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변화 (3)
“꼭 데려가야 하나요? 그냥 오늘은 하루 쉬면 안 되나요?”
우진이가 나를 보며 애처롭게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비를 쫄딱 맞은 동박새처럼 안쓰럽고 나뭇가지에 뿔이 걸린 사슴처럼 가여웠지만, 이번만큼은 꾹 참아야 했다.
나는 가슴이 따끔거리는 걸 견디며 우진이에게 말했다.
“안 돼요. 이건 연구소랑 가이드국의 관계를 위한 것이기도 해서 빠지면 안 된다고요. 팀장 위치에서 직접 이끌어 갈 우진 씨를 위해서도 빠지면 안 돼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우진이의 부탁을 거절했다.
정말 힘들었지만, 우진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연구소와의 협력 관계를 착실하게 구축하려면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는 건 피해야 했다.
연구소 사람들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무시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아프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다.
“그럼 우리 지금 연구소 가?”
방금 전까지 의료 센터에서 누워있다가 퇴원한 어린이가 밥을 먹다 말고 질문을 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밥 다 먹고 시간 되면 가야지. 오늘은 하루 종일 오빠랑 같이 있으니까 좋지?”
“응, 좋아! 맨날 맨날 이랬으면 좋겠어.”
차우린은 밥 먹던 숟가락을 꼭 쥔 채로 옆에 앉은 우진이를 껴안았다.
그냥 해 본 말인데, 진짜 좋다고 대답하면서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싱숭생숭했다.
-삐! 삐익!
가방 속에 넣어 놨던 괴수도 차우린의 목소리에 반응해서 울어 댔다.
하지만 여기는 의료 센터에 붙어 있는 식당이었기 때문에 괴수를 데려온 걸 들키면 곤란했다.
나는 괴수를 조용히 시킬 생각으로 가방을 흔들었다.
-뺙! 뺙! 삐우아!
가방 속의 괴수는 항의라도 하듯이 더 크게 울어 대면서 꿈틀댔다.
역효과만 났으니 괴수를 조용히 시킬 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하나! 아직 안 갔구나. 여기서 밥 먹어?”
하필이면 이 순간에 화영이가 나타났다.
“어? 어, 그냥 오후 일정도 있으니까 애 밥도 먹일 겸 여기로 왔지. 너도 이제 점심 먹는 거야?”
“오늘은 좀 여유로웠거든. 밥때를 제때 챙기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
화영이는 반가워하면서 내 옆에 앉았다. 그것도 괴수가 들어 있는 가방 바로 옆자리에 말이다.
‘얘 괴수 울음소리 들은 거 아니겠지?’
나는 지레 찔려서 이화영을 힐끔댔다.
아무래도 연차가 높게 쌓인 에스퍼일수록 신고 정신이 투철하니, 안심할 수 없었다.
우진이만 해도 나의 십년지기 친구 김상혁의 신고로 협회 가이드가 됐으니,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괴수가 조용히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가방을 식탁 밑으로 내렸다.
“안 그래도 괜찮아~ 조그만 어린이 가방인데 뭘. 우린이 가방이니? 희망의 어린이집? 여기 다니는 거야?”
“응, 내 거야. 어린이집 오빠랑 처음 간 날에 받았어요.”
화영이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우린이랑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우진이도 같이 끼어서 사이좋게 근황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우와, 그럼 우린이 이제 글자도 다 알아? 얼마 전까지 하나도 몰랐잖아. 대단하네~”
“나 이제 이름도 쓸 수 있어요. 내 이름이랑 오빠 이름이랑 하나 오빠 이름도 쓸 수 있어. 오빠랑 나는 ‘차, 우’까지 똑같아요. 뒤에 글자도 비슷하니까 조금만 바꾸면 돼.”
한글을 깨치게 돼서 신이 난 차우린은 자신이 쓸 수 있는 이름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긴, 우진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름이 쓰기 쉽게 생긴 글자들이긴 했다.
이제 막 이름 쓰는 법을 익힐 때, 우진이와 자신의 이름이 자음 하나 차이라는 걸 알고 나서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땐 정말 귀엽긴 했다.
나름 추억에 젖어 있는데, 차우린이 불필요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삐삐 이름도 쓸 수 있어요. 우리 집에 사는 사람 이름 다 쓸 수 있어.”
“응? 삐삐는 누군데?”
‘어떡하지? 사람이라고 둘러댈까? 그런데 사람 이름이 삐삐일 수가 없잖아. 애가 삐삐 롱스타킹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할까?’
나는 삐삐가 누구냐는 질문이 나오고 대화가 이어지기 바로 직전인 그 찰나의 시간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적당한 변명거리를 꺼내려고 했지만 나보다 차우린이 더 빨랐다.
“우리 집 강아지.”
“응? 집에 강아지가 있어? 어떻게?”
강아지는 인간만큼이나 멸종 위기종이었기 때문에 생태 보존소에 가는 게 아닌 이상, 요즘 세상에서 보기 힘들었다.
화영이가 이상하게 여기는 게 너무 당연했다.
“오빠랑 연구소 가서 받았어요. 내가 키워도 된다고 그랬어요.”
