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무사히 몬스터를 막아 냈다는 기쁨에 모두가 신이 났다. 힐러에게 간단한 치료를 받으며 기운을 회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휴,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힐러팀과 함께 길드원들의 상태를 보고 온 민아린이 안도의 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런 어마어마한 숫자라니……. 정말 무서웠어요.”
“게이트 내부 등급은 나왔나요?”
“아직 잘 모르지만… 이 정도면 아마 S급 확정일 거예요.”
S급이라. 멀리서 박건호와 대화를 나누는 천사연이 보였다.
어느덧 게이트를 들어온 지 엿새가 흘렀다. 출구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 목적지도 꽤 가까워진 상태다.
‘슬슬 보스가 등장할 시기인데.’
SS급 아이템을 뱉어 내는 보스이니 당연히 등급은 SS급이겠지.
옹기종기 모여서 모닥불을 피우는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다들 SS급 보스가 등장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을 알았다면 한가하게 모닥불이나 피우지는 않겠지.
천사연, 이 새끼……. 끝까지 보스에 대해 말 안 해 주려나 본데.
‘대체 천사연은 어떻게 이 게이트가 SS급이라는 걸 알아낸 거지?’
소설에 서술된 바로는 천사연이 하태헌에게서 게이트를 뺏어 왔고, SS급 아이템을 얻어 냈다는 게 다였다.
정말 도움 안 된다. 최소한 보스가 어떤 몬스터인지만 알아도 좋았을 텐데.
오늘은 운 좋게 버텼다지만 SS급 보스를 상대할 때는 운을 기대할 수 없다. 천사연이야 같은 등급이니 무사하겠지만, 그 외에 사람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게 뻔하다.
‘결국 천사연이 직접 처리하는 방법 말고는 없는 건가.’
천사연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긴 한데. 중간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던 천사연의 움직임이 떠올랐다.
“…….”
순간 스치는 생각에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박건호와 서 있던 천사연은 그새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찾아다니기 귀찮았지만 넘어가기엔 꽤 중요한 내용이었다. 천사연을 찾으러 움직이려던 내 손목을 민아린이 덥석 잡아 왔다.
“같이 가요, 이결 씨!”
“네?”
“다들 이결 씨랑 인사하고 싶대요. 어서요!”
“엇, 어…….”
예상 못 한 전개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민아린에게 끌려온 내게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어! 마스터한테 안겨 있던 분!”
“와, 그러네! 안녕하세요~ 근접팀 김지훈이라고 합니다.”
나는 불쑥 다가온 손을 어색하게 웃으며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더라?”
“이결 씨래, 한이결 씨!”
“한이결 씨, 이거 받아요. 따듯한 죽이에요.”
“가, 감사…….”
순식간에 손에 따듯한 죽그릇이 얹어졌다. 민아린이 빈자리에 날 앉히고는 내 주변을 얼쩡거리던 김우진도 납치해 왔다. 거절할 틈 없이 끌려온 김우진은 죽그릇을 받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배고파 죽을 뻔했는데. 이제 좀 살겠다.”
“몬스터한테 목 날아갈 뻔했는데 배고픈 게 대수야?”
“야, 지금 몬스터 얘기를 왜 해? 밥맛 떨어지게!”
“인정~ 진짜 징그럽게 생겼더라. 북쪽이었나? 마지막에 등장한 몬스터. 나 보고 토할 뻔.”
“그만하라고!”
한 명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소리치자 다들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김우진이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왜 안 먹냐?”
“어? 아.”
그제야 나는 시선을 내려 그릇에 담긴 죽을 바라봤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채죽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고소한 냄새에 식욕이 돌았다. 조심스럽게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흠흠. 한이결 씨?”
“네?”
“정말 무소속이에요? 팀장님이 그러던데.”
“맞아! 우리 길드 분인 줄 알았는데 무소속이라는 말 듣고 엄청나게 놀랐어요.”
“실력도 좋으신데 왜 무소속이지? A급 맞죠?”
