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발아래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갑작스러운 S급 몬스터의 기습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큭…!”
무언가 눈앞으로 날아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꺾었다. 산성 용액이 스치고 지나간 귀 끝이 쓰라려 왔다.
키아아악-!
날 올려다본 몬스터 한 마리가 턱뼈를 벌리며 울부짖자 다른 몬스터들도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찐득한 산성 용액으로 젖은 기다란 혀가 이빨 사이로 쭉 삐져나오며 벌린 입에서 산성 용액이 쏟아졌다.
쿠에에엑! 쿠에엑!
마치 물총처럼 산성 용액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첫 번째는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세 번째가 됐을 때는 넉넉하게 피하기 어려웠다. 쏟아지는 산성 용액이 너무 많았다.
“똑바로, 큭! 잡아!”
김우진의 허리를 붙잡은 상태로 피하려니 더 어려웠다. 누군가와 함께 공중에 뜨는 게 익숙하지 않아 자꾸만 몸이 휘청였다.
“한이결, 저쪽!”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김우진이 내게 왼쪽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리자 기다란 검을 빼 든 천사연과 힐러들이 보였다. 겁에 질린 민아린을 발견한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날아갔다.
“민아린 씨!”
“이결 씨!”
나와 김우진을 발견한 민아린이 크게 안도하며 반겼다. 땅으로 내려온 나는 김우진을 놔주며 곧바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레, 레스트 구간을 벗어나자마자 몬스터가 갑자기 모래 속에서 기어 나왔어요.”
“늦었군.”
모두가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천사연은 평소처럼 느긋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서두른 겁니까? 레스트 구간이었으면 좀 더…….”
“그래 봤자 이 상황은 변하지 않아.”
천사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검은 눈동자는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뒤로 물러나.”
쿠구궁-!
천사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이 크게 흔들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민아린이 털썩 주저앉았다. 끄아악! 처참한 비명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지진으로 집중이 끊긴 길드원의 어깨에 가차 없이 앞발을 꽂은 몬스터가 보였다.
“이, 이건 대체…….”
김우진이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민아린을 부축하며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쿵, 쿵, 가파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서늘한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기어 올라왔다.
사사사삭…….
모래가 불쑥 튀어 올라왔다. 둥그렇게 올라온 모래 끝을 가르고 솟아난 것은 커다란 낫이었다.
뚜둑, 끼릭, 끽.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모래 속에서 살점이 간당간당하게 달려 뼈가 훤히 드러난 손이 나타났다.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살인귀처럼, 혹은 무덤을 파헤치고 올라오는 시체처럼. 천천히 모래를 뚫어 내고 바닥에서 기어 온 그것이 딱딱, 이빨을 부딪쳤다.
“저 몬스터는…….”
나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시린 손을 꾹 말아 쥐었다. 몰려온 수십 마리 S급 몬스터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검은 천을 푹 뒤집어쓴 그것은 무언가에 물어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한 팔로 낫을 후욱 저었다. 그때마다 머릿속에 끼이익 비명이 울렸다.
“이 게이트의 중간 보스. 아직 등급을 매길 수 없는 몬스터지. 굳이 따지자면 S+정도 될까.”
꼴사납게 잔뜩 굳은 나와 달리 천사연은 눈앞의 몬스터를 시큰둥하게 바라봤다. 재킷의 단추를 풀고 검을 쥔 손을 살짝 돌리는 그 행동은 얼핏 지루함마저 느껴졌다.
“실수로라도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 S급 아래는 공포증에 제정신을 못 차릴 테니.”
천사연은 검을 들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반대편 손바닥을 베어 냈다. 가볍게 베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손바닥에서 쏟아지는 피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미 마른 피가 잔뜩 묻어 있던 검날에 생생한 피가 뿌려졌다.
“한이결.”
천사연의 피를 삼킨 검에 검붉은 불길이 일렁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천사연의 능력 중 하나, 혈화였다. 저 불에 닿은 모든 것은 재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타오르게 된다.
“넌 가서 박건호를 도와.”
“……박건호?”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몬스터를 사냥 중인 박건호를 힐끔 바라봤다. 내게 박건호를 찾아가라는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박건호와 힘을 합치려던 생각이었기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몬스터는?”
“저건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그렇다면야. 우선은 믿고 내가 할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김우진을 돌아봤다.
“민아린 씨랑 같이 있어. 조심하고.”
“……내 걱정을 왜 해? 너나 조심해.”
다행히 김우진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아직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나는 민아린과 김우진을 뒤로하고 박건호에게 날아갔다. 그는 길드원과 몬스터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이 상황을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섣불리 능력을 사용했다가는 팀원들이 폭발에 휩쓸릴 것이다.
