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하태헌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반가움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재밌게 본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강하고, 정의롭고, 멋있는 주인공.
나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 내게 ‘어비스’는 처음 접해 보는 장르 소설이었다. 그전까지는 책을 자주 볼 수도 없었고, 봤다 하더라도 하나같이 지루하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뿐이었다.
‘재밌다.’
나는 책이라는 게, 이야기라는 게 이토록 재밌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권을 내려놓고 곧바로 2권을 집어 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태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지켜봤다. 그가 다치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행복하게 웃으면 마음 한구석이 편해졌다.
하태헌이 부러웠다. 나도 저런 힘이 있었다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차수연 씨.”
“저, 정말 오셨군요.”
하태헌은 예상했던 대로 도착하자마자 차수연을 살펴봤다. 다친 곳은 없는지, 겁먹지는 않았는지, 지치지는 않았는지. 모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했다.
하태헌은 회의 참석 직전에 왔는지 짙은 암갈색 반곱슬 머리카락을 반절 넘기고,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넓은 어깨와 셔츠 소매 아래에 흉터가 새겨진 손이, 그가 각성 이후 얼마나 피나는 노력으로 힘을 갈고닦았는지를 보여 줬다.
나는 다 알아. 봤으니까.
“안녕하세요.”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며 하태헌에게 인사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봐서 아시겠지만, 차수연 씨는―”
“…….”
분명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하태헌이 갑자기 능력을 사용했다. 검은빛으로 반짝이는 먼지가 순식간에 몰려들어 흑단과도 같은 검을 만들어 냈다. 활자로만 만났던 주인공의 능력을 두 눈으로 봤다는 현실에 감동할 겨를도 없었다. 서늘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능력을 사용했다.
콰앙!
“이런 미친……!”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가 처참하게 부서졌다. 나는 억울함에 급히 소리쳤다.
“잠깐! 성질 엄청 급하네. 대화 좀 합시다!”
“시끄럽군.”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말투도 근사하네.
이럴 때가 아닌데도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저 정도는 돼야 주인공을 하는구나. 진짜 멋있네. 나는 다시 한번 내게 달려드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윽, 믿기 어렵겠지만 전 차수연 씨 머리카락 하나 안 건드렸습니다!”
“납치범 주제에 뻔뻔하군.”
뻔뻔한 게 내 매력인데.
나는 훌쩍 뒤로 물러서서 하태헌과 거리를 뒀다. 이 정도면 다시 공격한다고 해도 한 번쯤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제가 차수연 씨를 이용해서 당신을 부른 건 이유가 있습니다.”
“관심 없다.”
“으음.”
나는 거치적거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선뜻 내 말을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어째 하태헌이 내 계획보다 더 호전적인 것 같은데. 왜 저러지? 혹시 오다가 천사연이라도 만났나?’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저도 명령받은 겁니다. 저로서는 차수연 씨를 최대한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이 한계였습니다.”
“……천사연 마스터와 무슨 관계지? 레퀴엠 길드 소속인가?”
“하하, 그럴 리가.”
길드에 소속된 능력자는 이런 지저분한 일을 하지 못한다. 길드 소속 능력자들은 자세한 신상정보가 국가에 등록되며 민간인보다 더 까다로운 절차를 지키고 살아야 한다.
천사연의 명령이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이행해야만 하는 한이결은 그 어떤 길드에도 소속되지 못했다.
“무소속이라 해도 상관없다. 널 붙잡아서 천천히 알아내면 되니까.”
“그건 좀…… 거절하고 싶네요.”
하태헌이 악역에게 얼마나 잔인해지는지, 반사적으로 소설 내용을 떠올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가 쓸 만하다면, 한 번만 봐주시죠.”
“관심 없다고 말했을 텐데.”
“후회하실 텐데.”
장난스럽게 말하자, 하태헌이 검 끝으로 바닥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아무리 봐도 날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몸짓이라 나는 더 뜸 들이려던 계획을 단숨에 접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게이트가 꽤 특별하다는 것, 알고 계시죠?”
“역시 그것 때문에 이딴 짓을 벌인 거군.”
“그 게이트와 비슷한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서늘하게 노려봤다. 이야, 눈빛이 장난 아니네.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입니다. 아이템을 구할 방법을 알려 드릴 테니, 이후에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세요. 오늘 봐주는 건 서비스로 끼워 주시고.”
