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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화 (2/394)

2화

  

방으로 돌아와 보니 깨진 유리잔이 정리되어 있고, 테이블에는 붕대와 약이 놓여 있었다. 능숙하게 다친 팔을 치료하고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내 처지를 객관적으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우선 천사연의 명령. 이건 진행해야 했다. 소설 속 진행을 따르지 않게 되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기도 하고, 지금은 천사연에게 대놓고 반항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몸이 고통을 느끼니 그럴 수도 없다. 천사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 보스기 때문에 만약 내가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가차 없이 굴릴 게 분명했다.

최소한 몸을 숨길 만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는 눈치를 보는 게 옳았다.

나는 펜을 움직였다.

「1. 몸의 통증이나 감각은 모두 정상으로 느껴진다. 죽음도 가능할 것 같음.

2. 뭐가 됐든 편하게 지내려면 지금은 사려야 한다.

3. 천사연에게서 벗어날 방도가 필요하다.」

여기까지 쓰고 펜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당장 내일 ‘홍염의 여제’를 찾아가서 납치해야 하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일단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칼이나 총은 잘 쓸 자신 있는데. 고작 그런 거로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자를 협박해서 납치할 수 있을 리가.

나는 텅 빈 손을 내려다봤다. 흉터가 가득하고 뼈가 울퉁불퉁 튀어나와 썩 보기 좋은 편은 아니었던 내 본래 손이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한이결의 손은 훨씬 작고, 하얗고, 가느다랗고… 그야말로 ‘섬섬옥수’에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 예쁜 손은 한이결의 능력인 바람을 보여 줄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바람을 손 하나로도 능숙하게 다루던데. 그렇게 한참을 손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보다 제풀에 지쳐 침대에 드러누웠다. 한 것도 없는데 피곤했다.

‘대체 뭐가 부족해서 저딴 놈 밑에 있던 거야.’

속으로 혀를 찼다. 고아로 자라며 살기 위해 처절하게 굴렀던 지난 생이 떠올랐다. 만약 자신이 바람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야 한이결도 처음에는 여동생 때문에 강제로 매여 있던 거지만.

……사실 그마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여동생 같은 건 평생 있어 본 적 없으므로.

찝찝한 생각들을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의식이 흐려지고 새까만 어둠이 덮쳤다.

***

“흐으윽… 으윽…….”

시야가 흔들린다. 얼굴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회색빛 거친 시멘트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은 더럽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저를… 곁에…….”

“끈질기군.”

가차 없이 말을 끊어 내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가웠다.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한이결.”

유려한 입술이 열렸다.

“난 분명히 말했어. 네 여동생을 핑계로 그동안 널 이용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동생은 죽었고 넌 쓸모가 없어.”

“…….”

“알아들었으면 다신 나타나지 마. 또 눈에 띄었다간…….”

말을 끝맺지 않고 그는 등을 돌린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훔쳐봤던 그 등이 멀어져 갔다.

“아, 안 돼……. 안 돼요, 저는…….”

당신마저 떠나면 어떡하라고. 나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라고.

가슴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손을 뻗어 보지만, 그의 옷자락조차 닿지 않았다.

“싫어, 제발요……. 제발, 데려가 주세요. 뭐든 할게요.”

“치워.”

“네.”

두 팔이 강한 힘에 붙잡힌다. 반사적으로 떨쳐 내기 위해 바람을 손끝에 모았지만, 끝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반항했다가 더 미움받을까 무서워서.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흐으, 헉, 아아… 제발 저를…….”

제발, 제발.

제발…….

***

눈이 번쩍 떠졌다.

“제발…….”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숙이자 이불 위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뜨거웠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손으로 얼굴을 훑었다. 축축하니 기분이 영 더러웠다.

“하, 천사연…… 개자식.”

그딴 자식 때문에 귀한 눈물을 흘리다니. 짜증스럽게 옷을 집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찬물로 샤워하고 나오니 정신이 좀 들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11시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목욕가운을 대충 걸치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갑자기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천사연이 한이결을 버리는 부분은 소설의 중반이다. 지금 상황과는 맞지 않는 꿈이었다.

“모르겠다.”

물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고민해 봤자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는 일단 넘기는 게 속 편하다. 다만 확인해 볼 부분은 있었다.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잠깐이지만, 꿈속에서 한이결이 능력을 쓰려던 순간이 있었다. 몸속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흐르는 기묘한 감각. 그걸 따라 해야 했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놀랍게도 심장에서 서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건 마치 연기 같기도 하고, 물 같기도 했다. 심장에 뭉쳐 일렁이던 기운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을 통해 손으로 기운이 흐르자 소설에서처럼 휘이잉,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고 손으로 물컵을 가리켰다. 그러자 물컵에 든 물이 회오리 모양으로 공중에 떠올랐다. 신기하면서도 너무나 쉬웠다.

‘꿈을 꾸지 않았다면 알아내기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좀 더 힘의 크기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호텔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홍염의 여제’도 납치해야 하고.

나는 점심을 위해 룸서비스를 시켰다. 천사연이 잡아 준 방이니 일부러 비싼 거로 팍팍 주문했다. 잘나가는 길드의 마스터니 이 정도는 개미 더듬이만큼도 안 되겠지만.

식사를 기다리며 TV를 켜니 뉴스가 나왔다. 세상 돌아가는 걸 알기 위해서는 뉴스가 제격이지. 흥미를 갖고 보던 나는, 이어지는 아나운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G7 구역 정찰을 나갔던 ‘홍염의 여제’ 차수연이 오늘 귀환합니다. G7 구역은 대부분 B 랭크 몬스터가 서식하지만, 그 범위가 워낙 넓어서 파악이 쉽지 않은 구역입니다. 오후 3시경 게이트로 빠져나올 거라 예상 중이며, 소속 길드는 현재…….]

아나운서 옆에 뜬 사진을 신중하게 바라봤다. 붉은 머리에 새침한 눈매, 살짝 올라간 입술을 가진 여자. 누가 남성향 소설 아니랄까 봐, 어마어마한 미인이다.

차수연이라. 확실히 소설에서 봤던 이름이다. 초반에 몇 번 나왔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등장하지 않았던 조연 중 한 명이었지. 성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은데…….

아나운서의 설명이 끝나자 화면이 전환되며 G7 구역 게이트에 나가 있는 기자가 현장 중계를 시작했다. 취재 온 기자들과 차수연 소속 길드원들로 게이트 앞은 꽤 북적거렸다. 저기서 차수연을 꺼내다 납치하라고? 미치겠네.

현장 중계가 끝나고 다음 뉴스로 넘어갈 때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비싼 값을 하는 음식들을 맛있게 먹은 나는 천사연 측에서 미리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고 지갑을 챙겼다.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G7 구역 게이트로 가 봐야겠다.

감시인이 한 명이라도 따라붙지 않을까 했는데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호텔 밖으로 나온 나는 뒷머리를 쓸었다.

여동생이 있으니 도망은 못 갈 거로 생각하나 본데. 뭐, 나야 편하다.

처음으로 마주한 이쪽 세상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라거나 괴수가 길거리를 돌아다닌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능력자는 천 명 중의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다고 나왔었지. 그마저도 랭크에 따라 능력도 천차만별이라, 몬스터가 서식 중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자는 정말 드물었다.

“난감하네.”

나는 괜히 손목을 매만지며 길을 걸었다.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세상이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이거 아무 곳에서나 능력을 썼다간 경찰에게 잡혀가겠는데.

어떡할까, 고민하는데 길 저편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불이야! 건물에 불이 났어!”

“…….”

이걸 기회라고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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