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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4)화 (14/394)

14화

  

잦은 염색으로 머릿결이 상해 부스스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형님, 주무세요?”

“아니.”

반사적으로 뻑뻑한 눈을 비비며 의자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서류가 잔뜩 널린 책상은 딱 보기에도 지저분해 보였다.

“우와, 얼굴 봐. 관리 좀 하세요, 형님. 멀쩡하게 생겨서.”

“말버릇하고는. 내가 네 친구냐? 사 온 거나 내놔.”

얼굴을 잔뜩 내밀고 날 살피던 녀석이 내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맨날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고. 쪽팔리게…….”

“쪽팔린 줄 아는 놈이 여길 들락거려? 당장 내쫓아 줄까?”

“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깡패 사무실 드나드는 걸 쪽팔려 해야지.”

“깡패는 개뿔, 시발…….”

“시발?”

“쳇, 귀는 밝아 가지고.”

끝까지 대드는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다. 내가 뭔 말을 하겠냐. 잔소리 대신 녀석이 사 온 바닐라 라테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았다.

한참을 넋 놓고 커피만 마시는데, 내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녀석이 개털 같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참, 저런 얼굴을 하고 단건 또 저렇게 잘 먹는 게 신기하네…….”

“맛있잖아.”

“안 어울린다고요. 생긴 것만 보면 와인이 딱 맞는데.”

“내가 단걸 좋아하든 말든. 볼일 끝났으면 수다 그만 떨고 나가지?”

“씨, 안 그래도 나갈 거였다고요! 진짜 짜증 나게…….”

또 뭐가 거슬렸는지 버럭 소리를 지른 녀석이 씩씩거리며 사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갔다. 하루 이틀 저러는 게 아닌 터라 신경 쓰지 않고 커피만 마셨다.

달고 시원해. 맛있다.

“……결 씨.”

단 거 최고…….

“이결 씨.”

“음?”

깜빡. 눈을 뜨니 흐릿한 시야 너머로 모래가 보였다. 고개를 들자 날 흔들어 깨운 민아린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힘들면 능력 써 줄까요? 피로가 좀 풀리긴 할 텐데.”

“아닙니다.”

잠깐 눈을 감는다는 게 꿈까지 꿀 정도로 자 버렸나 보다. 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바지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었다.

“몇 시입니까?”

“새벽 4시예요. 곧 출발한다고 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먼지로 가득한 하늘이 살짝이지만 밝아지는 게 보였다.

게이트로 들어온 지 벌써 나흘째. SS급 게이트인 만큼 내부가 워낙 넓어서 이제야 절반 정도 진행한 상황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잠자리를 정리하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공격형 능력자들은 B급 정도면 일반인보다 체력이 좋아서 대충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자도 버틸 만했지만, 힐러처럼 비공격형 능력자들은 아무리 급이 높아도 신체는 일반인과 똑같으므로 침낭 같은 물품이 필수였다.

“저보다 민아린 씨가 더 힘들어 보입니다.”

“음……. 어쩔 수 없죠. 이런 경험이 처음이기도 하고.”

아무리 침낭과 텐트를 치고 잔다고 해도 수시로 몬스터가 달려드는 게이트 내부에서 편하게 쉴 수 있을 리 없다. 피로로 다크서클이 내려오고 피부가 거칠어진 민아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은 버틸 만해요. 다친 분들이 없으니까…….”

“아아.”

다행히 나흘간 등장한 몬스터의 등급은 B급이었다. 클리어팀 인원 대부분이 A급이라 몬스터가 떼로 몰려와도 처리는 쉽게 이뤄졌다.

치유 능력은 능력자의 기력을 대가로 사용되기 때문에 지금이야 괜찮지만, 만약 다친 이들이 생긴다면 민아린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너무 쉽네요. 마스터도 참가했으니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만만한 게이트는 아닐 것 같아요.”

나는 민아린이 너무 긴장을 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나흘간 B급 몬스터만 등장한 것은 나도 의아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게이트가 SS급인 것은 변함없으니까.

***

주변이 완전히 밝아지자마자 몬스터가 습격해 왔다. 모래 속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몬스터라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등급이 B급이라 소란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쿠웅!

크에엑!

전갈과 비슷한 생김새의 몬스터 수십 마리가 갈가리 찢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아앙! 이어진 폭발음에 땅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 대단하네요.”

작은 쇠구슬이 몬스터에게 날아가 그대로 폭발한다. 우르르 달려들던 몬스터들은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폭발에 휩쓸렸다.

