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변화 (2)
“오빠, 오빠! 이거 봐. 신기한 거 보여 줄게.”
차우린은 심하게 아프고 나더니, 더 활기가 넘쳤다.
보통은 아팠다가 막 회복되면 기운이 없지 않아?
그렇지만 차우린은 보통이 아닌지라, 야심한 시간이 되도록 기운이 남아돌았다.
그리고 그 넘치는 기운으로 우진이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오빠. 오빠? 이리 와 봐. 이거 봐 봐, 빨리.”
게다가 우진이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저렇게 매달리면서 재촉했다.
계속 놔두다가는 우진이가 피곤해서 쓰러지겠다.
나는 우진이를 위해 차우린에게 호응을 해 줬다.
“우와, 뭘까? 나한테도 보여 줘, 우린아.”
“난 하나 오빠 안 부르고 우리 오빠 불렀는데.”
얄망궂은 어린이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에이~ 섭섭하게 왜 그래~ 나도 신기한 거 보고 싶어 뭔데 그래?”
나는 차우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치대면서 은근슬쩍 우진이를 뒤로 뺐다.
하지만 우진이는 아직도 차우린과 놀아 줄 생각이었는지, 물러나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우진이는 싱긋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와, 신에게 간택되는 기분이 이런 느낌일까? 나를 보며 웃는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인간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완벽한 조형이었다.
우진이의 얼굴을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차우린이 방해했다.
“나 안아 줘.”
“방금은 너 따라오라며. 그런데 안아 줘?”
“나 안고 걸어가면 되잖아. 빨리 안아 줘.”
“알았어. 이제 됐어?”
“웅. 에헤헤.”
의료 센터에서부터 계속 우진이에게 매달리던 차우린은 또다시 우진이 품에 안겼다.
우진이는 지쳤을 텐데도 차우린이 해 달라는 대로 다 받아 줬다.
우진이의 희생 덕분에 차우린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오늘은 많이 아팠으니까 이런 호사를 누려도 괜찮겠지. 매일 이러면 버릇이 나빠져서 안 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진이에게 안겨서 기분이 좋아진 차우린은 나까지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 안은 차우린의 말대로 신기한 상황이었다.
누군가 제설기라도 켜 놓고 간 듯이 눈과 얼음의 천지였으니까 말이다.
‘내 방의 화장실이 왜 갑자기 냉동창고가 된 거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삐이이이!
새끼 괴수가 신난 듯이 크게 울면서 욕조 난간 위로 기어 올라왔다.
순간, 본능적으로 의심이 섰다.
‘이 꼬락서니를 만든 게 저놈인가?’
그리고 내 의심은 틀리지 않았다.
때마침 차우린이 증명해 줬다.
“삐삐 봐 봐. 엄청 신기한 거 한다.”
차우린은 우진이 품에서 내려오더니, 괴수에게로 다가갔다.
“삐삐야, 아까 했던 거 또 해 봐. 후 해 봐, 후~”
-삐, 삐. 후와악-
“으악, 저게 뭐야?!”
괴수는 입에서 새하얀 냉기를 토해 냈다.
괴수가 입김을 내뿜은 자리에는 성에와 얼음덩어리들이 남아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나는 괴수가 만들어 낸 눈과 얼음의 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밟으면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많은 양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욕실을 이렇게 성에 범벅으로 만들었으면 이 짓을 한참 동안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아, 언제부터 이랬어?”
“응? 뭐가?”
“삐삐랑 이거 한 거 말이야.”
“음~ 세 번?”
“세 번? 지금이 세 번째라고?”
“아니. 삐삐랑 이거 세 번 하고 오빠 부른 거야.”
나는 차우린의 얘길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고작 네 번 만에 욕실을 냉동 창고처럼 만들어 주는 화력은 아닌데.’
괴수가 동일한 화력으로 저 입김을 내뿜었다면 바닥에 발자국만 살짝 낼 수 있을 정도의 눈만 쌓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온 벽면이 하얗게 성에가 끼었고 천장에는 고드름까지 매달려 있었다.
고작 저런 입김 네 번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진짜 네 번 맞아? 너 숫자 배운 지 얼마 안 됐잖아. 40번을 착각한 거 아니야?”
“아니야! 나 안 틀렸어!”
“그럼 천장 고드름은 어떻게 만들었어? 방금 입김으론 닿지도 않을 거 같은데.”
“그건 삐삐가 더 크게 ‘후’ 해서 그래.”
“어떻게 했는데? 지금 보여 줘 봐.”
“삐삐, 후~ 해 봐! 크게 해 봐!”
차우린은 괴수를 향해 양팔을 크게 벌리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 차우린을 본 괴수는 즉각 반응했다.
-뺙! 뺙! 화아아악!
망할 괴수 놈이 차우린의 정면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못 할 엄청난 양의 냉기를 내뿜었다.
“헉, 우린아!”
나는 괴수가 입을 벌리는 순간에 뛰어들어, 차우린을 감싸 줬다.
냉기가 닿지 않는 곳으로 곧바로 대피했지만, 잠깐 동안 닿은 냉기로 인해 내 몸에는 성에가 가득 꼈다.
본능적으로 어린애가 무사할 리가 없다는 예감이 들어 다급하게 확인했다.
