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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6)화 (6/394)
  • 6화

      

    “그쪽 계획은 잘 알겠는데…….”

    내 뒤를 따라오던 차수연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실패하면 어떡하려고?”

    “실패요?”

    “……태헌 씨가.”

    차수연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날 찾으러 오지 않을 수도 있잖아.”

    “음.”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글쎄요.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한데, 좀 낮아요. 한 10% 정도?”

    “뭐? 그럼 90% 확률로 태헌 씨가 와 준다는 거야?”

    “그렇죠.”

    나는 고개를 들고 시멘트 냄새가 나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철거가 중단된 폐건물은 황량했다. 이 폐건물은 소설에서 하태헌이 우연히 발견하는 곳으로, 여러 상황에서 유용하게 써먹는 장소였다. 예를 들면 뭐, 엑스트라 악역을 잡아다 심문한다든가.

    폐건물의 등장은 좀 더 나중이기 때문에 현재는 나만 알고 있다. 먼저 찜한 사람이 임자다.

    “……왜 그 정도로 확신해?”

    “예?”

    이리저리 폐건물을 둘러보던 나를 차수연이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솔직히 나는 태헌 씨랑 그렇게 친하지 않아.”

    차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볼을 붉혔다.

    “물론 난 태헌 씨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사람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고.”

    “…….”

    “실제로 마주친 적도 두 번밖에 없어. 협조는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태헌 씨는…….”

    “올 거예요.”

    차수연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소설을 보지 않았다면 이런 계획은 절대 세우지 않았을 거니까.

    “만약 오지 않는다고 해도 차수연 씨에게 피해 갈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분풀이로 절 때리셔도 되고. 어차피 납치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하려면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필요하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하태헌 씨를 믿거든요. 반드시 올 거라고.”

    일부러 단호하게 대답했다. 차수연이 흔들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나는 차수연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하태헌을 믿어 보세요. 그 사람이 위험에 빠진 차수연 씨를 외면할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절대 아니에요.”

    “…….”

    “그리고 하태헌은 이미 차수연 씨를 아무 대가 없이 구해 줬잖아요? 하태헌은 그런 사람입니다.”

    차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짝 입을 벌린 채 넋 나간 얼굴로 날 바라보던 차수연은 이내 귀를 빨갛게 물들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 묘한 반응에 나는 의아해졌지만, 굳이 짚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알겠어.”

    차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돼?”

    “하태헌한테 전화해 주세요. 전화를 받으면 도와달라고 말하고. 겁먹은 척 연기해 주면 좋긴 한데… 그냥 말만 잘 해 줘도 충분해요.”

    “알겠어.”

    차수연이 걸치고 있던 전투용 가죽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루루- 뚜루루루-

    통화연결음이 길어지자 차수연이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20초가 다 되어 가도록 하태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 설마 벌써 회의에 들어간 건가?

    달칵.

    [예. 하태헌입니다.]

    불안해지던 찰나, 겨우 통화가 연결됐다. 살짝 낮으면서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어 보는 주인공의 목소리에 심장이 잠깐 떨렸다. 목소리 좋네.

    “여, 여보세요?”

    [차수연 씨?]

    차수연이 보기보다 더 심하게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차수연을 향해 걱정하지 말고 저지르라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차수연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도, 도…….”

    [예?]

    “도와, 도와주세요, 태헌 씨…!”

    거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좋았어. 얼굴이 잔뜩 붉어진 차수연에게 고생했다는 의미를 담아 웃어 주며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차수연 씨?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러운 차수연의 도움 요청에 놀랐는지 하태헌의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아졌다.

    [차수연 씨!]

    “안녕하세요.”

    나는 웃음기를 숨기지 않으며 하태헌에게 인사했다.

    차수연 대신 내 목소리를 들은 하태헌이 잠깐의 텀을 가진 후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훨씬 낮고 거칠었다.

    [……그쪽은 누구지.]

    “궁금하면 지금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차수연 씨는 제가 잘 데리고 있습니다.”

    [차수연 씨 당장 바꿔.]

    “그건 좀……. 지금 차수연 씨 상태가 별로라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바꾸라는 하태헌의 말에 차수연이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휙휙 저었기 때문이다.

    [당장 바꾸지 않는다면 후회할 텐데.]

    나는 다시 한번 차수연을 바라봤다. 차수연은 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히 받기 싫은 모양이다. 하긴, 납치당한 연기가 쉬운 건 아니지.

    “아니… 진짜로 받을 상태가 아닌데요.”

    나는 조금 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하……. 어디지?]

    “예?”

    [거기가 어디냐고.]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에 나도 모르게 되묻자 하태헌이 짜증을 냈다.

    헉, 오려나 봐. 성공이야! 비록 하태헌이 좀 빡쳐 보였지만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더스카이 레스토랑 아시죠? 그 레스토랑을 지나쳐서 오다 보면 폐건물이 하나 있을 겁니다. 거기로 오세요. 시간은… 넉넉하게 50분 드리죠. 늦으면 얄짤 없습니다?”

    […….]

    “설마 이러고 안 오는 거 아니죠? 차수연 씨를 생각해서라도 오시는 게.”

    뚝.

    말하는 와중에 통화가 끊겼다. 참으로 냉정한 사내 같으니. 역시 주인공은 도도하구나. 나는 액정이 꺼진 핸드폰을 차수연에게 돌려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봐요. 온다고 했죠?”

    “온다고 한마디도 안 했잖아.”

    “위치 물어봤잖아요. 그럼 오지 않겠어요?”

    차수연이 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너무하네.

