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괜찮았다. 가뿐한 기분으로 씻으려고 욕실로 들어선 나는 거울을 보고 기겁했다.
“미친.”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부었을 줄이야. 시퍼런 멍이 얼룩덜룩 진 얼굴은 정말 두 눈 뜨고 봐 주기 어려울 만큼 개판이었다. 멀끔했던 한이결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다니…….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주먹질하며 살던 인생이라 큰 타격은 없다지만…….’
한이결의 몸은 맷집이 없어서 그런가, 이전 몸보다 부담이 훨씬 컸다. 앞으로는 자제 좀 해야겠다.
씻고 나와 옷을 챙겨 입은 나는 소파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았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가도 되는 건가? 배고픈데 식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설마 이렇게 나가지도 못하고 갇혀서 일주일을 보내야 하는 건.
“…….”
어제 만났던 천사연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니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 혹시 감금당한 건가?
천사연이 워낙에 곱게 미친놈이라 무엇 하나 확신이 들지 않았다.
똑똑.
한참 고민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후다닥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누가 온 거지?
“안녕하세요!”
“아.”
시원하게 열어젖힌 문 너머에는 처음 보는 여자와 천사연의 수행원이 함께 서 있었다.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요.”
“어… 네. 반갑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인사에 대답했다. 뒤에 서 있는 수행원에게 설명을 바라는 텔레파시를 보내 봤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한이결 씨 맞으시죠?”
“네. 그쪽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려 묶은 화사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는 힐러 민아린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반사적으로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나는 소설 내용을 떠올렸다. 레퀴엠 길드 소속 힐러 민아린.
‘소설 속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잖아!’
주인공 하태헌을 도와주는 비중 있는 조력자 중 한 명, 민아린. 그녀가 날 찾아왔다.
***
민아린은 힐러 중에서도 치유량이 가장 뛰어난 A급 힐러다. 구김살 없는 밝은 성격과 강한 멘탈, 따뜻한 심성으로 등장하는 조력자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 경계심 강한 하태헌마저도 민아린은 동료로서 믿을 만하다고 인정했다.
연예인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눈앞에 있는 민아린의 모습이 실감 나지 않았다. 사실 제가 그쪽 팬입니다.
“들어가도 되나요?”
“아, 네.”
내가 뒤로 물러서자 민아린과 수행원이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수행원은 열어 둔 문을 닫으며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아무래도 민아린을 경호하기 위해 따라온 모양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방을 둘러보던 민아린이 날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께서 가 보라고 하셔서요.”
“마스터라면… 설마 천사연 마스터요?”
“그럼요.”
민아린이 뭘 그리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천사연이 나한테 힐러를 보냈다고?
“특별한 말씀 없이 가 보라고만 하셔서 의아했는데, 와 보니 이해가 되네요.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아, 이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어제보다 더 심하게 부었으니 그런 소리를 할 만했다.
“괜찮습니다. 보기에만 이렇고 아픈 건 아니에요. 그냥 약 바르고…….”
“제가 왔으니 그럴 필요 없어요!”
“전 정말로 괜찮…….”
“혹시 제 실력이 부족해 보이거나, 못 미더우신 건가요?”
“아뇨, 아뇨.”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따지자면 민아린보다는 천사연이 의심스럽다. 천사연이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니라면 힐러를 보내 줄 리가 없다. 심지어 어제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으니, 마음 편히 힐러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만약 그러시다면 더 불편하게 하지 않고 돌아갈게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계속 거절하며 뒤로 물러서자 민아린이 슬픈 눈을 했다. 잔뜩 시무룩해져서는 조곤조곤 말하는데, 그 모습을 정면으로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딱 죽을 맛이었다. 차라리 칼과 총이 난무하는 전쟁 한복판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쥐어짜 내듯 힘겹게 변명을 뱉어 냈다.
“제가 힐러를 처음 만나 봐서 그래요. 게다가 그런 귀한 능력을 받을 정도로 다친 것도 아니라서.”
“정말요?”
“예…….”
너무 난감해서 식은땀이 다 났다. 내가 미안함에 안절부절못하자 민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그럼 치료해도 되는 거죠? 지금 보니까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팔도 다치셨는데… 같이 치료해 드릴게요.”
“음…….”
