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부상을 치료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 날, 팀은 지체하지 않고 이동을 시작했다. 힘든 전투를 치른 직후기 때문에 모두가 힘들어 보였지만, 그중 유독 피로해 보이는 사람들은 단연 힐러팀이었다. 민아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휘청휘청 걸었다.
“괜찮아요? 업어 드릴까요?”
걱정스러운 내 질문에 민아린이 지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래도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민아린이 두 눈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야근한 다음 날 출근하는 거? 에너지 드링크 빨고 3일 밤새워서 보고서 작성하는 거?”
“……예?”
“그런 거 비슷해요. 기력은 달리는데, 딱히 아픈 곳은 없고…….”
“알 것 같기도 하네요.”
대충 이해되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린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거예요. 여기서 능력을 더 쓰면 두통도 오고 정말 걷기 어려울 만큼 지치거든요.”
“그러고 보니 저도 아까 능력을 많이 쓰니 두통이 오던데요.”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예요. 거기서 더 심해지면 피를 토하거나 기절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웬만하면 힐러한테 기력을 보충하는 게 좋죠.”
“그렇군요.”
나는 속으로 당황했다. 그냥 머리 좀 아프고 숨쉬기 힘든 게 끝일 줄 알았는데, 피를 토하고 기절을 할 수도 있다고?
소설 내용을 찬찬히 떠올려 봤지만, 그 어디에도 하태헌이 능력을 많이 써서 피를 토하거나 기절하는 장면은 없었다. 그런 걸 보면 역시 주인공이다.
소설을 읽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주인공 하태헌을 중심으로 내용이 진행되기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지식은 내가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한이결의 몸으로는 주변에 물어볼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으니, 이런 뜻밖의 정보는 내게 무척이나 중요했다. 나는 민아린을 추켜세웠다.
“민아린 씨는 아는 게 많네요.”
활짝 웃으며 말하자 민아린이 쑥스러운지 귀를 붉게 물들이며 웃었다.
“뭐, 뭘요. 이 정도는…….”
“한이결.”
그때였다. 뒤에서 나와 민아린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김우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너 뭐?”
“나한테는 물어볼 거 없냐?”
녀석이 잔뜩 불만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입술 끝을 삐죽이는 꼴을 보아하니 또 뭔가 심기가 상했나 본데.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한들…….’
궁금한 게 없는데 뭘 물어보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게이트 와 보니까 어때?”
“……좆같아.”
“그치? 좆같지? 아, 내가 왜 저 새끼 말을 안 들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그치? 막 후회되지?”
“아니야!”
정곡을 찔렀는지 김우진이 소리를 벌컥 질렀다. 그 모습이 꼭 사람을 위협하는 새끼 고양이 같았다.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몬스터한테 도망 다니느라 고생 있는 대로 해서 얼굴이 말이 아닌데.”
“어, 얼굴? 나 얼굴 못생겨졌어?”
김우진이 놀라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질문 웃기네. 못생겨졌냐니. 원래는 안 못생겼다고 생각하나 보네.”
“어머, 귀여워라.”
내가 놀리고 민아린이 한마디 거들자 김우진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긴. 못생긴 얼굴은 아니지.”
“그럼요. 우진 씨 같은 타입, 어린 친구들한테 인기 많지 않아요? TV에 나오는 아이돌이 딱 저렇게 생겼던데.”
“확실히 스타일이 화려하긴 하네요. 머리도 빨갛고, 피어싱도 했고.”
“이 시발, 안 닥쳐?”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이고, 말하는 꼬라지 봐라. 저래서 여자는 사귀겠나.”
“뭐, 뭐?”
“아니에요, 이결 씨. 요즘은 좀 까칠해야 좋은 거라던데요?”
“그래요?”
왜 그런대. 이해할 수 없는 취향에 고개를 기울였다. 뭐든 다정한 게 최고 아닌가.
“네. 그런 거 있잖아요. 내 여자에게만 따듯하고 남에게는 까칠한 남자.”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런 사람은 사회생활을 어떻게 한대요?”
“글쎄요? 저도 드라마에서나 봤지, 현실에서는 못 봐서.”
“그만해!”
김우진이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봤다. 왜 나한테만……? 마치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것만 같은 한을 품은 눈빛에 나는 억울해졌다. 그야 좀 놀린 것도 있지만, 칭찬도 한 거 같은데 어째서.
고민하던 나는 머뭇머뭇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야, 김우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뭐야.”
김우진이 살짝 누그러진 말투로 대꾸했다.
“너 연애 안 해 봤냐?”
“뭐?”
“그러니까, 모태 솔……컥.”
김우진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흉흉한 눈으로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이 개새끼……. 진짜 죽고 싶어?”
“켁, 이건 놓고…….”
만만하게 봤는데 손힘이 장난 아니다. 옆에 있는 민아린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 봤지만 그녀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 날 구해 주지 않았다.
아, 이 배신감이란. 이래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쿠구궁!
“……!”
“몬스터 등장입니다!”
“등급 측정 준비!”
땅이 크게 흔들리며 선두에서 팀을 이끌던 박건호의 외침이 들려왔다. 방금까지 장난치며 웃고 있던 모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나는 급히 김우진에게서 벗어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서쪽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무리가 보였다.
“서쪽, 확인! S급입니다!”
서쪽만 오는 건가. 나는 바람에 마구잡이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야. 이건…….’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번 습격은.
“남쪽, 확인! S급입니다!”
“동쪽, 확인! S급입니다!”
“부, 북쪽, S급… 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반시계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모든 방향에 우리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몬스터가 수십 마리였다. 시간이 없었다. 저 속도라면 앞으로 5분 뒤에는 몬스터를 맞이해야 했다.
나는 천사연 근처로 내려와 그의 뒤에 섰다. 대열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천사연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든 길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힐러와 측정팀, 비공격 인원은 중앙에 모이고, 안쪽부터 순서대로 B급, A급, S급 순으로 자리를 잡아야겠군.”
“A급과 S급을 골고루 배치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겠습니다.”
천사연의 말을 박건호가 이어받았다.
“흐음.”
천사연이 무언가 고민하듯 입가를 매만지며 나를 돌아봤다. 그는 S+급 몬스터를 발견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한이결, 너는?”
“예?”
“의견 있나?”
천사연이 내게 질문하자 순식간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저 사람은 누군데 마스터가 의견을 묻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길드원들을 마주 보고 있자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천사연, 이 미친 새끼야.
“…….”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물론…… 생각해 둔 게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 입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길드원들도 생판 처음 보는 내 제안을 불편함 없이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없습니다.”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져 본 나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제발, 이쯤에서 넘어가자.
“거짓말하지 말고.”
희망이 무참히 깨지고 있는 힘껏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 왔다. 그만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지금.
“진짜로 없습니다.”
“그래? 아쉽군.”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대답하자 천사연이 의외로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럼 그냥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내가 보기엔 아마 절반은 크게 다치거나 죽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안타깝군. 한이결이 좋은 수를 제안했다면 아무도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이…….”
미친 새끼야.
나는 분노로 끓어오르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입술을 짓씹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길드원 사이로 떨떠름한 얼굴의 박건호와 김우진, 민아린이 보였다.
그들을 등지고 선 천사연이 날 보며 미소 지었다. 바라보는 눈빛은 ‘이제 어쩔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진짜 환장하겠다.
“……의견, 있습니다.”
나는 천사연을 향해 사납게 웃어 주었다.
이렇게 된 거, 나도 그냥 막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