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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1)화 (21/394)
  • 21화

    6. 들켰다

    기절한 것처럼 축 늘어진 나를 품에 안고도 천사연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몬스터 사이를 누볐다. 나는 천사연의 몸을 감싼 바람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끊어 냈다. 빠져나가는 기운이 줄어들자 두통이 조금이나마 약해졌다.

    어둠 너머로 몬스터의 비명과 불이 번지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천천히 심호흡하자 서늘하고 씁쓸한 향이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향수라도 뿌렸나.

    “한이결.”

    나는 눈꺼풀을 움찔거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내가 기대고 있는 천사연의 가슴 언저리가 보였다.

    “……끝났습니까?”

    귀를 어지럽히던 몬스터 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능력 꺼.”

    그 말에 곧바로 바람을 없앴다. 그것만으로도 호흡이 훨씬 편해졌다. 머리를 두드리는 통증은 여전했지만.

    “아주 제대로 부려 먹으시네요.”

    나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웬일로 친절하게 행동하나 했더니, 그럼 그렇지. 남의 능력을 이 정도로 뽑아내니까 속이 시원하냐.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몬스터들을 처리했지.”

    “이 고생을 했는데 그건 당연하죠. 마음 같아서는 중간에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매정하긴.”

    내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친 천사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뭘 그렇게 봅니까?”

    “아주 좋은 경험을 했어.”

    그 눈빛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깊고 어두운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식으로 활용할 생각은 지금껏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좋군. 잠깐이지만 탐이 날 정도로.”

    “…….”

    어, 음. 진심인가 본데.

    천사연에게 인정받았다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이딴 취급을 하느냐고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칭찬 고맙지만 저는 별로 안 끌리네요. 그쪽은 제가 감당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안타깝군. 확실히 기운이 너무 적어. 더 오래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A급에 이 정도면 평균인데요.”

    SS급은 가진 기운의 크기도 차원이 다른가 보다. 온종일 몬스터를 상대하고도 멀쩡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얄미웠다.

    “그보다 이제 내려 주시죠. 불편합니다.”

    “민아린에게 데려다주도록 하지.”

    “제 발로 갈게요.”

    내려 달라는 내 말을 천사연은 들은 척도 안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냐. 나는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질문을 했다.

    “다들 괜찮은 겁니까? 민아린 씨와 김우진이요.”

    “물론.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을 챙기는 것을 추천하지. 제일 위험했던 건 너니까.”

    “네? 그럴 리가요. 저 다친 곳도 없는데.”

    “능력자는 기운이 흐트러졌을 때가 제일 위험해.”

    그런가? 두통이 심한 건 견디기 좀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다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나.

    “그 둘과 꽤 친해졌나 보군.”

    나는 앞을 보고 있는 천사연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했다.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게이트에 들어와서 함께 고생하는 처지다 보니 이전보다야 가까워지긴 했지만, 당당하게 친하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했다. 무엇보다 민아린이나 김우진은 나랑 친하다고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글쎄요.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친하지 않은 것치고는 계속 붙어 다니던데. 신경 쓰고 있지 않나?”

    신경 쓰는 건 맞으니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신경이야 당연히 쓰죠. 얼굴도 아는 사이인데 어떻게 나 몰라라 합니까? 이왕이면 별문제 없이 게이트 클리어하는 게 좋잖아요.”

    “그래.”

    천사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럴 거라 예상했지.”

    “무슨…….”

    “이결 씨!”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던 나는 민아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잔뜩 널린 몬스터 시체를 정리하는 길드원들 사이로 민아린과 김우진이 뛰어왔다.

    “괜찮아요? 다친 거예요?”

    걱정하는 민아린 옆에서 김우진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미친, 얼굴 하얀 것 봐! 시체인 줄 알았네.”

    이 자식이.

    “난 괜찮…….”

    “능력을 많이 썼으니 기운을 회복하는 게 좋겠어.”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천사연이 끼어들었다. 바위에 날 앉힌 천사연이 검을 집어넣고 재킷을 입으며 말했다.

    “민아린 힐러는 한이결을 최우선으로 회복시켜 놓도록. 나는 상황을 정리하러 가 보지.”

    “알겠습니다.”

    민아린의 대답을 들은 천사연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민아린이 날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많이 아프죠? 기운을 회복하면 좀 나아질 거예요.”

    “버틸 만해요.”

    “숨길 것 없어요. 저도 겪어 봐서 다 아니까. 손 좀 주시겠어요?”

    손을 내밀자 민아린이 거리낌 없이 내 손을 잡았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팔을 타고 들어온 민아린의 기운이 험하게 날뛰는 내 능력을 진정시켰다.

    “굉장하네요.”

    얌전해진 기운이 이제는 점차 크기를 키워 갔다. 주먹만 한 정도로 작아졌던 기운이 슬슬 몸집을 불려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두통이 사라지고 축 늘어지던 몸에 힘이 돌았다.