민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몬스터를 처리하는 박건호를 바라봤다. 쇠구슬을 폭탄으로 바꾸는 능력. A급 몬스터쯤은 그대로 터져 버릴 만큼 위력도 강해서, 특수작전부 팀장이라는 위치가 이해가 갔다.

박건호의 능력으로 몬스터를 모두 처리한 팀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말린 육포를 씹으며 걸어가던 나는 들려오는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레스트 구간입니다!”

삭막한 모래만 보이던 눈앞에 초록빛으로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마치 오아시스 환영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그 숲은 ‘레스트’라고 불리는 곳으로, 몇몇 게이트에 존재하는 구간이었다.

정글처럼 거대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며 중앙에는 강이 흐르는 평화로운 숲. 반나절을 걸어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이며 그 안에서는 어떤 몬스터도 등장하지 않아 ‘휴식(Res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레스트 구간을 처음 본 민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부푼 목소리로 말했다.

“와, 진짜로 숲이 있네요.”

“여기서는 몬스터가 안 나온다던데.”

“맞아. 그래도 위험하니까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마.”

“……시발,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나흘 동안 내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들어온 김우진이 불평을 늘어놨다. 나는 한숨을 쉬며 민아린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낮춰 말했다.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레스트 구간 동안에 자리를 비울 거야. 제발 사고 치지 말고 민아린 씨 옆에 조용히 붙어 있어.”

“뭐? 나도 갈래!”

“헛소리하지 말고.”

천사연에게 대가로 요구했던 하급 아이템 두 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나도 실제로 찾아보는 것은 처음이라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뒤에서 힐러팀을 지키는 척 따라가다가 눈치 봐서 따로 빠져나올 계획이었다.

“이게 왜 헛소리야? 애당초 내가 들어온 이유가 널 감시하려고…….”

“이번 일은 마스터도 알고 있으니까 감시할 필요 없어.”

아는 건 둘째 치고 애초에 대가로 받아야 할 아이템을 지금, 이 고생을 하면서…… 아, 그만하자. 더 생각했다간 저 앞에 있는 천사연한테 당장 달려가서 멱살이라도 붙잡을 것 같았다.

“에이씨, 나 혼자서 뭐 하라고…….”

“네가 왜 혼자야. 민아린 씨도 소개해 줬잖아.”

“안 친해!”

“그럼 나랑은 친하냐?”

어이없어서 되묻자 김우진이 입을 꾹 다물고는 날 노려봤다. 노려봐 봤자 소용없다니까.

“이 와중에 낯도 가리고. 아주 가지가지…….”

“닥쳐! 그냥 싫어서 안 친해진 거야!”

“아무튼 안 데려가. 너 신경 쓸 여유도 없고.”

“…….”

일부러 아주 귀찮고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우진을 바라보자, 녀석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몸을 휙 돌리고는 사람들 틈으로 도망갔다. 쯧쯧 혀를 차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민아린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이결 씨, 동생 있나요?”

“동생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목덜미를 쓸며 고민했다. 이걸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그야 따지자면 한이결은 동생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고민하기에도 이상하니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뭐어……. 갑자기 그건 왜요?”

“김우진 씨 대하는 거 보면 왠지 동생이 많아 보여서요.”

동생이 많다니.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많기는 했지. 물론 그런 의미의 동생은 아니지만.’

형님, 형님 하며 내 뒤를 따라다니던 덩치들이 떠올랐다. 생긴 건 그래도 다들 순박하니 착했는데.

그러고 보니 김우진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놈도 있었지. 기억 저편에 밀어 뒀던 부스스한 금발이 잠깐 떠올랐다.

“이결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 서… 아니아니, 스물넷이요.”

하마터면 실제 나이를 뱉을 뻔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한이결의 나이를 말했다. 내가 직접 지갑에 꽂힌 주민증을 보고 알아낸 나이였다. 소설에서 한이결은 비중이 적어 나이 같은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스물넷이요? 얼굴은 더 어려 보이는데.”

“민아린 씨는요?”

“전 스물아홉이에요.”

“민아린 씨도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세요.”

내 말에 민아린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흐흥. 그런 소리 자주 듣긴 하는데, 이결 씨가 하니까 더 기분 좋네요.”

“하하, 진심이에요.”

민아린에게 점수 따 놓으면 여러모로 이득이니 붙어 다니고 있지만, 방금 말은 사실이었다. ‘어비스’가 남성향 소설이니 당연한가. 이런 여자들이 좋다고 따라다니는 하태헌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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