“네놈을 어떻게 믿지?”
그 말에 나는 얌전히 앉아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차수연을 힐끔 바라봤다. 차수연이랑 똑같은 질문을 하네. 한이결이 그렇게 사기꾼처럼 생겼나?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착해 보이는데.
“뭐… 강요할 수는 없죠. 근데 이왕이면 한번 믿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여기서 절 후려 패고 끌고 간다 한들, 저는 아이템에 대해 말해 주지 않을 거고… 감금한다 해도 우리 보스가 날 찾아다니면 꽤 귀찮아지실 텐데요.”
반 정도 거짓을 섞어 말했다. 우리 보스가 날 찾아다닌다니. 다른 건 몰라도 천사연이라면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개새끼다.
내 설득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는지 하태헌이 복잡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나는 차수연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렇죠, 차수연 씨? 제 생각이 맞죠?”
어서 내 의견에 힘을 실어 줘. 나는 너의 사랑을 위해 목걸이도 빌려줬잖아. 내 이글거리는 눈빛에 움찔한 차수연이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 생각도 그래요. 아이템 준다니까 속는 셈 치고 믿어 봐도…….”
“아이템 등급은 최소 S급!”
“어머!”
차수연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더 적극적으로 나를 거들었다.
“S급 아이템이라니! 절대 놓치면 안 돼요, 태헌 씨! S급 아이템은 정말 얻기 힘들다고요!”
“하아…. 차수연 씨.”
잔뜩 신나 하던 차수연이 하태헌 한숨 한 번에 눈치를 보며 꼬리를 말았다.
“아, 아니… 그냥 제가 보기에는요……. 물론 결정은 태헌 씨 아이템이니까 태헌 씨가 해야죠…….”
“…….”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거 아냐?
검을 든 채 가만히 서서 한참을 고민하던 하태헌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내게 걸어왔다. 성큼성큼 걷는 모양새가 모델 뺨칠 만큼 멋있었다.
‘뭐지? 승낙하겠다는 건가?’
살짝 무서웠지만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만약 하태헌이 공격하려고 했다면 진작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하태헌은 주인공답게 정정당당한 싸움을 좋아하니,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은 대화하기 위함이다.
퍽!
“크윽!”
강한 힘이 왼쪽 얼굴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시야가 휙 돌아가고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바닥에 부딪혔다. 삐이- 날카로운 이명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고통이 몰려왔다.
“거래는 하겠다. 하지만 서비스 따위는 없어. 지금 이건 차수연 씨를 납치한 대가다.”
“하…….”
욱신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째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비릿함이 입 안 가득 퍼져 침과 함께 피를 뱉어 냈다. 다행히 찢어지기만 했을 뿐, 잇몸이나 이는 멀쩡했다. 하루가 멀다고 얻어맞던 시절을 떠올려 반사적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 덕분이었다.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던 하태헌은 몸을 돌려 차수연에게로 다가갔다. 차수연의 묶인 손을 풀어 준 하태헌은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도 빼냈다. 목걸이 중앙에 박혀 있는 푸른 보석이 반짝이며 빛났다.
하태헌은 목걸이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린 후, 구두로 인정사정없이 짓밟았다. 파직, 목걸이가 뭉개지고 보석이 깨졌다.
“가시죠.”
“아…….”
처참하게 부서진 목걸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속이 매슥거리고 초조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음, 네…….”
목걸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차수연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태헌의 뒤를 따라갔다. 폐건물을 빠져나가는 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맞은 곳은 얼굴인데 온몸이 쑤셨다.
욱신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고 비틀거리며 목걸이 앞으로 걸어갔다. 지저분한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부서진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최대한 조심히 목걸이를 들어 올렸지만, 산산이 조각난 푸른 보석은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보석이 박혀 있던 목걸이 중앙이 횅하니 비었다.
뚜벅, 뚜벅.
멍하니 목걸이를 바라보는데 멀어졌던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니 정장 재킷은 벗어서 팔에 걸친, 흰 셔츠 차림의 하태헌이 서 있었다.
“……다시 오셨네요.”
나는 살짝 웃으며 목걸이를 손안에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