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화 (1/394)



1화

0. 프롤로그

‘어비스’는 발행한 지 10년도 더 지난 남성향 현대 판타지 소설이다. 어비스의 주인공은 여러 알바를 전전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청년인데, 어느 날 우연히 각성을 통해 능력을 얻게 되고 길드에 스카우트되면서 엄청난 먼치킨 캐릭터가 되어 버린다.

주인공에게 구해진 여자 중 비중 있는 인물만 해도 10명……. 모두가 하나같이 주인공에게 홀딱 반해 마음이고 몸이고 줘 버리는, 그야말로 남성 독자들을 노리고 써낸 작품이다.

어비스에는 초반부터 끝까지 주인공과 대립하는 등장인물이 있다. 주인공과 똑같은 SS랭크 능력자, 천사연이다. 이름이 하도 독특해서 기억에 남았다.

이름만 보면 여자 같은데 아쉽게도 남자다. 그것도 ‘천사’라는 단어랑은 쥐뿔도 어울리지 않는 성격을 가진 신체 건장한 사내. 외모 하나는 번듯하지만 잔인한 성정에 독선적인 성격을 가진 놈이다. 정리하자면 주인공에게는 최대 천적이자 라이벌이었으며 스토리 진행 내내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다.

그런 천사연에게는 곁을 지키는 충견이 한 명 있다. 자존감이 낮으며 소심하고 멍청하지만, 능력만큼은 쓸 만해서 천사연이 종종 이용해 먹는 존재였다. 처음에는 천사연 손아귀에 있는 여동생을 돌려받기 위해서, 나중에는 천사연을 사랑해서 곁에 남아 있다가 끝내 그를 대신해서 죽는 비운의 캐릭터. 한이결.

“……시발.”

그리고 내가 그 한이결이 되었다.

1. 눈을 떠 보니

나는 고민했다.

대관절 여긴 어딘가.

휘황찬란한 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는 방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다 반사적으로 명치에 손을 올렸다.

“무슨…….”

침착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몸을 훑어봤다. 온몸을 가득 채웠던 흉터가 사라지고, 시야가 살짝 낮아져 있었다.

“이게 뭔 개 같은….”

흉터가 사라지고 키가 작아진 거야 둘째 치고, 내 소중한 근육이 보이지 않았다. 웃통을 깔 때마다 주변에서 ‘멋지십니다, 형님!’을 연발하게 만든 내 자랑스러운 복근이 온데간데없었다.

“헉.”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황급히 다리 가운데를 더듬어 봤다. 다행히 크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본래 내 몸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

신체를 다 둘러본 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일단 상황 파악을 해야 했다.

내 마지막 기억은 칼에 찔린 배를 부여잡고 허덕거리는 게 다였다. 아무리 풍전등화 같은 인생이라 해도 아끼던 동생의 배신으로 죽는 것은 좀 많이 쪽팔렸다. 녀석이 내 배에 칼을 꽂아 넣기 전에 죄송하다느니 어쩔 수 없다느니 개소리를 지껄였던 것도 같다.

‘그럼… 죽은 건가.’

배신당하는 거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많이 안 좋았다. 찔린 부위가 명치 근처였고, 갑작스러운 습격이라 남은 애들은 버티지 못했을 게 뻔했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뱉어 냈다.

살기 위해 악착같이 남들 밟고 올라와 버텼던 세월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린 건가.

‘……그럼 대체 이 몸은 뭐지?’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현실에 얼떨떨한 심정이 들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꿈이고, 나는 병원에 누워 있는 거 아닐까.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현실처럼 생생한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으니까. 적어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호텔 방 안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칼이나 가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유리컵 하나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유리컵은 산산이 조각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나중에 청소하려면 고생 좀 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솔직히 이 모든 게 현실보다는 꿈처럼 느껴졌다.

깨진 유리 조각 중 하나를 들고 팔목에 갖다 댔다. 새하얀 피부 위로 빨간 피가 몽글몽글 솟았다. 이 정도로는 정확하지 않아서, 나는 아예 팔목을 휙 그었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며 쓰라림이 밀려왔다.

“……아픈데?”

왜 아프지.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을 바라보다 고개를 드니, 거울에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 비쳤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단정하니 꽤 보기 좋았다. 하지만 피부가 너무 하얗고 몸이 가늘어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쯧쯧, 운동 좀 하지.

거울에 비친 얼굴이 일그러졌다. 꿈이고 뭐고, 이렇게 고통을 느낀다면 어쨌든 조심해야겠다. 한숨을 쉬며 피가 흐르는 팔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돌연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한이결! 그만 자고 일어나. 마스터가… 뭐야, 시발.”

쿵쾅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오던 남자가 날 보더니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웬 피야? 너 설마 자해한 거냐?”

“…….”

“방 꼬라지 하고는……. 어휴, 아주 가지가지 하네. 찐따 같은 놈이.”

눈앞에 상대가 뭐라고 지껄이든 대충 흘려들으며 머리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이래봬도 기억력 하나는 자신 있었다. 한이결. 왜 이렇게 익숙한 이름인가. 한이결, 한이결…….

