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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4)화 (24/394)

24화

  

나는 순간 대답도 잊고 그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

“멍청하네, 한이결.”

그 말을 끝으로 천사연은 나를 놔주었다. 상체를 일으킨 나는 생채기가 난 것처럼 쓰라린 목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언제 눈치챈 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지금까지 천사연을 상대하면서 여동생에 대한 부분은 한 번도 말을 꺼낸 적이…….

“동생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이결.”

천사연이 입고 있던 붉은 재킷을 내게 던졌다.

“대가로 요구했어야지.”

“아…….”

“하던 대로 울면서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빌지 그랬어.”

그제야 나는 게이트를 들어오기 전, 천사연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대가가 뭐냐고 묻던 천사연에게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 게이트 내부에서 얻을 수 있는 하급 아이템 두 가지를 가져다주십시오.」

하급 아이템 두 개. 그렇게 대답한 직후 무언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었지.

“하…….”

천사연의 말대로다. 나 진짜 멍청하네.

천사연의 감시를 피해 도망칠 기반을 마련하려면 여동생의 존재가 가장 중요했다. 내가 여동생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일수록, 천사연은 내 목줄을 쥐고 있다고 착각할 테니까.

그 계획을 스스로 망쳤다. 한이결은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좀 더 고려해야 했다. 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족을 가져 보지 못한 자의 한계였다.

완벽한 패배다. 나는 한숨을 쉬며 비틀거리는 몸을 힘주어 일으켰다.

“천사연.”

카드 게임으로 놓고 보자면 조커 패를 들킨 상황이나 다름없었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내게는 남아 있는 패가 많았다.

“인정할게. 내가 졌어.”

이번만큼은 말이지. 나는 일부러 보란 듯이 씨익 웃어 주었다.

“근데 나도 성질머리가 있어서 순순히 끌려다니기는 좀 싫네?”

“흐음. 다루기 힘들 거라 생각은 했지만…….”

내 태도에 천사연은 오히려 흥미가 동한 듯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다.

“게이트 클리어까지는 그쪽 말대로 협조해 줄게. SS급께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A급의 협조가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짧은 순간 동안 많이 고민했다. 그냥 다 버리고 도망갈까. 어차피 짧은 인연들이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숨 막히게 자유를 억압당하며 살아도 괜찮을 만큼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뿐이야. 게이트를 나가서도 너한테 휘둘릴 생각은 없어.”

그러나 결국 내가 택한 길은 이쪽이었다.

“민아린과 김우진이 내 새로운 목줄이 될 거라고?”

나는 눈가를 일그러뜨리면서도 꿋꿋하게 미소를 유지했다.

“웃기지 마. 동생을 포함해서, 그 사람들은 절대 내 목줄이 될 수 없어.”

소설 속에서 한이결은 수많은 조연 중 한 명이다. 10번도 채 등장하지 않았으며, 나이마저도 언급되지 못한, 그저 그뿐인 인물.

“동생도 죽었는데 민아린과 김우진까지 죽으면, 내가 네 곁에 남아 있을 것 같아?”

한이결의 몸으로 눈을 뜬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이결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여동생이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왜 목숨을 바칠 만큼 천사연을 사랑했는지,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지……. 나와 닮은 과거를 마주하기 무서워서 외면하기 바빴다.

“최선을 다해서 지켜. 천사연.”

그러나 이제는 알고 싶어졌다. 이번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한이결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 놔야 했다.

“동생에 비하면 부실한 그 목줄이, 날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될 테니까.”

그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날 바라보던 천사연이 입술을 길게 끌어 올리며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 정말…….”

허리까지 숙이며 큭큭거리던 천사연은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그래. 확실히 그 여자가 끼어든 게 아니라는 건 알겠네.”

천사연은 성의 없이 던졌던 붉은 재킷을 들고 모래를 툭툭 털더니 내 어깨에 덮어 주었다.

“나도 인정하도록 하지.”

“……?”

“한 방 제대로 먹었군. 겁먹고 우는 얼굴을 기대했는데. 아쉽게 됐어.”

“나에 대해서 다 파악한 것처럼 굴더니, 꼴좋네.”

“그래. 정말로…….”

말을 끝까지 잇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던 천사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대방에게 약점이 잡혔다고 해서 무조건 숙이기만 하는 건 초보자들이나 하는 실수지.”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나는 눈썹을 까딱였다.

“의외로 사업에 재능이 있군.”

“쓸데없는 소리 계속할 건가?”

나는 어깨에 올라온 천사연의 손을 거칠게 치우며 물었다. 한이결이 무슨 실무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던 천사연이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스 몬스터는 저곳에 있어.”

“저긴…… 게이트 출구가 있다는 건물?”

흐릿한 모래바람 너머로 당초 목적지였던 건물이 보였다.

“나머지는 가면서 설명하지.”

***

릴리스. 보스 몬스터를 천사연은 그렇게 불렀다.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일수록 등급이 높지.”

건물이 가까워지는 만큼 모래바람이 강해졌다. 나는 값으로만 따지자면 몇억을 왔다 갔다 하는 붉은 재킷을 방패 삼아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왜 하필 릴리스야?”

“여성체라서.”

그게 그러니까 ‘릴리스’라는 이름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뚱하게 노려보자 천사연이 설명을 이어 갔다.

“인간을 노리는 여자 악마는 릴리스가 대표적이니까. 말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실제로 꽤 어울리기도 하고.”

악마?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만 갸웃거리는 사이, 멀게만 느껴졌던 건물에 도착했다.

모래바람 너머로 형체만 확인했을 때는 ‘건물’이라고 불렀지만, 막상 와 보니 건물보다는 성에 가까운 형태였다. 무너진 성벽 너머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고, 낡은 깃 창이 곳곳에 꽂혀 있었다.

