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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7)화 (17/394)

17화

5. 난장판

길드원에게 붙어 있던 몬스터를 공격했을 때보다 폭발 위력이 더 강했다. 폭발로 죽어 버린 몬스터의 시체는 뒤에 몰려오는 몬스터 떼에 마구잡이로 짓밟혔다.

“공격!”

원거리팀이 달려오는 몬스터에게 능력을 퍼부었다. 얼음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쏘아지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각기 다양한 능력들이 몬스터를 찢고 터뜨렸다.

키아악! 키엑!

시체가 점점 쌓였지만, 그 시체를 뛰어넘고 달려오는 몬스터의 숫자는 여전히 가득했다. 원거리팀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너무 많아!”

“지긋지긋하네.”

“제 공격으로는 가죽을 뚫을 수가 없어요.”

“머리를 노려! 거기가 약점이야.”

상대는 S급 몬스터. B급 능력자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 탓에 전투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원거리팀의 공격이 끝나자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2차 준비.”

끄응, 신음을 흘리며 쇠구슬 세 개를 힘을 실어 날렸다. 뒤에서 목을 울려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 아주 유용한 따까리를 얻어서 기분 좋은가 본데. 몬스터 처리가 급하니까 내가 참는다.

쿠우웅! 쿵!

날린 쇠구슬 가까이 몬스터가 밀려들자 또 한 번 폭발이 일어났다. 저 귀를 울리는 폭발음도 슬슬 익숙해졌다.

“원거리팀 준비 완료!”

“이제부터 나와 원거리팀은 중간 부근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근거리팀은 선두를 맡도록.”

“알겠습니다!”

지켜보던 근접팀이 박건호의 명령에 저마다 무기를 쥐며 앞을 막아섰다. 가쁜 숨을 고르는 내게 박건호가 말했다.

“3차 준비.”

“…….”

집에 가고 싶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쇠구슬을 날렸다.

***

“허억, 헉…….”

가득 쌓인 몬스터 시체를 바라보다 허리를 숙여 거친 숨을 뱉어 냈다. 이 정도로 능력을 쥐어짠 적은 처음이라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들쭉날쭉 요동치는 기운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아까보다 훨씬 강했다. 아무래도 한계까지 능력을 쓴 부작용인 것 같았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식은땀을 닦으며 허리를 세웠다. 그나마 숨 쉬는 것은 좀 편해졌다. 미간을 잔뜩 구긴 나를 바라보던 박건호가 피식 웃었다.

“이런 전투는 익숙하지 않은가 본데? 안색이 창백하군.”

“이번 게이트가 처음입니다.”

“역시 그런가. 힐러에게 가서 기력을 보충하면 좀 나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민아린과 김우진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박건호를 지나쳐 가려던 그때였다.

“잠깐.”

“뭡니까?”

박건호가 대뜸 손목을 잡아 왔다. 180이 훌쩍 넘는 커다란 키를 가진 박건호의 손은 내 손목을 감싸고도 남을 만큼 컸다.

“이름이 뭐지?”

“……한이결.”

갑자기 이름은 왜. 나는 지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박건호를 올려다봤다.

“우리 길드 소속 맞나? 그동안 왜 한 번도 못 봤지?”

“그건 갑자기 왜…… 그보다 손 좀 놔주시죠.”

“대답하면 놔주겠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민했다. 무소속이라고 말해도 되나. 천사연이 멋대로 데려온 거니까 딱히 나까지 숨길 이유는 없긴 한데.

이왕 온 거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망한 모양이다. 나는 붙잡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못 볼 만하죠. 전 레퀴엠 길드 소속이 아니니까.”

“용병이라고? 흐음. 마스터가 부른 건가?”

용병은 아니지만 천사연이 부른 것은 맞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했으니 손 치우세요.”

일부러 차갑게 말했는데도 박건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놔줄 뿐, 딱히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없었다. 속으로 투덜투덜 불만을 늘어놓으며 민아린과 김우진에게로 돌아가니, 중간 보스 몬스터와 한창 전투 중인 천사연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끼이이익, 끼이익.

이미 한번 베였는지, 검은 천을 흩날리며 허공을 떠다니는 몬스터의 어깨는 시뻘건 불길에 타오르고 있었다. 눈으로 따라가기 벅찬 속도로 허공을 가르는 낫을 적당한 거리를 벌려 가며 피하는 천사연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S급 아래로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공포에 질려 저항 한 번 못할 만큼 강한 몬스터를 상대로 편해 보이다니. 나는 천사연도 하태헌과 같은 SS급 능력자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한이결!”

“이결 씨, 괜찮아요?”

“네. 별일 없었습니까?”

김우진과 민아린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민아린이 다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힐러팀은 모두 무사해요. 그보다 부상자가 많아서 가 봐야겠어요. 이결 씨는 다친 곳 없어요?”

“멀쩡해요. 급할 텐데 어서 가 보세요.”