“아.”

한참 동안 이름을 곱씹던 나는 신내림을 받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이결! 바로 어제 읽었던 소설책의 등장인물이었다. ‘어비스’에 등장한 인물 중 유일하게 사망한.

“아, 는 무슨 아. 언어도 퇴화했냐? 됐고, 빨리 나와. 마스터가 부른다니까.”

남자는 피가 흐르는 팔은 안중에도 없는지 나를 강제로 잡아끌었다. 방을 빠져나와 호텔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진짜? 진짜로? 이게 말이 돼? 단순히 다른 사람 몸에 들어온 게 아니라, 창작물 속으로 들어온 거라고?

게다가 하필이면 이런 놈으로?

‘잠깐.’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어비스가 어떤 소설인지 뒤늦게 상기했다. 어비스는 남성향 소설이다. 즉, 여성 캐릭터의 숫자가 남성 캐릭터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하마터면 주인공한테 꽂혀서 사랑을 외쳐 대는 여자가 될 뻔한 것이다.

‘시발……. 한이결 만세. 감사합니다.’

갑자기 한이결에 대한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다. 그래. 얼굴도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하고, 거시기도 멀쩡히 달려 있고, 무엇보다 남자다! 남자라고!

“들어가.”

나를 한이결 몸뚱이에 넣어 준 신 비슷한 상대를 향해 마음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리는데, 방까지 안내한 남자가 방문을 열며 날 거칠게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들어온 호텔 방은 내가 있던 방보다 배는 넓고 비싸 보였다.

“……팔에 그건 뭐지?”

멀뚱히 서서 방을 구경하는데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막 욕실을 나온 남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가운 사이로 커다란 상체가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니 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쓸어 넘기는 조각 같은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정말, 뛰어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관리하는 바에 틈만 나면 드나들던 인기 많은 배우 놈도 저 정도로 생기지는 않았는데.

은은한 조명에 따라 남자의 얼굴은 독실한 신자 같기도 하고, 음험한 살인마 같기도 했다.

넋 놓고 정신없이 얼굴을 보는 나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가 한마디 툭 던졌다.

“뽑아 버리기 전에 눈 깔지.”

“…….”

그 말에 나는 확신했다. 저 새끼가 바로 한이결을 쥐고 흔드는 그 천사연이라고.

“팔에 그건 뭐냐고 물었는데.”

천사연이 재차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답했다.

“신경 꺼.”

“…….”

내 말을 들은 천사연이 ‘이게 미쳤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게 아닌가. 최대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대답한 건데.

원작의 한이결이 워낙에 말이 없는 탓에 참고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본래 한이결은 천사연 앞에서 벌벌 떨며 고개나 간신히 끄덕이고, 주인공 앞에서 천사연이 시키는 대로 헛짓하다가 얻어맞는 게 다였다.

애당초 나는 소심한 청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내 주변에는 덩치 크고 호전적인 사내놈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이결처럼 한 떨기 꽃 같은 청년은 살면서 만나 본 경험이 없었다.

“듣자 하니 ‘홍염의 여제’가 내일 오후 중에 G7 구역을 클리어하고 게이트로 나온다는군.”

홍염의 여제래. 별명하고는……. 소설 어비스는 10년 전 작품이기 때문에 작명이 다소 유치했다.

“바람은 불을 상대하기에 꽤 쓸 만하지. 가서 붙잡아 놔. 로헌 길드 애송이한테 소식 들어가게 하고.”

홍염의 어쩌고가 누구지……. 멍하니 듣던 나는 이어지는 명령에 자연스럽게 소설 내용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초반, 주인공이 납치당한 여자를 구해 주는 내용인 것 같다. 천사연이 말한 홍염의 여제가 납치할 대상이겠고, 로헌 길드의 애송이는 주인공을 뜻하는 거겠지.

이때 한이결이 어떻게 되더라. 주인공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던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홍염의 여제가 누군지 모르겠다…….’

등장하는 여자가 너무 많아서 헷갈렸다. 아까는 기억력에 자신이 넘쳤는데 지금은 푸시식 수그러들었다. 창밖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낸 천사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지?”

천사연에게 홍염의 여제가 누군지 물어볼까 했지만 그만뒀다. 최종 보스나 다름없는 천사연에게 대거리하기에는 아직 내가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지금은 얌전히 물러서는 게 이득이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또 미친 거 아니냐는 시선을 받을 것 같아서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등 뒤로 허, 하고 어이없는 한숨이 들렸지만, 신경 쓸 만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대로 방을 나왔다. 복도로 나오니 날 안내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놈은 날 보더니 픽 비웃었다.

“오늘은 웬일로 멀쩡하네? 맨날 질질 짜면서 나오더니.”

밑도 끝도 없는 유치한 도발이었다. 내가 보기에 한이결은 성격도 그렇지만 외모도 영 문제였다. 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은 무시당하기도 쉬웠다. 예전 내 얼굴이었으면 이런 철없는 놈들은 함부로 말도 못 걸었을 텐데.

눈썹만 쓱 올리고는 그대로 녀석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뒤에서 시발 거리는 욕이 들려왔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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