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김우진을 떠올린 건 정말 우연이었다.
소설에서 김우진처럼 말하는 인물이 따로 없기도 했고, 일정 거리에서 쫓아오는 기척에 녀석이 가진 능력이 운 좋게 떠올랐다.
한이결의 몸으로 눈을 뜬 이후 김우진을 마주쳤을 때는 천사연을 만나러 갔을 때 말고는 없었다. 복도에서 내게 괜히 시비를 걸어 대던 김우진의 모습은 여러모로 인상 깊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천사연의 명령을 따르는 수행원 중에 미행에 적합한 능력을 갖춘 이는 김우진뿐이기도 하고. 소설에서도 몇 번 등장했는데, 대부분 주인공의 감시역이었다.
김우진이 가진 ‘존재감 흐리기’ 능력은 일반인보다 월등히 예민한 SS랭크 주인공도 긴가민가하며 제대로 잡아내지 못할 만큼 쓸 만한 능력이다.
나도 김우진의 능력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내 뒤를 따라오는 이가 평범한 일반인이라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따라오지 말라는 건 권유가 아니라 강제야. 한 번만 더 개새끼처럼 졸졸 따라와 봐. 협박으로 안 끝낼 거니까.”
김우진이 내게서 얻어 낸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면 이 협박도 소용없었으나, 녀석은 이미 내가 화재 현장을 도와주는 영상을 찍어 보낸 상태였다. 어차피 천사연이 내게 김우진을 붙인 이유는 갑자기 변한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명령받은 대로 나는 차수연을 납치할 것이고, 주인공은 그녀를 구하러 올 것이다. 계획이 틀어지지만 않는다면 천사연은 다시 내게 관심을 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어야 나도 편한데 말이지.’
쓸데없이 천사연의 시선을 받아 봤자 귀찮아지기만 한다. 나는 놈에게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고, 이제부터 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천사연에게 받는 관심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김우진이 있던 건물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G7 구역 게이트로 가 달라고 말하자 기사 아저씨가 반색하며 물었다.
“오! 혹시 청년도 능력자야? 그렇지 않아도 G7 구역이라면 그 뭐야, 홍염 어쩌고 처자가 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홍염의 여제’ 차수연 씨요. 같은 길드거든요.”
나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야~ 청년은 능력이 뭔데?”
“에이. 전 별거 없어요. 길드에서도 그냥 서류 처리 담당이에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기사 아저씨는 그러냐며 같이 웃어 주었다.
***
40분을 꼬박 달린 택시가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뉴스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파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서 차수연을 어떻게 꺼내지.
‘홍염의 여제’라 불리는 차수연은 제이나 길드 소속 A랭크 능력자다. 한이결이 바람을 다루듯 불을 다룰 수 있는 차수연은 그 강한 힘과 아름다운 외모로 많은 추종자를 끌어모은 대한민국 대표 능력자 중 한 명이다.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너머로 푸르게 빛나는 게이트를 바라봤다. 마치 은하수처럼 검은색과 짙은 푸른색이 마구잡이로 섞이며 반짝반짝 빛나는 타원형의 게이트. 저 너머에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번에 죽어 버릴 만큼 포악한 몬스터들이 잔뜩 널려 있다.
소설에 서술된 바로는, 게이트가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갑자기 등장한 게이트는 몬스터들을 뱉어 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렇게 게이트가 등장한 지 6개월 후,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둘 각성한다. 능력자가 된 이들은 팀을 꾸려 게이트 너머로 몬스터 토벌을 나섰고, 몬스터를 다 죽이는 일명 ‘클리어’를 해냈다.
게이트는 2개월에 한 번씩 클리어해야만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가 넘쳐 나오지 않았고 능력자들은 길드를 설립하여 게이트 관리에 나섰다.
흉포한 몬스터로부터 세계를 구해 낸 능력자들에게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능력만 된다면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한이결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웠다. 천사연 같은 놈한테 인생 저당 잡혀서 이게 뭐 하는 거냐고. 나였으면 진작에 능력도 인정받고 돈도 많이 벌어서 편하게 떵떵거리고 살았을 것이다. 아니, 꼭 몬스터를 잡지 않아도 한이결의 능력은 활용도가 높으니 어딜 가든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와아아!”
“홍염의 여제!”
