, 한이결.”
“크윽!”
천사연이 모래 위에 누워 있는 박건호의 옆구리를 대충 걷어차며 말했다. 불시에 상사로부터 공격을 당한 박건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릴리스가 죽었으니 곧 성이 무너질 거야.”
“뭐? 그럼 어떡해?”
“나가야지.”
천사연이 턱짓으로 오른편 구석을 가리켰다. 검푸른 빛이 일렁이는 게이트를 발견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설마 출구 게이트?”
“그래.”
출구 게이트가 지하에 있었다니. 지하실의 존재를 모르고 릴리스를 죽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우진. 일어나, 인마!”
“으으……. 뭐야.”
어깨를 강하게 흔들자 김우진이 비몽사몽 눈을 떴다. 나는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했는데, 이 자식은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었다니. 무사하기를 바랐지만, 막상 그 꼴을 보니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하, 한이결?”
“정신 차렸으면 빨리 다른 사람들 깨워. 나가야 해.”
“뭐? 잠깐만. 여기가 어딘데?”
멍청한 소리를 하는 김우진을 무시하며 민아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김우진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깨웠음에도 불구하고 민아린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이결 씨!”
눈을 뜨고 날 알아본 민아린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외쳤다.
“제가 할 말이에요. 걱정 많이 했어요.”
“다른 분들도 괜찮으신 건가요?”
“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건물이 무너지고 있어서……. 사람들 깨워서 게이트를 빠져나가야 해요.”
“음, 알겠어요.”
눈치가 남다른 민아린은 당황하지 않고 옆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하나둘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빠진 사람 없습니까?”
“없습니다. 세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아직도 꿈속 같네…….”
“정말? SS급 보스가 떴다고?”
“하긴, SS급 정도는 되니까 이 많은 인원을 이동시키지.”
“어휴. 당분간 사막 관련된 게이트는 피해야겠어.”
옹기종기 모여서 수군거리는 길드원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쿠구궁, 본격적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지 지하실이 흔들거렸다. 기겁한 길드원들은 급히 게이트로 몸을 밀어 넣었다. 먼지가 후드득 떨어지는 지하실을 뒤로하고 팀은 한 명도 빠짐없이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세계 최초 SS급 게이트 클리어였다.
***
[N19 구역에서 새로 나타난 게이트가 SS급 게이트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아무런 피해 없이 클리어 성공한 레퀴엠 길드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레퀴엠 길드 마스터는 클리어 직후 인터뷰에서 게이트에 참여한 모든 길드원이 무사하며, SS급 아이템을 얻었다는 정보를…….]
“얼마 하려나, SS급 검.”
김우진이 과자를 집어 먹으며 태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아마 부르는 게 값이지 않을까요? A급도 최소 몇십억인데…….”
뉴스를 보고 있던 민아린이 대답했다.
“마스터는 운도 좋네. 이미 소유한 아이템이 적지 않은데, SS급까지 새로 얻었으니.”
“평생 사치를 부려도 다 쓰지 못하고 죽을 만큼 벌었네요. 부러워라.”
그건 그렇다. 화염 저항 A급 재킷에, 치유를 늦추는 S급 검에, 능력치가 파악되지 않은 SS급 검까지.
천사연이니까 감당하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제대로 쓰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아이템들이었다.
[천사연 마스터는 현재 S급과 SS급 검 두 자루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누리꾼들은 아무리 국내에 둘밖에 없는 SS급이라고 하지만, 소유한 아이템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어머.”
뉴스에 웃으면서 인터뷰를 하는 천사연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아이고, 그놈 참 잘생겼네.
“멋있어라. 마스터는 확실히 외모가 남다르긴 하네요. 성격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동의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지랄 맞긴 해도, 얼굴 하나는 끝내주지.
“뭐? 동의한다고?”
소파에 드러누워서 과자나 집어 먹던 김우진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날 노려봤다. 뭔데, 또.
“왜? 맞는 말이잖아.”
“맞는 말이잖아요.”
나와 민아린이 멀뚱멀뚱 바라보자 김우진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저렇게 생긴 거 좋아해? 막 엄청나게 부담스럽게 생긴…….”
“민아린 씨한테 너라니? 예의 없게.”
“한이결, 너 말이야, 너!”
당연히 민아린에게 묻는 줄 알았던 나는 곧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난 잘생긴 것보단 예쁜 사람이 좋다만.”
“예, 예쁜 사람? 예쁜 사람…….”
“이결 씨, 이상형 있어요?”
민아린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질문했다. 이상형?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 없던 터라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청순한 미인 정도?”
“청순한 미인이면 그런 건가요? 하얀 티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청순…… 하얀 티에 청바지…….”
내 말에 민아린은 활짝 웃으며 재밌어했고, 김우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그렇죠.”
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근데 지금 이 상황 뭐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물어보는 걸 잊고 있었다. 나는 김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근데 넌 여기서 뭐 하냐?”
“…너 감시.”
김우진이 괜히 헛기침하며 소파에 다시 앉았다. 나는 민아린에게도 물었다.
“민아린 씨는 안 바쁘세요?”
“모르셨어요? 저 휴가예요.”
아니, 그러니까 그 귀한 휴가 기간에 왜 제 방을 찾아오신 거예요…….
[다음 소식입니다. 3개월 전, C12 구역에서 벌어진 몬스터 습격 사건의 피해자들이 오늘로 15번째 시위를 벌입니다. 블런 길드 마스터는 입장 발표를 미루고 있…….]
삑.
나는 뉴스를 끄고 진지한 얼굴로 민아린에게 물었다.
“혹시 마스터가 지시 내린 게 있습니까?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든가.”
게이트를 나온 이후, 딱히 갈 곳 없는 나는 천사연을 따라 레퀴엠 길드로 향했다.
일주일 동안 갇혀 지냈던 23층 방으로 돌아와 종일 하는 일 없이 뒹굴거리던 내게 민아린과 김우진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어쩔 수 없이 의심이 들었다. 천사연이 도망가지 말라고 보냈나 싶어서.
“왜요? 감금 좋아하세요?”
“그럴 리 있습니까…….”
이럴 때마다 민아린도 정상인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상하네. 소설에서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는 그냥 놀러 온 거라서. 그런 건 우진 씨가 알지 않을까요?”
“뭐? 아냐. 나도 몰라!”
화들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젓는 김우진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넌 왜 몰라. 감시하려고 왔다며. 지시받은 거 없어?”
“몰라……. 없는데…….”
김우진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차라리 땡땡이치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을 해라. 이 해맑은 두 명을 어떻게 내쫓을까 고민하는데,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이젠 더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혹시나 해서 민아린과 김우진을 바라봤지만 두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비척비척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자마자 노크의 주인을 확인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이결.”
특수작전부 소속 팀장, 박건호. 그가 날 내려다보며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