“능력이 바람이라고 하셨었나?”
“맞아. 팀장님이랑 마스터 공중에 막 띄우고 그랬잖아.”
“신기하다. 그거 기운 많이 들죠?”
“그럼 하늘을 나는데 쉽겠냐?”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질문이 날아왔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난감해서 식은땀이 다 흘렀다. 아니, 그보다 무소속이라는 정보가 이렇게 퍼져도 괜찮은 건가.
나는 잠시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무소속 맞…….”
“크악, 진짜로 무소속?”
“아까워! 우리 길드로 와요!”
“잠깐, 그럼 어느 부서로 가셔야 하지? 보조 계열?”
“그래도 A급 원소 능력자인데 보조 쪽으로 가면 아깝지.”
“그럼 아예 팀장님네 가도 괜찮지 않을까? 아까 슬쩍 찔러보니까 한이결 씨 탐내는 것 같던데.”
……뭐? 누가 뭘 해?
“박 팀장님, 원래도 마음에 드는 능력자 발견하면 눈 돌아가잖아. 그러실 만해.”
“가뜩이나 팀에 사람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던데. 저러다 게이트 나가면 한이결 씨 뒤만 따라다니는 거 아냐?”
“음. 확실히… 가능성 크지.”
끔찍한 대화에 나는 억지로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팀장님이 그런 성격으로는 안 보이던데…….”
“그거 보기에만 그래요.”
“얼굴이야 멀쩡하게 생겼지. 속 알맹이는 완전 또라이잖아.”
“박 팀장님 유명하죠. 한이결 씨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만약 박 팀장님이 자기네 팀 오라고 해도 웬만하면 거절해요. 거기는 진짜 지옥이에요.”
“그 팀만 그러겠어요? 특수작전부 자체가 미친놈들 소굴인데!”
“그래도 박 팀장님네가 제일 심하잖아. 저번에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다들 피 칠갑하고 신나게 웃더라니까. 진짜 소름 끼쳐서…… 어후!”
“세상에. 듣자 하니 중동 쪽 게이트도 간다던데, 그거 진짜예요?”
“저번 달에 갔대. 나흘 밤낮 새워서 클리어했다더라.”
“으아, 중동은 진짜 시설도 안 좋고 게이트 내부도 불안정하잖아요. 미쳤다. 나 같으면 절대 못 들어가.”
나는 허허 웃으며 오가는 대화를 머릿속에 깊게 박아 뒀다. 만약 박건호가 저들 말대로 내게 스카우트 제안을 해 온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리라. 그 상사에 그 부하라고, 천사연만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박건호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밤이 늦도록 다 같이 먹고 마시며 떠들었다. 주변을 잔뜩 경계하던 김우진도 어느새 긴장이 풀렸는지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었고, 민아린은 힐러팀과 무어라 말을 나누더니 환하게 웃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사막 한가운데, 따듯한 모닥불이 비추는 사람들의 표정은 여행이라도 온 듯 편안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살짝 웃었다.
‘하루쯤은 괜찮겠지.’
상황 봐서 천사연과 게이트에 관해서 얘기도 좀 나누고, 사람들한테 등급 정보도 좀 흘리려고 했는데. 그런 주제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긴, 이 정도 휴식은 있어야 버틸 수 있는 거겠지. 나도 오랜만에 느긋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다.
***
몽롱한 의식 사이로 나무 탄내가 맡아졌다. 흐릿한 시야로 불이 꺼져 연기만 피어오르는 모닥불이 보인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근육이 땅기며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쌓아 둔 짐에 대충 등을 대고 앉아서 잤더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찌뿌둥한 몸을 쭉쭉 뻗어 스트레칭하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결 씨.”
담요를 두르고 서 있던 민아린이 날 바라봤다. 짙은 푸른빛이 가라앉은 이른 아침 공기는 왠지 모르게 서늘함이 감돌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어딘가를 가리키며 수군거리는 길드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물음에 민아린이 복잡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줄여 대답했다.