    “기운이 불안정하고 작아지는 만큼 몸 상태도 나빠져요. 자연 회복은 오래 걸리니까 대부분 힐러를 찾아오죠.”

    “고생하시네요.”

    “고생은요. 이결 씨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아까보다 훨씬 좋아진 내 모습을 확인한 민아린이 손을 놓으며 웃었다. 내게 기운을 불어넣어 준 탓에 살짝 지쳐 보였다.

    “그러니까 혹시 다치거나 기운이 없을 때는 고민하지 말고 꼭 찾아와 줘요.”

    “노력할게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은근히 선을 긋는 대답이라 눈치가 보였지만 다행히 민아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줬다.

    “야, 한이결.”

    민아린 뒤에 서 있던 김우진이 살짝 작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왜?”

    “……너.”

    자기가 먼저 말 걸어 놓고 김우진은 우물쭈물하며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뭐길래 저러지.

    “뭔데. 말을 해.”

    답답해서 재촉하자 김우진이 굉장히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스터랑 무슨 사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밀려오는 피곤함에 목덜미를 쓸며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너 마스터랑 사이 안 좋았잖아.”

    그건 지금도 그런데.

    “잘 아네.”

    “마스터만 봤다 하면 숨넘어가게 울고, 능력 제어 못 해서 주변 다 부수고, 덜덜 떨다가 사고 쳐서 그거 수습하게 만들고…….”

    “…….”

    그랬냐? 나는 본래 몸 주인을 떠올렸다. 한이결이 굉장히 심약한 인물이기는 했지.

    소설에서는 대부분 천사연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모습만 나와서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한이결의 몸이 된 이후, 처음 꾼 꿈에서 천사연을 붙잡을 때도 엄청나게 울었었지.

    ‘좀 이상한데.’

    천사연은 왜 그렇게 가차 없이 한이결을 버린 걸까. 애초에 한이결의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서 데리고 있던 거라면, 버리기보다는 계속 곁에 두는 게 훨씬 이득일 텐데.

    소설을 읽을 때는 하태헌에게 집중하느라 이상한 줄도 모르고 그냥 넘겼는데, 지금 와서 차분히 생각해 보니 찝찝한 게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들여서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대충 넘기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요? 이결 씨가? 상상이 잘 안 가네요.”

    김우진의 말에 민아린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때는 진짜 짜증 났는데……. 그 능력을 갖추고도 하는 일이라고는 질질 짜는 거 말고는 없었으니까.”

    “어머.”

    민아린이 무언가를 상상하듯 눈을 굴리더니 이내 볼을 붉히며 화사하게 웃었다. 내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

    “……원래 사람은 성장하는 거야.”

    “흥, 성장은 무슨. 그거 다 쇼였지? 차라리 배우를 하지 그래? 여기서 구르지 말고.”

    “그러게요. 우는 연기가 가능할 정도면 대단한 실력인데. 배우도 잘 어울려요! 제가 팬 1호 할게요.”

    “그럼 난 매니저 할래.”

    “안 해요, 안 해!”

    배우 같은 소리 하네. 하여간 이 둘도 정상은 아니라니까.

    “아무튼 너, 그때까지만 해도 마스터 무서워했잖아. 게다가 여동… 흠.”

    김우진이 말하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며 민아린을 곁눈질했다. 딱히 민아린에게 여동생 얘기를 숨기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떠들 만한 부분도 아니기에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지금도 똑같아. 별로 안 좋아해.”

    “하지만 아까…….”

    “그거야 급한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던 거지. 몬스터가 몰려오는데 일일이 따질 정신이 어디 있냐? 빨리 쓸어 버려야지.”

    사실대로 말했음에도 김우진과 민아린의 표정은 묘했다.

    “진짜라니까. 이렇게 기운 탈탈 털려 온 거 보면 모르겠어? 저 사람한테 나는 그저 쓸 만한 아이템 정도야.”

    그제야 김우진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자기 상사가 나랑 친한 것 같으니까 시샘이라도 하는 건가? 하여간 속 좁은 녀석.

    “이결 씨는 마스터가 불편한가 봐요. 제가 보기에 마스터는 이결 씨를 꽤 신경 쓰는 것 같던데.”

    “설마요. 그런 무서운 소리 마세요.”

    내가 정색하고 고개를 젓자 민아린도 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의문스러워하는 표정은 여전했다.

    박건호부터 시작해서 김우진, 민아린까지. 벌써 세 번이나 비슷한 질문을 들은 나는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느낌이 안 좋아…….’

    아무래도 천사연에게서 벗어나는 계획을 빨리 세워야겠다.

    가뜩이나 알아봐야 할 게 한둘이 아닌데. 막막한 앞날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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