    그러나 차수연의 불안함과 다르게 나는 이번 통화로 오히려 100% 확신을 얻어 낸 참이다. 이유인즉슨, 하태헌의 태도가 소설과 완벽하게 똑같기 때문이었다. 사실 초반 부분은 기억이 희미해서 하태헌이 차수연을 구하러 온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통화하다 보니 몇몇 대사가 추가로 떠올랐다.

    ‘통화할 때 했던 말과 소설 속 대사가 일치해.’

    소설에서도 한이결과 하태헌은 통화한다. 물론 상황은 판이하다.

    본래 한이결은 차수연을 납치하기 위해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친다. 나보다 능력을 훨씬 능숙하게 다루는 한이결은 차수연을 이긴 후, 다친 그녀를 인적 드문 곳으로 끌고 간다. 그 장소는 폐교한 어느 초등학교 옥상이다.

    그곳에서 한이결은 차수연의 핸드폰을 빼앗아 하태헌에게 전화를 건다. 그때 그 둘의 대화는.

    ‘당신이 하태헌 맞나요?’

    ‘……그쪽은 누구지.’

    ‘이 여자를 구하고 싶다면 제가 말하는 장소로 오세요.’

    ‘차수연 씨 당장 바꿔.’

    ‘그건 안 돼요.’

    ‘당장 바꾸지 않는다면 후회할 텐데.’

    ‘오지 않는다면 이 여자는 죽어요.’

    ‘하……. 어디지?’

    ‘오실 건가요?’

    ‘거기가 어디냐고.’

    이후 한이결은 득달같이 달려온 하태헌에게 반항 한번 못해 보고 얻어맞은 다음, 옥상 아래로 떨어진다. 만약을 대비해서 끝까지 아껴 둔 능력 한 줌을 사용해 바람으로 몸을 감싸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내가 차수연의 납치 장소를 학교 옥상으로 선정하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소설 속이 맞네.’

    지나치게 현실적이라서 잠깐 잊고 있었다. 나는 괜히 뒷머리를 쓸며 입을 열었다.

    “차수연 씨.”

    어찌 됐든 내 계획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지금은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없다.

    “지금부터가 중요한데요. 사실 저야 하태헌이 오기만 해도 성공하는 거지만, 차수연 씨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 그런가?”

    차수연은 아까부터 정신이 딴 데 팔린 것처럼 허둥거렸다. 왜 저런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하태헌이 눈치가 좀 빠릅니까? 제가 차수연 씨를 납치한 줄 알고 있을 텐데, 차수연 씨가 너무 멀쩡하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잖아요.”

    “확실히…….”

    “전 뭐. 하태헌한테 납치범으로 찍혀도 상관없지만… 하태헌이 저와 차수연 씨를 공범으로 오해하면.”

    여기까지 말하던 나는 잠깐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오해는 아니지 않나?

    “뭐? 안 돼!”

    차수연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겠지. 나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두 개 꺼내 차수연에게 보여 줬다.

    “이게 뭐야?”

    “보면 모릅니까? 목걸이와 손수건이죠.”

    “누가 모른대? 이걸 왜?”

    설명하기에 앞서 우선 목걸이를 들고 차수연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내 접근에 차수연은 놀랐는지 몸을 움찔 떨었지만, 의외로 도망치지 않고 날 바라봤다. 덕분에 별다른 분란 없이 차수연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줄 수 있었다.

    “뭐, 뭐야?”

    차수연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목걸이를 매만졌다.

    “제가 그냥 우연히 갖고 있던 목걸이입니다. 그걸 좀 이용해 보죠.”

    “어떻게?”

    목걸이는 푸른 보석이 박힌 다소 유치한 생김새의 평범한 액세서리였다.

    “착용한 자의 기를 막아 주는 아이템, 아십니까?”

    “알아. 셔터(shutter) 말하는 거 맞지?”

    “네. 지금부터 그 목걸이는 셔터 아이템인 겁니다. 제게 속아서 착용한 척하세요.”

    “아…….”

    차수연이 또다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슬슬 왜 저러나 궁금했지만 물어보기에는 귀찮았다.

    “그리고 이 손수건으로 차수연 씨 손을 뒤에서 묶을 겁니다. 이왕 하는 거 꽤 강하게 묶을 건데, 어차피 진짜로 능력을 막아 둔 건 아니니까 위험시에는 태우세요.”

    “으응.”

    “그 뒤에는 그냥 바닥에 앉아 계시면 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차수연이 반사적으로 회색빛 시멘트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얼굴을 와락 구겼다.

    ……좀 더럽기는 하네.

    “…제 겉옷이라도 깔아 드려요?”

    “됐어. 납치당했는데 납치범 옷 깔고 앉아 있는 경우가 어딨어?”

    그렇다면야. 나는 차수연의 목에 걸린 목걸이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모든 상황이 대충 정리되면 그 목걸이는 발로 밟아 부수세요. 나중에 하태헌이 진짜 아이템인지 확인하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좀 아까운데.”

    “어차피 싸구려예요.”

    그렇게 대답한 나는 억지로 목걸이에서 시선을 돌렸다.

    저 목걸이는 한이결이 동생에게 주려고 샀던 선물이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시기에, 없는 돈 긁어모아 겨우 샀던 목걸이.

    ‘이제는 필요 없지.’

    한이결의 여동생은 죽었다. 그러므로 목걸이는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일 뿐이다.

    “자, 준비는 끝났으니.”

    나는 일부러 찜찜한 기분을 몰아내듯 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주인공을 맞이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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