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9)화 (19/394)

19화

  

나는 천사연과 박건호, 길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른 건 그대로 가고, 두 명만 저와 함께 움직이면 됩니다.”

“두 명이라면?”

“마스터와 박건호 팀장님.”

나는 박건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팀장님, 쇠구슬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400개 정도.”

그럼 계획대로 진행하기에 문제없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바람을 다룹니다. 하늘을 날거나, 물체를 옮길 수 있죠.”

눈이 마주친 천사연은 시종일관 웃고 있었지만, 검은 눈동자는 침잠하기만 했다. 그는 무언가를 숨긴 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제가 팀장님과 함께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로 날아가 쇠구슬을 심어 두겠습니다. 팀을 둘러싼 형태로요. 현재 몬스터는 서쪽을 시작해서 차례로 가까워지고 있으니, 그쪽부터 타이밍 맞춰서 터뜨리면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내 설명을 들은 길드원 몇몇이 나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지었다.

“그 이후는 팀장님과 계속해서 반시계방향으로 하늘을 날며 몬스터 무리의 중간 부근을 폭탄으로 터뜨려서 흐름을 끊겠습니다. 아마 모든 몬스터를 막아 내지는 못하겠지만 숨 돌릴 틈은 생길 겁니다. 몬스터 수를 보면 세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동의하냐는 의미를 담아 박건호를 바라봤다. 박건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듣던 천사연이 말했다.

“아주 재밌겠어. 박건호 팀장이 부러워지는군. 그 이후에는?”

“그 이후에는…….”

나는 멈칫했다. 이 방법만큼은 나도 하기 싫었는데. 한숨을 삼켜 냈다.

“가까이 몰려온 몬스터는 마스터가 나서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움직인다면 굳이 발로 뛰어다닐 필요 없을 테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주 좋군.”

천사연이 길드원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시간이 없으니 대열을 갖추고 전투 준비를 하도록. 박건호 팀장은 한이결과 바로 출발해.”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다들 세세한 지시가 없어도 능숙하게 무기를 챙겨 지정된 위치에 섰다. 준비를 마친 길드원을 둘러보는 박건호에게 다가가 말했다.

“시작하죠.”

나는 박건호의 어깨와 목에 팔을 두르며 바싹 붙어 섰다. 박건호가 날 향해 짙게 웃으며 내 허리를 반쯤 끌어안았다.

휘청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 몸과 박건호를 공중으로 띄웠다. 고도를 좀 더 높이자 대열을 갖춘 길드원들이 발아래로 보였다. 중앙에 있는 힐러팀과 비공격 능력자들을 원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고생이 많군.”

땅과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자 바람이 강해졌다.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사이로 박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고생이요?”

“마스터가 그쪽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나는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박건호를 노려봤다.

“착각이시겠죠.”

착각이어야만 한다. 그런 끔찍한 소리는 꿈에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박건호는 내 대답을 들은 척도 안 하며 자기 할 말만 했다.

“마스터가 불렀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군.”

“…….”

“확실히 이 정도면 부를 만해.”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면서도 박건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한가하게 수다 떨 상황이 아니니까 좀 닥쳐 주면 좋겠는데.

“전 그냥 평범한 A급 능력자인데요.”

김우진이 들었으면 A급이 어디가 평범하냐며 분개했을 테지만, 상대는 S급 능력자다.

박건호에 비하면 나 정도는 평범한 축에 속하지.

“재밌는 농담도 할 줄 아는군.”

“그쪽도 마찬가지.”

어차피 내가 외부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 예의는 때려치우고 성격대로 해야겠다. 내 싸가지 없는 대꾸에 박건호의 눈이 빛났다.

“한 성깔 하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나는 이동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몬스터 무리가 보였다.

“여기가 좋겠어요.”

“적당하군.”

박건호가 주머니에서 쇠구슬을 꺼내 들었다. 나는 쇠구슬을 떨어뜨렸을 때, 모래에 너무 파묻히지 않도록 땅과의 높이를 낮춰 주었다.

박건호는 모래 위에 마치 씨앗을 뿌리듯 쇠구슬을 던졌다. 모래에 조금 가려져도 상관없었다. 박건호의 눈에 쇠구슬 일부분이라도 보인다면, 그건 언제든 터뜨릴 수 있는 폭탄이었다.

나와 박건호는 계속 이동하면서 쇠구슬을 뿌렸다. 그가 쇠구슬을 넉넉하게 챙겨 와서 다행이었다. 지금 뿌려 둔 쇠구슬이 우리에겐 아주 유용한 1차 방어선이 될 것이다.

서쪽에서 시작해서 남쪽을 지나 동쪽, 북쪽을 통해 다시 서쪽으로 돌아오며 쇠구슬을 빈틈없이 땅에 심었다.

“준비됐습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몬스터가 보였다. 몬스터들은 하늘에 떠 있는 나와 박건호를 알아채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크아아악! 크아아!

게걸스러운 울음과 함께 몬스터가 쇠구슬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속으로 타이밍을 쟀다.

3, 2, 1.

쿠우웅!

