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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5)화 (25/394)

25화

7. 일단은

길게만 느껴졌던 계단도 내려가다 보니 끝이 보였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커다란 홀을 찬찬히 살펴봤다.

먼지 쌓인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 천장은 둥근 형태였으며, 중앙에는 얼굴이 반절 깨진 어린 천사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타오르는 촛불이 얹어진 촛대가 벽 곳곳에 박혀 있고, 여러 군데 부서진 기둥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성 내부와 생김새가 흡사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 덕에 계단보다는 밝았지만, 음울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모래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도 이곳에 있는 걸까? 주변을 둘러보며 천사연에게 질문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후후후…….』

짧은 고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옆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웃음소리…….”

“정신계열 공격이야. 집중해서 듣지 마.”

『재밌는 아이가 왔구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였다. 또각, 또각. 구두 굽 소리가 홀 가득 울렸다.

『자아, 어디 한번 볼까.』

“헉……!”

목 뒤로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이 내려앉은 빈 공간뿐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돌리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천사연?”

방금까지 옆에 있던 천사연이 보이지 않았다. 홀 중앙에 서 있는 것은 나 혼자였다. 얼굴 반절이 부서진 천사상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가 억지로 공포를 느끼도록 부추기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벗어나야 하는데.’

아무래도 보스 몬스터의 주 능력이 환각인 모양이다. 천사연의 기운을 받아 임시 S급이 된 덕분에 버티고 서 있는 거지, 평소였다면 이미 이성을 잃고도 남았을 것이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환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았다, 아이야. 네가 가진 고통을.』

마치 연인에게 사랑을 읊어 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나는 떨리는 눈을 감았다 떴다.

“형님.”

“하…….”

짙게 깔린 새하얀 안개 너머로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허탈한 숨을 뱉어 냈다.

“뭐야. 기껏 와 줬더니 반응이 왜 이래요?”

부스스한 금발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무해, 진짜. 투덜거리던 녀석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까다로운 건 알아줘야 해. 뭐, 그게 형님 매력이라면 매력이지만…….”

나를 힐끔 보며 쓸데없는 소리를 줄줄 이어 가는 그 모습은 놀라울 만큼 진짜 같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앳된 느낌이 남아 있는 새하얀 뺨과 금발 사이로 보이는 피어싱, 빛바랜 청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 뚫어지겠네. 뭘 그렇게 쳐다봐요?”

귀를 살짝 붉힌 녀석이 내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괜히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이리 와요.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데려왔어요.”

누굴 말하는 건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내가 가진 고통을 봤다는 게 결국 이건가.

“어서요. 내가 얼마나 힘들게 데려왔는데.”

“…….”

그가 새하얀 손을 뻗었다.

“많이 보고 싶어 했잖아요.”

그래. 많이 보고 싶었지. 그때도, 지금도.

“안 갈 거예요? 그러다 후회해요. 자, 빨리 잡아요.”

설령 저 손이 환상이 아닌 진짜라고 하더라도 나는 붙잡을 수 없었다. 내가 갈등한다고 여겼는지, 환상이 흥얼흥얼 음정에 맞춰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 제 손을 잡아요. 같이 가요. 이곳은 지루하잖아. 나는 다 알아요. 돌아가고 싶지?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바칠 거잖아.”

바람에 흩날리는 꽃처럼 손이 흔들거렸다.

“가자. 모두 포기하고 가 버리자.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해? 왜 혼자서만? 왜? 왜?”

“…….”

점점 숨 쉬는 것이 버거워졌다. 당장 이 끔찍한 환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가도, 다 포기하고 그를 따라가고 싶기도 했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나칠 만큼 새하얀 손이 점점 가까워졌다.

『꺄아아아악!』

“한이결.”

환상이 나를 붙잡기 직전, 처절한 비명과 함께 강한 힘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던 안개가 사라지고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천사연…….”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천사연의 얼굴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리는 여자를 발견했다.

『감히, 하찮은 인간 주제에……! 키아아악!』

이마에 돋아난 두 개의 뿔 중 하나가 잘려 온 얼굴이 피범벅이 된 여자가 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름다운 외모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한 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저 여자가 보스 몬스터 릴리스인가.

“뿔 하나를 잘라 냈으니 방금처럼 강한 환각은 이제 쓸 수 없어.”

“아…….”

아무래도 내가 환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릴리스와 접전을 벌인 모양이다. 나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내가 할 건?”

“당연히 하나뿐이지. 어깨에 팔 둘러.”

천사연이 상체를 내 쪽으로 수그리며 말했다. 이럴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하려니까 역시 좀 불편하다.

“그냥 평범하게 업히는 게.”

“그 질문의 답은 저번에 한 거로 아는데.”

젠장…….

그래도 이번에는 보는 눈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어색한 몸짓으로 어깨에 팔을 두르고 기대자, 천사연이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안아 들었다.

“그래도 SS급 보스인데, 나를 안은 채로 상대할 수 있다고?”

“충분히.”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임시 S급이니, 능력에 사용될 기운은 넉넉했다. 바람이 몸을 감싸는 것을 확인한 천사연은 바로 릴리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채앵!