“나도 도와주러 갔다 올게.”

“쉬고 있어요!”

내내 보호만 받기에는 양심에 찔리는지 김우진이 드물게 힐러팀을 돕겠다며 나섰다. 급하게 다친 길드원에게로 달려가는 힐러팀과 김우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천사연에게로 돌렸다.

키이이이이! 끼이이익!

공중에 떠서 변칙적으로 휘두르는 낫을 피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천사연의 발걸음은 마치 산책 나온 것처럼 가벼웠다. 자신의 공격을 모두 피한 천사연을 향해 몬스터가 붉은 눈을 빛내며 몸을 떨었다.

‘이상한데.’

시퍼런 낫에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꽤 멀리 있음에도 한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나는 한층 더 속도가 빨라진 공격에 대처하는 천사연을 주시했다.

‘왜…….’

저렇게 익숙해 보이는 거지.

몬스터와 천사연의 전투는 이미 승리자가 정해져 있었다. 천사연은 몬스터가 어느 방향에서 어떻게 공격할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래, 마치 패턴을 모두 외운 것처럼.

나는 S+급 몬스터의 등장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던 천사연을 떠올렸다. 혹시…….

끼이익, 챙!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낫을 검으로 막은 천사연이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낫을 쳐 낸 후, 몸을 숙여 이어지는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검을 횡으로 그었다. 듣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비명과 함께 몬스터에게 새로운 불길이 심어졌다. 이미 어깨에 타오르는 불은 오른팔을 집어삼킨 상태였다. 뚜둑, 뚜두둑, 온몸을 기괴하게 비틀어 대던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며 왼팔로 낫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아앙! 쾅!

모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며 천사연의 모습이 감춰졌다. 뿌연 연기 너머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천사연과 거대한 낫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직후.

쿠웅!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몸을 옥죄던 한기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천사연이 있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끽, 끼긱, 기긱. 극.

땅으로 무너진 몬스터는 고장 난 기계처럼 목을 마구 뒤틀며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 끝이 가차 없이 몬스터의 머리를 꿰뚫었다. 검과 몬스터를 감싸고 타오르던 불이 사라졌다.

몬스터를 죽인 천사연은 전투를 치른 사람 같지 않게 너무나도 멀쩡했다.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피부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검은 천을 뒤집어쓴 몬스터를 밟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악마를 처단한 사제처럼 숭고해 보였다.

“한이결.”

“……아.”

나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봤다. 급히 시선을 틀며 목덜미를 쓸었다. 뭔가 들킨 기분인데…….

그런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천사연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얼굴이 꽤 마음에 드나 보군.”

“……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서, 상황은?”

……이 자식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사연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처리 완료했습니다. 사망자는 없고, 부상자는 현재 힐러팀이 치료 중입니다.”

“흐음.”

천사연이 검에 묻은 자신의 피를 대충 털어 내며 내 뒤로 보이는 팀원들을 훑어봤다.

“사망자가 없다고.”

“예.”

“실력이 참 좋아, 한이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건… 아무래도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거 같은데.

“제가 아니라 박건호 팀장님 실력이 좋은 거겠죠.”

“아니. 너 없이 박건호 혼자였다면 사망자가 나왔을 거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아무도 안 죽고 잘 정리됐다는데 왜 저러는 거지?

‘하긴, 언제는 알았나.’

천사연 까다로운 거야 첫 만남에 바로 깨닫지 않았던가.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하며 나는 다른 말을 꺼냈다.

“힐러한테 가시죠.”

“힐러?”

“다쳤잖아요. 아직도 피가 흐릅니다.”

인상을 찌푸리며 피가 뚝뚝 흐르는 천사연의 손을 가리켰다. 검에 좀 베인 거로 피가 저렇게 많이 흐를 수 있나. 설마 싸울 때 피가 부족해서 더 쑤신 건 아니겠지?

“아, 이거.”

천사연이 아프지도 않은지, 다친 손을 탈탈 흔들었다. 핏방울이 이리저리 튀었다.

“이 검으로 베어서 그래. S급 검이라서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지. 대충 붕대 감아 두면 돼.”

“아니, 그럼 더더욱 힐러에게 치료받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상관없어. 이 검보다 내가 더 강하니까.”

그가 부상자들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힐러들을 바라봤다.

“저 정도 부상자들은 힐러 셋이서 감당하기도 벅차. 굳이 나까지 낄 필요는 없지.”

“…….”

그 말에 진심으로 놀랐다. 솔직히 말해서 천사연이라면 곧바로 힐러에게 치료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머쓱해졌다. 내가 그동안 천사연을 좀 편협한 시선으로 봤나 보다. 아니, 물론 저놈이 개새끼인 건 맞는데…….

“마스터.”

“다들 피로할 테니 쉬면서 회복에 집중하고, 내일 이동하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박건호와 대화하는 천사연의 뒷모습을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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