그건 또 언제 본 거지. 씻고 나서 관리하기 귀찮아 대충 소매만 걷어 둔 상태였는데, 딱 들켰다. 결국 나는 민아린에게 붙잡혀서 의자에 앉아야 했다.
“치료 시작할게요.”
민아린이 내 얼굴에 손을 살짝 올렸다. 그러자 손에서 은은한 흰빛이 퍼져 나오며 시원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길게 베인 팔도 민아린의 손이 닿자 거짓말처럼 상처가 사라졌다. 거울이 없어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얼굴도 말끔히 나았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놀랍네요.”
“후후, 쓸 만하죠?”
민아린이 아까보다 살짝 피곤한 낯으로 말했다. 능력을 사용한 부작용으로 피로해진 모양이다.
“큰 상처는 오래 걸리지만, 이 정도는 금방 치료할 수 있어요.”
“신세를 졌네요.”
“신세라뇨. 마스터께 들어 보니 이번 게이트 클리어에 참여하신다면서요?”
아. 그제야 나는 민아린의 상황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를 레퀴엠 길드 소속 능력자라고 생각하나 보네.’
하긴, 그럴 만했다. 길드 건물에서 지내고 있는 게이트 클리어 참석자. 게다가 그 천사연이 힐러를 보내 줄 정도로 신경 쓰고 있으니, 날 길드 직원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듯하다.
“저도 가거든요. 그 게이트 클리어 작업. 절 지켜 주실 분이니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아예 내부까지 같이 가시는 건가요? 힐러들은 대체로 밖에서 대기하지 않습니까?”
“보통은 그렇죠. 근데 이번 게이트는 같이 들어가자고 하셔서…. 등급 게이트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 봐요.”
이번 게이트가 SS급이라 난이도가 높은 것은 맞지만, 그보다 천사연이 힐러를 데리고 들어가려는 이유는 본인 능력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확실히 힐러가 상시 대기 중이라면 며칠 동안 이어지는 클리어 작업을 마음 편히 해낼 수 있겠지.
“제 못생긴 얼굴을 고쳐 주셨으니 보답으로 열심히 지켜 드려야겠네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확실히 얼굴은 치료되니 훨씬 보기 좋아요.”
씨익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민아린도 같이 웃으며 받아쳤다.
“게이트 클리어 인원은 몇 명인지 확정되었습니까?”
“아직 선별 중이에요. 대략 15명에서 20명 정도 모을 거라고 하네요.”
그 정도 인원이면 내가 껴 봤자 별 차이도 안 날 텐데. 왜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천사연을 욕하며 민아린에게 말했다.
“힐러는 혼자세요?”
“아뇨, 아마 한둘 정도 더 참여할 것 같아요. 힐러는 워낙에 인원이 많지 않아서 그 이상은 힘들 거예요.”
“그 정도면 적당하죠. 가뜩이나 게이트 내부는 힐러 분들에게 부담스러운 장소일 텐데.”
“뭐, 조심해야죠. 무엇보다 마스터가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인가요.”
“그건…… 그렇죠.”
민아린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람 좋은 민아린마저 이런 소리를 하게 만드는 천사연은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게이트 입장할 때 봬요.”
“네. 잘 가요.”
할 일을 끝낸 민아린은 쿨하게 떠나갔다. 문을 지키던 수행원도 민아린을 따라 방을 나가자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는 욕실 거울로 멀쩡해진 얼굴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힐러 능력은 역시 최고구나.
‘민아린. 민아린이라…….’
이렇게 금방 만나게 될 상대일 줄 몰랐는데. 맞았던 흔적조차 사라진 볼을 매만지며 소설을 떠올렸다.
민아린은 하태헌에게 반해 레퀴엠에서 로헌으로 소속을 옮긴 힐러다. 보기 힘든 힐러 능력을 갖춘 데다 A급이니 레퀴엠에서도 떠나지 말라고 붙잡은 것 같기는 한데, 이미 마음을 굳힌 민아린은 좋은 조건도 모조리 거절하고 하태헌을 찾아간다.
‘민아린이 하태헌을 만나서 로헌으로 옮긴 시점은 중반. 그럼 아직 하태헌과는 모르는 사이겠군.’
A급 힐러. 민아린. 나는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