쇠구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쇠구슬을 밟았던 몬스터는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산산조각이 났고, 그 옆과 뒤에 있는 몬스터들은 하반신이 날아가거나 폭발에 휩싸여 불에 타올랐다. 주변이 몬스터의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가득 찼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나는 곧바로 남쪽을 향해 허공을 가로질렀다. 나와 박건호가 지나가는 땅마다 굉음과 함께 폭탄이 도미노처럼 펑펑 터졌다. 그때마다 몬스터들의 살점이 이리저리 튀었다.

키에에엑! 키에엑!

쓰러진 몬스터의 시체를 밟고 몬스터가 꾸역꾸역 몰려왔다. 남쪽과 동쪽, 북쪽까지 차례대로 미리 심어 둔 쇠구슬을 터뜨린 우리는 다시 서쪽으로 돌아왔다.

“이왕이면 두 명이 하는 게 낫겠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붙잡느라 양손을 쓰지 못하는 박건호가 쇠구슬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날고 있을 때는 쇠구슬 위치 변동이 불가능합니다.”

“상관없어. 그냥 뿌리기만 해.”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방향마다 몬스터의 생김새가 달랐다. 서쪽은 검은 등껍질에 얇은 날개를 단 바퀴벌레 같은 몬스터, 남쪽은 울퉁불퉁하고 둥근 형태의 애벌레 같은 몬스터, 동쪽은 박쥐 날개를 단 잠자리 몬스터였다.

마지막으로 북쪽은 가장 몸집이 크고 다리와 털이 무수하게 많이 돋아난 몬스터가 기어 오고 있었다. 벌레 특집이냐고. 생김새를 떠올리다 보니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던져.”

박건호의 말에 손에 들고 있던 쇠구슬을 하나둘 천천히 떨어트렸다.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가던 몬스터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탄에 등껍질이 깨지고 불에 활활 타올랐다. 초록색 끈적한 피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크에에엑! 크아아!

불에 탄 몬스터 몇이 우왕좌왕하며 대열을 흩트렸다. 막힘없이 앞으로만 향하던 몬스터 무리가 혼란에 빠졌다. 몇 개의 쇠구슬을 더 던진 우리는 곧바로 남쪽으로 이동했다.

“으…….”

모래 사이를 꿀렁이며 기어가는 애벌레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기분이 아주 끔찍했다. 서쪽에서처럼 쇠구슬을 떨어트려 폭탄을 터뜨리는데, 서쪽과 달리 곧바로 우리를 알아챈 몬스터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밋밋한 몸에 새까만 구멍이 뚫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이빨이 드러났다.

“피해!”

생각보다 쉽게 발각되어 당황하는 사이, 박건호의 외침이 들려왔다. 급하게 오른쪽으로 몸을 틀자 새까만 액체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읏!”

“피하는 것만 집중해.”

그걸 시작으로 검은 액체가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갖고 있던 쇠구슬을 박건호에게 다시 돌려준 나는 오로지 공격을 피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았다.

“으윽…….”

빠른 속도로 액체를 피해 하늘을 날았다. 간혹 알아차리지 못한 공격은 박건호가 몸을 당겨 줘서 겨우 피했다.

콰아앙! 쿠구궁!

끼이이이이! 끼이익!

피하는 와중에 떨어트린 쇠구슬이 몬스터의 통통한 몸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만큼 분노한 몬스터가 더욱 액체를 쏟아 내는 바람에 버티기가 힘들었다. 결국 우리는 서쪽보다 일찍 공격을 접고 동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허억, 헉.”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입 안을 강하게 깨물었다. 동쪽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몬스터다. 쉽지 않을 것이다.

“헉, 더 높이 올라갈게요.”

가쁜 숨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남의 품에 안겨서 헉헉대는 꼴이 좀 수치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푸드득, 푸득.

박쥐 날개를 단 몬스터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박건호가 쇠구슬을 떨어트렸다. 쿠우웅, 발아래에서 터지는 폭탄을 바라보며 박건호가 내게 말했다.

“여기는 빨리 지나가는 게 낫겠군.”

“하지만…….”

“앞으로 두 바퀴는 더 돌아야 하지 않나? 이대로라면 위험해.”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나와 박건호가 처리하지 못한 만큼 중앙에 모여 있는 팀원들에게 부담이 간다. 나는 달려드는 몬스터를 피해 이동속도를 높였다.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수록 욕심부리지 말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편이 훨씬 나아. 여기서 네가 능력 고갈로 쓰러지는 게 더 큰 손해다.”

박건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수긍하며 동쪽에서 벗어났다. 따라붙어 오는 몬스터는 박건호가 정확히 날린 쇠구슬을 맞고 허공에서 터졌다.

다행히 북쪽도 서쪽처럼 공중에 있는 우리를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생긴 거야 가장 징그럽고 몸집도 컸지만, 허공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쇠구슬에는 무력했다. 이리저리 터져 나가는 몬스터를 내려다보며 나와 박건호는 같은 생각을 했다.

“서쪽과 북쪽만이라도 집중해야겠어요.”

“남쪽과 동쪽은 팀원들을 믿고 맡기는 게 낫겠군.”

박건호가 내게 남은 쇠구슬의 절반을 넘겼다. 대략 100개 정도. 박건호 것까지 합치면 쇠구슬 200개. 나는 손안에 들어온 쇠구슬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