“차우린! 괜찮아?”
“웅…… 하나 오빠 왜 무섭게 말해? 오빠가 하라고 했잖아…….”
품에 안긴 차우린이 칭얼거렸다. 다행히 냉기에 다치진 않은 모양이다.
애를 안았던 내 팔이 하얗게 얼어붙었음에도 얼음 조각 하나 붙어 있지 않은 모습이 의아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애가 안 다쳤다는 게 중요하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우린아!”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온 우진이가 차우린을 세게 껴안았다.
“오빠 봐봐. 괜찮은 거야? 어디 아픈 곳 없어?”
나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 우진이는 차우린을 붙들고 요리조리 꼼꼼하게 살펴봤다.
애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우진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우린은 그런 우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까부터 오빠들 왜 그래?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줬잖아. 어땠어?”
“그래…… 오빠도 신기했어. 보여 줘서 고마워……. 늦었으니까 이만 자러 가자.”
우진이는 우린이를 안아 들면서 정수리에 입을 두어 차례 맞췄다.
동생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우진이는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애 금방 재우고 올게요. 같이 치워요.”
한여름 밤의 꿈처럼 몽환적이고 아지랑이처럼 눈을 돌리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준 우진이는 애를 안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봤다.
천장의 고드름은 부피가 두 배는 커진 것처럼 보였고 바닥에는 눈과 성에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벽면에 낀 성에도 두께가 어림잡아 2센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역시 상당한 화력이다.
‘연구팀에서 알면 좋아하겠네.’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삐이이
괴수 녀석이 욕조에서 내려와 내 발치에서 울어 댔다.
“너 언제부터 이런 걸 시작했어? 놔두면 자다가 방 다 얼려 버리는 거 아냐?”
나는 못 알아들을 걸 알면서도 괜히 괴수에게 투덜댔다.
-삐이?
그래도 자신에게 질문을 한다는 뉘앙스는 파악하는 모양인지 괴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좀 놔두면 말귀를 다 알아들을 놈인 듯했다.
“아냐, 됐어. 사람인 내가 관리해 주면 그만이지. 청소에 방해되니까 나가 있어.”
난 괴수의 머리를 만져, 비늘색을 바꾸고 괴수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화장실 문을 활짝 열었다.
눈치 빠른 녀석은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일도 저 녀석 때문에 일이 바빠질 듯싶었다.
***
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바빴다.
어제 괴수가 난리를 쳐놓은 화장실의 증거 사진과 영상을 정리하고 보고서를 써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욕실 청소하느라 취침 시간도 평소보다 늦었는데 보고서 때문에 기상 시간도 앞당겨야 하니, 살짝 정신없긴 했다.
그래도 조깅을 거를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우진이랑 지내면서 훈련 시간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내가 해야 할 일은 전부 시간 안에 무사히 끝났다.
이제 우진이랑 차우린을 깨울 시간이다.
그런데 차우린의 상태가 이상했다.
“흑, 흑…….”
‘뭐야, 얘 지금 자면서 우는 거야?’
당황한 나는 평소와 달리 차우린을 먼저 흔들어 깨웠다.
“우린아, 차우린! 왜 울어? 일어나 봐.”
“이잉…… 으아아앙!”
자던 애를 일으켜 세웠더니, 애가 대성통곡을 했다.
곤히 자던 우진이도 애 우는 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차, 차우린? 왜 그래? 왜 울어?”
우진이는 내 품에 있던 차우린을 데려가서 꼭 끌어안고 머리를 짚었다.
차우린은 자신의 이마를 짚은 우진이의 손을 만지며 울먹였다.
“오빠, 나 머리 아파…… 흑, 여기 아파.”
7살 어린애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자신의 이마를 짚은 오빠의 손을 꼭 쥐었다.
정말 안쓰럽고 가여운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일정이 많은 평일이다.
출근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결단은 내려야 했다.
“우린아, 얼마나 아파? 어린이집 못 갈 정도야?”
“흑, 힉, 웨엑-”
“우린아! 왜 그러는 거야? 배도 아파? 머리랑 배가 아픈 거야?”
“으애애앵!”
내 말에 대답하려는 듯이 벙긋거리던 차우린이 우진이 품에다 토를 하고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아무래도 오늘 수업은 못 하게 될 것 같다.
***
“어때? 이번엔 어디가 문제인 건지 나왔어?”
“흠, 아니. 그냥 편두통 같은데.”
“진짜야? 이틀 연속 편두통으로 이럴 수도 있어?”
“나도 이렇게 어린애가 편두통을 심하게 앓는다는 사례는 못 봐서. 일단 약 처방 해 줄 테니까 시간 되면 먹여.”
화영이는 처방전을 건네주고 병실에서 퇴장했다.
차우린은 침대에 누워서 우진이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우진이는 차우린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머리 안 아프지? 다 괜찮을 거야.”
“오빠…… 나 두고 가면 안 돼…….”
“오빠 너 두고 안 가. 그러니까 푹 자.”
“웅…….”
가만히 우진이의 손길을 받던 차우린은 졸려서 가물가물한지, 눈을 깜빡이다가 스르르 잠들었다.
적막해진 병실에는 어린아이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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