“팀장님.”
“그쪽은…….”
한가하게 자기소개 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팀장님 능력, 쇠구슬을 폭탄으로 터뜨리려면 지켜야 할 점은 뭐가 있습니까?”
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쇠구슬을 직접 만진 상태에서 날려야 합니까? 아니면 팀장님 시야에만 보이면 터뜨리는 게 가능한 겁니까? 능력 범위는?”
날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그럴 만했다. 능력자들은 각자 가진 한계가 있었고, 그것은 곧 치명적인 약점으로 귀결된다. 웬만한 상황이 아니라면 쉽게 말할 수 없는 정보였다.
“제 능력은 바람입니다. 물체를 원하는 곳으로 날려 보내거나 이동시키는 게 가능합니다.”
게이트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경험을 쌓아 온 박건호는 추가적인 설명이 없어도 내 말을 이해했다.
“쇠구슬을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건가?”
“네. 저도 따로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10개는 동시에 가능합니다.”
“내 시선이 닿아야 터뜨릴 수 있다. 상황이 급하니 바로 시작하지.”
박건호가 쥐고 있던 쇠구슬을 내게 넘겼다. 숫자는 대략 20개. 나는 심호흡을 하며 능력을 끌어 올렸다.
휘이잉!
쇠구슬이 올려진 손바닥으로 강한 바람이 빙글빙글 돌았다. 집중력을 높이자 쇠구슬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수가 10개를 넘어 15개가 되자 한계까지 끌어 올린 집중력으로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내 뒤에 선 박건호가 팔을 들고 자신이 지정하는 위치를 나침반 바늘처럼 정확하게 가리켰다.
“11시 방향, 두 마리. 두개골 하단 틈 가까이에서 터뜨리면 뇌가 터지며 곧바로 사망한다. 12시 방향, 한 마리. 3시 방향, 네 마리. 4시 방향, 세 마리. 5시 방향, 나머지.”
일정한 톤으로 냉정하게 명령하는 박건호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덜덜 떨려 오는 손을 휘젓자 내가 원하는 지점에 쇠구슬이 정확하게 날아갔다. 11시부터 5시 방향까지 순서대로 쇠구슬이 자리를 찾아가자마자 곧바로 폭발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콰아앙! 쿠우웅!
“으읏…….”
12시 방향 폭발은 워낙 가까웠기에 코를 찌르는 탄약 냄새와 함께 몸이 비틀거렸다. 박건호가 내 어깨를 붙잡아 지탱해 주며 앞을 바라봤다.
쓰러진 길드원의 얼굴을 뜯어먹으려던 몬스터 두 마리는 뇌가 터져서 시체가 되었다. 도망치는 길드원에게 팔을 휘두르던 몬스터도 상반신 절반이 사라졌고,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몬스터들은 폭발에 휩쓸려 갈가리 찢겼다.
키아아악! 크아악!
캬아악!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몬스터는 많았다. 겨우 정신 차린 길드원들이 급히 능력을 끌어 올리며 저편에서 달려오는 몬스터 무리를 응시했다.
“한 번 더.”
박건호가 전투 조끼 주머니에서 꺼낸 쇠구슬을 한가득 내게 넘겼다.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러 개의 쇠구슬을 원하는 지점에 정확히 움직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는 불안정하게 휘몰아치는 기운을 억지로 심장에 모이게 했다.
“팀장님! 원거리팀 대열 잡았습니다!”
“근접팀, 현재 7명 대기 중입니다!”
키아아아! 키엑!
꽤 멀리 있다고 생각한 몬스터가 벌써 코앞까지 와 있었다. 나는 쇠구슬을 하나하나 공중에 떠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명령하십시오.”
박건호가 날 내려다보며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내 태도에 뭔가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박건호가 아까처럼 팔을 들었다. 길드원과 몬스터가 뒤섞였던 방금과는 달랐다. 지금은 한곳에서 몬스터가 몰려오고 있으니, 대처가 더 쉬웠다.
“정확히 세 지점으로 나눠서 1차로 날려. 폭탄이 터져서 선두에 있는 몬스터가 쓰러지면 그 뒤는 원거리팀이 공격할 거다. 원거리팀 공격이 멈추면 2차로 날리고. 이해했나?”
“쉽네요.”
나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끼면서도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지금.”
박건호의 명령에 공중에 떠오른 여러 개의 쇠구슬 중 세 개가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달려오는 몬스터의 뇌에 쇠구슬이 닿은 그 순간,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