“그게… 아무래도 몬스터 시체가 사라진 모양이에요.”
“몬스터 시체요?”
“네. 어제 죽인 시체들이요. 숫자도 많고 크기도 커서 제대로 정리 못 하고 내버려 뒀었는데…… 싹 사라졌어요.”
나는 어제, 몬스터 시체가 널려 있던 위치로 시선을 돌렸다. 민아린의 말처럼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시체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체가 사라진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느낌이 안 좋아. 한둘도 아니고 그 많은 시체가 한 번에 사라진 거잖아.”
“새벽에 깨어 있던 사람?”
“저요. 근데 진짜 별일 없었어요. 엄청 조용했고……. 저도 사라진 거 지금 알았어요.”
“아오 씨, 무서워 죽겠네.”
소란이 커지자 김우진도 깼는지 비척비척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잔뜩 힘이 들어간 미간과 살짝 충혈된 눈이 꽤 피로해 보였다.
“우선 팀장님께 설명해 드리는 게 좋겠군요.”
“그래야겠어요.”
내 말에 남자 한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자신을 김지훈이라고 소개한 근거리팀 소속 길드원이었다.
“박 팀장님 어디 계시지?”
“저기 앞쪽에 마스터랑 계셨…… 아?”
김지훈에게 설명하던 여자가 갑자기 모든 행동을 멈추고 우뚝 섰다. 놀란 얼굴이 점차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뭐야. 왜 그래?”
“아, 아니, 나…… 몸이…….”
사라라락.
고운 모래가 흐르는 소리. 가만히 서 있는 여자의 발이 점점 모래 속으로 파묻히기 시작했다. 김지훈도 나와 같은 것을 봤는지, 다급하게 여자의 팔을 움켜잡았다.
“뭐, 뭐야!”
“이거 왜 모래가……!”
“빨리 거기서 나와!”
김지훈이 힘줘서 당겼지만,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간 여자가 창백한 얼굴로 울먹이며 말했다.
“모, 모르겠어. 몸이… 몸이 안 움직여!”
“젠장! 무슨 이딴!”
“몬스터라도 있는 거 아냐? 당장 알아봐!”
여자의 몸이 끊임없이 모래에 먹혀들어 갔다. 나는 급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모래를 다 치워 버리려고 손을 휘둘렀다.
“왜…….”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아니, 능력이 모래에 통하지 않았다.
“능력이 이상해!”
“저, 저도요!”
“시발, 뭐야! 왜 능력이……!”
여자를 들어 올리려고 다시 한번 능력을 사용했지만, 모래와 마찬가지로 통하지 않았다. 나처럼 능력을 써서 여자를 구해 내려고 시도했던 길드원들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흐윽, 으……. 무, 무섭…….”
모래에 목이 잠긴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덜덜 떨었다. 꺼내려는 주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모래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독하게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라진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어제 내게 웃으며 죽이 담긴 그릇을 건네주던 사람이었다.
“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으, 으아악!”
귀를 찌르는 비명에 뒤를 돌아보니 여자와 마찬가지로 모래에 종아리까지 파묻힌 다른 길드원이 보였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 안 돼!”
“시발, 몸이 안 움직여!”
“시, 싫어……! 싫어!”
사방이 비명으로 가득 찼다. 무릎을 꿇은 채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지훈의 몸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옆에 서 있는 김우진과 민아린의 팔을 붙잡았다. 손이 제어가 안 될 만큼 떨렸다.
“……괜찮아요. 제가 공중으로 올려 줄 테니까…….”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김우진과 민아린에게 말했다. 곧바로 능력을 사용하려는데,
“……이결, 이결 씨.”
잔뜩 흔들리는 민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아린을 바라봤다.
민아린의 몸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
들어 올린 손이 볼품없이 흔들렸지만 애써 무시하며 능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바람은 내 손에서만 머물 뿐, 민아린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 내 행동을 멍하니 지켜보던 민아린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볼을 타고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