“지하 말고는 길이 없는 건가?”

“그래.”

천사연이 검을 들고 망설임 없이 손을 베어 냈다. 치료를 받지 않아 너덜너덜한 손바닥에 새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투둑, 툭.

S급 검에 베인 손바닥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검에 피를 뿌린 천사연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뒤에서 따라와.”

빛 한 점 들지 않은 지하 계단은 검을 타고 피어오르는 불로 은은하게 밝혀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아래로 길게 이어졌다.

건조한 모래가 가득하던 지상과 다르게 지하는 축축하고 기분 나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어딘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발을 딛는 계단도 갈수록 질척이는 느낌이 강해졌다. 나와 천사연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계단만 내려갔다.

사방이 어두워서 얼마만큼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주변을 살피는 나와 다르게 천사연은 이 장소 자체가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역시 알고 있는 거지?”

나는 거친 벽을 짚으며 물었다.

“이 게이트 클리어 방법.”

지하로 들어온 지 몇 분째지. 아니, 몇 시간째인가……. 모르겠다. 나는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냈다.

“글쎄.”

“모르는 척하지 말고.”

붉은빛에 그림자가 일렁이는 천사연의 옆모습은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둠에 얼굴이 반절 가려진 천사연이 말했다.

“마찬가지 아닌가? 네가 어떻게 보스 몬스터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나도 아직 설명 못 들었는데.”

“왜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은 거야? 모래에 대해서…….”

눈앞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도 말을 쉬지 않았다.

“말했으면 더 빨리 대책을…….”

“과연 그럴까.”

천사연은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말하면 다들 혼란스러워했겠지. 겁먹을 거고. 그 이후에는 의견이 갈리고, 싸우고, 개별 행동을 했을 거다. 그러다 모래에 먹혔겠지.”

“그건, 당연히 등급 게이트인 줄 모르고 왔으니까…….”

“SS급 게이트라고 미리 밝히고 지원자를 모집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몬스터는 등장하는 곳에서 등장할 거고, 상황은 똑같이 흘러가. 쓸데없는 소란만 가중될 뿐.”

어디선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밖에 없었다. 누구 숨소리지? 나는 자꾸만 꺾이는 다리에 힘을 줬다.

“허억, 헉, 어떻게… 그렇게 확신…….”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가 계단을 잘못 밟고 크게 휘청였다. 버티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몸에 나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 확신하는지 알려 줄까, 한이결.”

계단을 구르는 고통 대신 찾아온 것은 이전에도 맡아 본 서늘한 향이었다. 축 늘어진 내 몸을 천사연이 어린애 대하듯 안아 들었다.

“이미 해 봤으니까. 아주 많이. 그러다 보면 말해 봤자 의미 없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으, 무슨…….”

“예를 들면, 이 지하는 보스 몬스터의 영향권이라 A급은 버티기 힘들다든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나는 욕을 중얼거렸다. 뭐 이 새끼야?

“미리 말해 줘서 괜히 의식하게 되면 정신이 더 빨리 무너지고.”

“하아……. 그럼 나는 차라리…….”

“밖이 더 위험해. 지하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곳을 향해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으니까. 보스를 지키기 위해서.”

그럼 뭐 어쩌겠다는 거야. 나는 겨우겨우 눈을 떠서 천사연을 노려봤다.

“두고 갈 수 없으니 데려가긴 해야 하는데. 어떡할까.”

“시발……. 닥치고 빨리…….”

방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빙글거리는 꼴이 아주 짜증 난다. 난 힘들어 죽겠는데 이 자식이…….

“그래, 그래.”

천사연이 땀으로 젖은 내 왼손을 깍지를 껴서 단단하게 마주 잡았다.

“고통스러워도 참아. 나도 처음 해 보는 거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뭐? 잠…….”

찌릿, 마주 잡은 손바닥으로 따끔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가 서서히 기어 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둡고, 짙고, 차가운 기운에 나는 본능적으로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었다.

“흐, 아……!”

손바닥에서부터 심장까지, 천사연의 기운이 불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며 몸이 제어하지 못할 만큼 덜덜 떨려 왔다.

“시, 싫… 그만!”

“참아.”

“으, 읏! 흐윽……!”

나는 천사연 품에 파고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워. 그만. 이상해. 깊은 곳을 헤집는 기이한 감각에 나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처음 해 본다는 말이 사실인지, 천사연도 미간을 찌푸리며 기운을 밀어 넣는 것에 집중했다. 손바닥으로 기운이 한 차례 더 왈칵 쏟아졌다. 허리가 다시 한번 비틀렸다.

심장에 모여서 천사연의 기운을 경계하던 내 기운이 서서히 기세에 밀려났다. 질척하고 강한 천사연의 기운이 마치 방어막처럼 내 기운과 심장을 크게 감쌌다.

“SS급은 기운을 나눠 주는 게 가능하다더니……. 진짜 되는군.”

“하아, 흐, 으윽…….”

뾰족하던 기운이 잠잠해지자 고통이 수그러들었다.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천사연의 품에서 벗어났다.

“시발……. 다시는 하지 마.”

술 취한 것처럼 흐느적대던 몸이 멀쩡해지고 머릿속이 개운해졌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내가 이를 드러내며 경계하자 천사연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나쁘기만 한 건 아닐 텐데?”

그러고 보니…… 나는 심장을 매만졌다. 확실히 기운의 양도 힘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이 정도면 임시 S급 정도는 되나? 나는 잠시 갈등했지만,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두 번은 없어.”

내 대답에 천사연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왜 아쉬워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흘러내린 재킷을 다시 걸치며 말했다.

“뭐 해. 앞장서.”

천사연이 놀리는 어투로 대답했다.

“분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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