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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9)화 (9/394)
  • 9화

    3. 이놈이나 저놈이나

    차수연도 있는 건가 싶어서 살펴봤지만 보이는 건 하태헌뿐이었다. 아무래도 차수연은 먼저 보내고 혼자 돌아온 모양이다.

    “가신 줄 알았는데요.”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그 말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템을 드린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저도 그쪽한테 얻을 게 있으니까요.”

    “네 사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하태헌은 셔츠 소매를 걷으며 짜증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네가 벌인 짓거리가 우리 길드에 얼마나 큰 손해를 끼쳤는지 알고는 있겠지.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따라…… 잠깐만요. 어디를요?”

    “길드.”

    길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느 길드? 설마…….

    “하태헌 씨.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를 지금 로헌 길드로 데려가려는 겁니까?”

    “그렇다면?”

    나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제가 미쳤다고 따라갑니까? 전 분명 말했습니다. 강제로 끌고 가 봤자 아이템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럼 그 잘난 입으로 설명해 봐라.”

    하태헌이 삐딱하게 서며 날 노려봤다.

    “가진 거라고는 그 몸밖에 없는 네놈을 나는 뭘 믿고 보내 주지? 이후 연락할 수단은?”

    “그건…….”

    “다른 거 다 제치고, 어떻게 돌아갈 거지? 남은 차는 내가 타고 온 것밖에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올 때 차수연의 차를 타고 왔으니 돌아갈 교통수단이 없었다. 나는 좀 머쓱해졌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제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헛소리 나눌 시간 없다.”

    예예.

    “그렇다고 해도 절 가둬 둘 목적이라면 따라가 줄 수 없습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도 모르게 몸에 긴장감이 흘렀다. 알고 있었지만, 하태헌을 실제로 마주하니 그 힘의 차이가 더 적나라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가 마음먹고 덤벼든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 10분. 그마저도 도망치다가 붙잡히겠지.’

    내 말에 하태헌이 별다른 대답 없이 날 바라봤다. 침묵이 지속되자 등 뒤로 차가운 식은땀이 맺히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무엇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쓸데없는 기운을 뺄 생각은 없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민을 끝냈는지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널 길드로 데려가려는 건 계약을 하기 위해서다.”

    “계약?”

    “넌 나한테 거래를 하자고 했지.”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를 위해 계약하자는 말씀입니까?”

    “내가 너한테 제시할 것은 세 가지다. 첫째, 공정한 계약서를 작성할 것. 둘째, 연락할 수단을 정할 것. 셋째, 네 존재를 우리 쪽 길드 마스터에게 알리는 것.”

    “……계약서에 장난 같은 것을 치진 않겠죠.”

    “너와 나는 똑같은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할 거다. 그리고 그 과정을 마스터가 보는 앞에서 진행할 거고.”

    계약서라. 그게 과연 내게 기회가 될 것인가, 독이 될 것인가. 최대한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시간을 들여 다양한 가능성을 따져 본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둘째, 연락할 수단을 정하는 건 빼도록 하죠. 대신 계약서에 추가해요. 제가 적절한 시기에 당신을 만나러 갈 거고, 그걸 지키지 못한다면 불이익을 주는 쪽으로.”

    “이유는?”

    “제가 섣불리 그런 것을 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하태헌을 향해 보란 듯이 흔들었다.

    “네 것이 아닌가 보군.”

    “이걸로 주고받는 모든 내용이 제 상사한테 고스란히 들어갑니다. 제가 그건 좀 싫어서요.”

    “…….”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하태헌은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일단 돌아가지.”

    내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끌며 급히 하태헌의 뒤를 따라갔다.

    ***

    “그래서 지금…….”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 여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납치범을 데려왔다는 거야? 우리 길드로?”

    “납치범이 아니라 이 경우에는 비즈니스 손님…….”

    “예.”

    내 말을 뚝 자르며 하태헌이 대답했다. 뭐 문제 있냐는 그 태도에 여자, 로헌 길드 마스터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당장 경찰에 넘기기나 해!”

    “그럼 S급 아이템이 날아갑니다.”

    “그걸 믿어?”

    “안 믿습니다.”

    “그럼 대체 왜…….”

    하태헌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하지만 계약서는 믿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하면 저 여우 같은 놈도 말을 바꾸지는 못할 테니.”

    여우 같은 놈이라니……. 설마 날 말하는 건가?