불꽃이 화르륵 번졌다. 혈화가 입혀진 S급 검을 릴리스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막아 냈다. 가까이에서 본 릴리스는 고양이처럼 샛노란 눈에 날카로운 송곳니, 커다란 박쥐 날개를 달고 있었다.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해 주마, 침입자 놈들!』

릴리스가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콰앙! 내려친 검날에 바닥이 깊게 파이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걸 본 나는 확신했다. 릴리스가 쥐고 휘두르는 저 검이 바로 SS급 아이템이라는 것을.

『쥐새끼 같은 놈들!』

콰직, 쾅!

천사상이 부서져 바닥으로 쏟아졌다. 새하얀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아하하하! 릴리스가 날개를 펼치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어디 도망쳐 봐, 쥐새끼들아! 잡히면 두 다리를 뽑아 버릴 거야! 머리는 잘라서 큰 유리병에 넣어 줄게!』

발목을 노리는 릴리스의 검을 피한 천사연이 손목을 돌려 검의 궤도를 바꿨다. 나는 그 흐름에 맞춰 바람의 방향을 바꿨다.

채앵!

릴리스의 목을 노린 검이 아슬아슬하게 막혔다. 릴리스가 고장 난 인형처럼 드드득,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쥐새끼에게 업힌 새끼 쥐새끼, 두 마리의 쥐새끼들, 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에 또다시 두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챈 천사연이 릴리스의 검을 강하게 쳐 냈다. 나는 뻐근한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상대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어. 너무 빨라.”

저번에 상대했던 S급 몬스터들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르고 변칙적인 움직임이었다. 심지어 공중전이라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상대는 볼 필요 없어.”

바람에 살랑이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천사연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때처럼 나한테 집중해.”

“뭐?”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실성한 낯으로 웃는 릴리스와 무표정한 천사연의 검이 또다시 부딪혔다. 불꽃이 바람결에 길게 흩날리며 날 감싸 안은 남자의 얼굴을 비추고 지나갔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천사연의 말을 믿고 따라 주는 것. 나는 릴리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천사연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아.’

선명한 눈동자가 살짝 아래로 향한다. 어깨가 뒤로 당겨지고, 하체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뜻인가.’

나는 재빨리 아래쪽 바람에 강도를 더하고 검을 둘러싼 바람의 각도를 틀었다. 다리를 든든하게 감싼 바람이 천사연의 자세를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동시에, 검 끝이 목표를 향해 더 빨리 움직이도록 도왔다.

『캬아아악!』

마치 뱀이 먹잇감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검이 릴리스 왼쪽 어깨에 사정없이 박혔다. 그 짧은 순간, 천사연은 검날을 한번 뒤틀어 살점을 파헤쳤다. 릴리스가 입을 벌리고 녹슨 쇳소리를 길게 흘렸다.

『하아악! 키아아악!』

어깨에 붙은 불이 릴리스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SS급 신체라 다른 몬스터처럼 빠른 속도로 타오르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악에 받친 릴리스가 쾅쾅 발을 굴렀다. 그러자 쿠구궁, 천장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키아아악! 키아악!

캬아아!

수십 마리의 몬스터였다. 온 몸통이 눈알로 가득 찬 거미부터 살점이 썩어서 녹아내린 좀비까지, 다양한 형태의 몬스터가 우리를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기어 왔다.

“꽉 잡아.”

천사연이 속삭였다. 나는 한 손으로 재킷을, 남은 손으로는 천사연을 힘주어 붙들었다.

끼아아아아!

천사연이 새까만 입을 쩍 벌린 몬스터의 얼굴에 검을 쑤셔 박았다. 빼내는 대신 그대로 팔을 횡으로 쭉 긋자, 가까이 다가오던 몬스터들의 머리가 반으로 갈렸다. 질척한 피가 터져 나오며 나와 천사연의 위로 뿌려졌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천사연은 신중하게 검을 휘둘렀다.

다섯, 열, 열일곱. 검이 파고들 때마다 몬스터가 죽어 나갔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나는 불이 더 크게 타오르도록 능력을 쏟아부었다. 뜨거운 불길이 나와 천사연을 보호하듯 감쌌지만, 몬스터들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윽, 릴리스를 찾아야 해!”

보스를 지키려고 이성을 잃은 몬스터들이다. 릴리스를 죽이지 않는 이상, 몬스터들은 끊임없이 몰려들 것이다. 천사연이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12시 방향, 확인해.”

“크윽! 없어!”

샹들리에에 숨어 있던 몬스터가 날 노리고 덤벼들었다. 능력으로 몬스터를 쳐 내며 급히 대답했다.

“5시.”

그어어, 구더기가 들끓는 손을 뻗으며 다가오던 몬스터의 머리를 천사연이 베어 냈다.

“없어!”

“7시, 세 번째 기둥 뒤.”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천사연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몬스터가 단숨에 잘려 나갔다. 끼아아악, 살점 찢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가득 차올랐다. 허공에 흩날리는 불꽃 사이로 세 번째 기둥이 드러났다.

“있어……!”

잠깐이지만 박쥐 날개 끄트머리가 분명히 보였다. 천사연이 발목을 붙잡은 여러 마리의 몬스터를 가차 없이 끊어 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키아아아악!』

키아아! 캬아아악!

쿠구구궁, 쿠구궁!

우리와 눈이 마주친 릴리스가 다시 한번 울부짖자 몬스터가 일제히 뒤를 쫓아왔다. 그새 숫자가 늘었는지 땅이 울리고 천장에서 돌조각이 쏟아져 내렸다. 뿌연 먼지 너머로 당황하는 릴리스를 발견한 천사연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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