“차수연 씨! 잠깐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이결의 인생을 한탄하고 있으려니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아무래도 차수연이 게이트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뒤에서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차수연에게로 다가갔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G7 구역 게이트는 방금 막 클리어됐습니다. 저와 함께 움직인 팀원 모두 무사하며, 게이트 내부도 별다른 문제 없었습니다.”
인터뷰에 응하는 차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수연은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능숙하게 인터뷰를 이끌어 갔다. 사람들 틈에 껴서 인터뷰를 듣던 나는 일단 인파를 헤치고 뒤로 빠져나왔다. 저 틈바구니에서는 차수연을 납치하기는커녕 말도 못 섞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차수연을 어떻게 꺼낼지 고민했다. 능력이라도 쓸까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역시 이럴 때는 이 방법뿐이지.’
일부러 시간을 들여 기다리고 있던 나는 인터뷰를 끝내고 인파 속에서 빠져나오는 차수연을 향해 곧바로 달려갔다.
“차수연 선배님!”
도로에 주차된 차에 올라타려던 차수연이 내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내가 보일 수 있는 가장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누구?”
“안녕하세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 저는 로헌 길드의 신입이에요.”
로헌 길드는 주인공의 소속 길드다. 내 말에 차수연도 자연스럽게 주인공을 떠올렸는지 반가운 얼굴을 했다.
“로헌 길드 신입? 혹시 능력자신가요?”
“네에. 차수연 선배님만큼 뛰어난 능력은 아니지만요. 제 이름은 한이결이라고 합니다.”
내가 수줍어하며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차수연은 흔쾌히 잡아 줬다.
“반가워요.”
“저도요! 제가 선배님 정말 좋아하거든요. 팬이에요. 아!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죠?”
“그럼요. 로헌 길드 소속이라고요? 로헌 길드가 이번에 능력자를 채용했던가……?”
“저는 길거리 캐스팅된 경우라서요.”
“아아.”
내 재빠른 수습에 다행히 차수연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까칠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순수하구나. 지금 내 모습은 그야말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근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죠?”
“다름 아니라…….”
나는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사실 전 선배님께 중요한 말을 전달하려고 왔습니다.”
“중요한 말이라면?”
“혹시 이후에 다른 일정이 있으신가요?”
속삭이듯 묻자, 차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착실하게 대답했다.
“아뇨, 없기는 해요.”
“다행이군요.”
내가 진심으로 안도하자 차수연의 눈동자에 강한 호기심이 일렁였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렇게 시간을 끄나 싶은 것이다. 이쯤 되면 충분하다고 느낀 나는 은근하게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그분’께서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다고, 제게 차수연 선배님을 모셔오라는 귀한 임무를 주셨답니다.”
“그분…….”
“네. 하태헌 선배님이요.”
이름을 들은 차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볼을 확 붉혔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양심이 좀 아프네.
“저, 정말? 태헌 씨가?”
“네. 정말이죠, 그럼.”
“근데 왜 메시지나 전화를 하지 않고…….”
나는 빙긋 웃었다.
“지금 회의 들어가셨거든요. 갑자기 잡힌 회의라 차수연 선배님 게이트 클리어 시간이랑 엇갈려서 급한 대로 절 보내셨어요. 회의 끝나고 나서 레스토랑으로 바로 오신대요.”
“그렇군요.”
차수연이 볼을 한층 더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로 좋아한다니. 옛날 옛적 남김없이 팔았다고 생각한 양심이 자꾸만 내 속을 뒤흔들었다. 상황만 된다면 지금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거짓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태헌. 그는 소설 ‘어비스’의 하나뿐인 주인공이다.
수많은 여성을 구해 주고, 그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잘난 남자. 얼굴 훤칠하지, 능력 좋지, 인성 완벽하지, 눈치 빠르지, 그야말로 다 가진 남자였다. 천사연은 얼굴이나 능력, 눈치는 완벽하지만 사람 됨됨이가 좀 부족하지 않나. 그에 비해 하태헌은 그야말로 주인공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제가 안내할게요.”
나는 냉큼 차 운전석에 올라타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얼떨결에 운전석을 뺏겼는데도 차수연은 별다른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출발하겠습니다.”
차수연의 안전벨트까지 꼼꼼히 챙긴 후 차를 출발시켰다. 힘들이지 않고 차수연을 납치하기 위해 꺼낸 거짓말이었고,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똑같은 행동을 하겠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