    “하아……. 태헌아. 이러는 거 너답지 않아.”

    아니, 하태헌이라면 이러고도 남지.

    하태헌은 자신을 건드린 상대를 땅끝까지 쫓아가서 복수하는 성격이었다. 끈기와 집착이 남다른 놈이다.

    ‘그래서 천사연과 계속 부딪혔지. 천사연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니…….’

    그래도 둘 중에 나은 쪽은 하태헌이었다. 하태헌이 정면으로 들이박는 타입이라면, 천사연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는 타입이었다.

    “게이트가 넘어갔습니다. 그 손해를 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작 그런 게이트가…….”

    “평범한 게이트가 아닐 겁니다.”

    “그건 맞아요.”

    대화에 슬쩍 끼어들자 로헌 마스터가 나를 노려봤다. 하태헌이 노려봤던 거에 비하면 조금도 무섭지 않아서 나는 일부러 화사하게 웃어 주었다.

    “등급 게이트거든요.”

    “역시 그렇군.”

    내 말에 하태헌이 예상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로헌 마스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래 봤자 A급이었겠지. 그 정도는 우리 길드에 아무것도 아니야.”

    “글쎄요…….”

    나는 일부러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굳이 로헌 길드 쪽에 이번 게이트가 SS급이라는 것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가 미간을 더욱 구겼다.

    “거기까지. 본론으로 돌아오도록 하죠. 계약서를 부탁드립니다, 마스터.”

    “……알았어.”

    내게 한마디 하려던 로헌 마스터를 하태헌이 막아섰다. 다소 불만스러운 티를 내던 로헌 마스터는 일단 나부터 보내야겠다고 판단했는지 곧바로 계약서를 두 장 가져왔다.

    현재 나와 하태헌, 그리고 로헌 마스터가 있는 이곳은 로헌 길드 내부 응접실이었다.

    푹신하고 넓은 소파와 고급스러운 테이블, 향긋한 차가 함께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불편하기만 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라 재빠르게 계약서를 살펴봤다.

    ‘인적사항 부분은 그렇다고 치고……. 계약에 관해서는 정말 별거 없네.’

    내가 하태헌에게 S급 이상 아이템을 제공하지 않을 시, 어떠한 불이익이 와도 감수하라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차근차근 살펴보던 나는 앞에 앉아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하태헌에게 물었다.

    “계약서에 아까 제가 말했던 내용이 없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지금 해결해 주지.”

    하태헌이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 보니 작고 낡은 폴더폰이었다. 전화 기록부에 저장된 번호는 단 하나였다.

    “내 번호로만 연락할 수 있도록 특별 제작된 핸드폰이다. 연락은 그것으로 해결하도록 하지.”

    “음….”

    천사연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내 상황을 하태헌에게 알린 순간부터 이럴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어째 진짜로 받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손아귀에 핸드폰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다가 우선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일단 알겠습니다.”

    시큰둥한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하태헌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다행히 별다른 추궁은 하지 않았다.

    “참. 계약서에 제가 원하는 것도 넣어 주시죠.”

    “뭘 원하지?”

    “아이템을 받게 되면, 제가 바라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세요.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반드시.”

    “……좋아. 대신 제한을 두겠다.”

    “상관없습니다. 하태헌 씨 개인이나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부탁할 거니까.”

    추가된 내용까지 완벽하게 적힌 내 계약서와 하태헌의 계약서가 교환됐다. 그 모든 장면을 영상 촬영 중이던 로헌 마스터가 자신이 증인이며, 계약이 진행되는 것을 명예를 걸고 공정하게 지켜보겠다는 선언을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껐다.

    “영상을 원한다면 보내 주도록 하지.”

    “별로. 됐습니다.”

    애초에 나는 이런 계약서까지 남길 정도로 하태헌에게 신뢰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일로 하태헌이 날 조금이라도 믿게 되기를 기대했다.

    “한이결…….”

    “예?”

    내 이름이 들린 것 같아 앞을 바라봤지만, 하태헌은 계약서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뭐지.

    찜찜했지만 별거 아니겠지 싶었다. 그보다는 계약도 끝났으니, 슬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지금쯤이면 차수연의 제이나 길드 복귀 소식이 천사연에게 들어갔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로헌 길드와 레퀴엠 길드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그럼 전 갑니다. 수고하십쇼.”

    나는 대충 인사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다치고 지친 상태라 그런지 몹시 피곤했다. 어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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