“그, 그러니? 되게 희한하다. 원래 생태보존소에서 개인한테 동물 맡기는 일 절대 안 하는데.”
생태 보존소는 개인이 데리고 있던 동물을 뺏어 가는 일은 많이 해도 분양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당황할 만도 했다. 아마 나였으면 진짜 연구소에서 강아지를 입양한 게 맞냐고 진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린이한테 매우 친절한 화영이는 애를 추궁하지 않았다.
어린이한테는 싱긋 웃어 준 화영이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진짜야? 생태 보존소에서 강아지 받아 왔어?”
어린이에게 따져 묻지 않고 옆자리의 친구에게 따져 물을 뿐이었다.
“음, 뭐. 생태 보존소는 아니고, 연구소에서 특이한 샘플 하나 받아 왔어.”
“아~ 그럼 그렇지. 생태 보존소에서 분양을 할 리가 없지. 그럼 강아지는 어느 연구소에서 받아 온 거야? 나도 데려올 수 있나?”
동물을 좋아하는 화영이가 눈을 빛내며 물어봤다.
이건 좀 위험하다. 대화를 몇 마디 더 주고받으면 연구소를 찾아내서 우리가 받아 온 것이 강아지가 아니라 괴수였다는 게 들통날 것이다.
‘어쩌지? 어떡하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는 중에, 화영이의 의료인 호출기가 울렸다.
“아, 다 먹지도 못했는데…… 난 이만 가 볼게.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밥 맛있게 먹어.”
화영이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식당을 나가 버렸다.
의료인 호출기가 사람을 살렸다.
***
“우린아, 괜찮아? 걸어갈 수 있겠어? 그냥 오빠한테 업혀도 되는데.”
“우응…… 그럼 업어 줘.”
차우린은 우진이의 성화에 마지못해 업혔다.
애 몸상태는 괜찮아 보이는데, 우진이는 안절부절못하며 동생이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모습조차 보기 힘들어했다.
마음이 여린 우진이는 동생이 이틀 내내 아팠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차우린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풀죽은 얼굴로 우진이에게 업혔다.
업힌 채로 우진이의 어깨를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차우린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
우진이는 키가 크기 때문에, 우진이와 함께 있는 차우린은 항상 인형처럼 보였지만 오늘따라 더 작게 느껴졌다.
조그마한 어린이가 기운 없이 말했다.
“오빠, 나 말 잘 들으니까 버리지 마.”
뜬금없는 충격적인 말에 우진이와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우뚝 멈춰 섰다.
“우린아, 어제부터 왜 그래? 우리가 널 왜 버려.”
나는 당황한 우진이를 위해 분위기를 풀어 주려고 노력했다.
내 노력에 보답하듯이, 차우린이 대답했다.
“내가 방해된다고, 맨날 말 안 듣고 울고 오빠를 힘들게 하면 오빠가 날 갖다 버릴 거라고 아저씨들이 그랬어.”
하지만 어린이가 꺼낸 답변은 너무나 무거웠다.
분위기도 더 무거워졌다.
그렇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잖아. 나는 곧바로 대화의 흐름을 바꿀 곳을 찾아냈다.
“아저씨들? 아저씨들은 언제 만났어? 오늘은 아저씨를 많이 만나 본 적은 없지 않아?”
에가협 사람들이 아무리 이상하다고 해도 보호자와 함께 있는 어린애에게 너를 버릴 거라는 막말을 퍼붓지는 않는다. 저번의 연구원 놈들도 우린이가 혼자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나온 거니까.
차우린은 에가협에 온 뒤로, 돌봐줄 어른과 항상 함께 있었고 못되게 구는 남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혼자 간 적이 없다.
그러니까 저 말은 분명히 바깥에서 지내던 시절에 들을 말일 것이다.
“어…… 옛날에 하나 오빠 없을 때 만났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대화의 주제를 바꿀 물꼬를 찾았으니 분위기를 바꾸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옛날에 나쁜 아저씨들을 만났구나. 지금 만났으면 오빠가 혼내줬을 텐데, 그렇지?”
“진짜? 지금은 아저씨들을 혼내줄 거야?”
“당연하지. 우린이한테 나쁜 말 하는데 가만 안 두지. 오빠가 혼쭐을 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너는 재밌게 놀고 뛰어다니면 돼, 알았지?”
나는 우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무룩했던 어린이의 눈빛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면 오빠도 아저씨 말 안 들어? 나 안 버려?”
“저번에 너 버린다고 한 아저씨도 오빠가 혼내줬잖아. 안 버린다니까.”
“그럼 내가 말 안 들어도 돼? 아파도 안 버려? 시끄럽게 해도?”
“너 절대로 안 버린다니까? 하지만 말은 잘 들어 주면 좋겠…….”
“미안해.”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우진이가 별안간 사과를 했다.
“오빠가 말 안 듣거나 시끄럽게 하면 버린다고 해서 미안해. 다 거짓말이었으니까……. 울어도 되고 말 안 들어도 되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프지 마.”
우진이는 울먹이면서 어린 동생에게 사과했다.
차우린과 나는 그런 우진이를 말없이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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