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향수
어두워진 거리에는 색색의 네온사인들이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들이 들어간 음식점도 화려한 간판이 달렸으며 내부에는 수많은 손님으로 득실거렸다.
음식점 안은 은은한 조명과 함께 신나는 비트의 오래된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차우진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를 뚫고 각자 음식과 대화를 즐기는 이런 자리가 생경했다.
강하나와 함께 다운타운의 음식점에 온 적은 몇 번 있긴 하지만, 어쩐지 그때와는 감흥이 달랐다.
자신의 처지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차우진은 자신과 함께 앉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오로지 자신을 쳐다보는 일행들의 시선에 스스로의 위치가 실감 났다.
그는 이제 강하나의 손님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그의 상사와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새삼스러움을 느끼는 그에게 차우린이 말했다.
“나 여기 앉을래.”
옆에 앉아 있던 어린 동생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이제 일곱 살이나 됐는데, 혼자 앉아야지.”
“나 오늘 오빠 기다리느라 힘들었어. 그러니까 여기 앉을래.”
차우진은 문득 가게의 벽과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식탁과 의자가 어린 동생에게 너무 높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동생이 안쓰럽게 느껴진 그는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그래. 오늘은 그렇게 해.”
“에헤헤.”
차우린은 실없이 웃으며 오빠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차우린이 옆에 벗어 둔 가방이 꿈틀대며 소리가 났다.
-삐이이…….
“아, 삐삐! 오빠, 삐삐 꺼내 줘도 돼?”
“안 돼. 절대 안 되니까, 가방에는 눈도 돌리지 마. 밥 먹는 동안은 괴수랑 안녕이야, 알겠지?”
강하나가 갑자기 끼어들어 차우린을 만류했다.
하고 싶은 일이 막히자, 기분이 상한 차우린이 투덜댔다.
“하나 오빠한테 안 물어봤어. 우리 오빠한테 물어본 거야. 오빠, 삐삐 꺼내도 돼?”
“오빠도 삐삐는 안 꺼냈으면 좋겠어. 원래 데려오면 안 되거든.”
“음식 나왔습니다.”
동생이 투덜거릴 타이밍에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우린이가 좋아하는 감자튀김 나왔네. 여기 덜어 줄게.”
차우진은 음식으로 동생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기 새처럼 오빠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던 동생은 아직도 가방을 보고 있었다.
입 안의 감자튀김을 다 삼킨 차우린이 물었다.
“삐삐한테도 이거 줘도 돼?”
“어? 뭐, 그래…… 걔도 먹이긴 해야 하니까 네가 주면 되겠다.”
“삐삐야, 밥 줄게. 많이 먹어.”
차우린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방끈을 당겨서 품에 안았다.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를 배려하지 못한 거친 행동이었으나, 상대가 괴수인지라 동생을 나무라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동생은 괴수를 위해 감자튀김을 한 움큼 쥐고 가방 안에 넣고 있었다.
‘동생이 저렇게 좋아하며 돌봐주고 싶어 하는데 이왕이면 제대로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
결심이 선 차우진은 동생에게 말했다.
“가방을 그렇게 잡으면 많이 흔들려서 삐삐가 힘들어해. 흔들리지 않게 넓은 쪽을 잡고. 입에다 넣어 주려고 하지 말고, 삐삐가 직접 먹게 해줘. 응, 그렇게. 우린이 잘하네.”
한창 동생을 보는 그에게 김 국장이 말했다.
“이야, 차 팀장 엄청 자상하네.”
동생만 바라보고 있던 차우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아이고~ 애 보느라 밥도 못 먹고 힘들어서 어째? 아가, 이제 오빠 무릎에서 내려와라.”
“싫어요.”
“애가 보면 참 얄망궂어.”
“‘얄망궂어’가 뭐야?”
“응, 네가 오빠 힘들게 하면 듣는 말이야. 너 때문에 오빠가 아직 한 입도 못 먹었잖아. 우진 씨, 이거 드세요.”
강하나는 한입 크기로 썰어서 이쑤시개로 고정시켜 놓은 햄버거 조각이 가득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조몰락거리나 했더니, 쟤 주려고 한 거야?”
“조몰락거리다뇨? 물티슈로 손 깨끗하게 씻어서 나이프로 썬 거라고요! 위생적이니까 안심하고 드시면 돼요, 우진 씨. 아! 애를 안고 있어서 손 남는 게 없구나. '아' 하세요~”
강하나는 햄버거 조각을 직접 차우진의 입에 갖다 댔다.
차우진은 그런 강하나의 행동에 민망했지만, 음식을 집어 먹을 여유가 없던 것도 사실인지라 강하나가 주는 음식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김 국장이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금슬이 아주 좋네. 이거, 내가 빠져 줘야 하는 거 같다?”
“그러니까 그냥 보너스로 달랬잖아요. 왜 괜히 끼어서 분위기만 흐리고 그래요.”
“뭐, 인마? 나랑 차 팀장이 대화하는 자리인데 너희를 끼워 준 거야. 회식은 업무의 연장선인 거 몰라?”
“국장님은 어떻게 세상이 한번 무너졌는데도 그런 구닥다리 가치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는 거예요? 식사는 그냥 편하게 하자고요. 한잔 받으세요.”
“야, 이 자식아. 맥주 따를 때는 기울여야지.”
강하나는 민망한 대화를 능청스럽게 돌렸다.
차우진은 그런 강하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저 사람과 함께한다면 언제나 이런 평온한 일상이 가능한 걸까?
어린아이의 생각처럼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이었으나, 그와 함께 지내고 나서야 안락한 생활이 가능해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금까지 겪었던 불행이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화려한 불빛으로 물든 밤의 거리, 각자 두런거리며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편안함을 북돋아 주는 음악이 흐르는 공간.
얼마나 익숙하고 그리웠던 풍경이라, 괴수 때문에 세상이 망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거짓처럼 느껴졌다.
거리로 나가면 아직도 대중교통이 운행되고 있을 것만 같았고, 그를 타고 집으로 가면 살아 계신 부모님이 자신을 반겨 주실 것만 같았다.
차우진은 막연한 그리움에 잠겨,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그가 알고 있던 형태의 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낯선 저층 건물들이 빼곡한 낯선 거리를 보며, 김상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곳은 원래 광화문 광장이었다는 이야기를.
자신이 그리워했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은 자신처럼 괴수에게 처참하게 삶이 무너졌던 사람들이 다시 만들어 낸 다른 세계다.
지금 당장은 몸이 편안해서 없던 일처럼 느끼고 싶어도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오늘만 해도 그는 거대한 괴수와 싸웠다.
세상은 변했다.
7년을 넘게 싸워 왔던 현실을 이제 인정해야 했다.
과거의 세상은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남은 우리들이 과거의 영광을 다시 이룩할 뿐이다.
창밖을 보던 차우진은 품에 안겨 있는 어린 동생을 보았다.
그는 항상 동생에게 부채감을 느꼈다.
이 아이는 평생 괴수가 존재하지 않던 안락한 세상을 모르고 살겠지.
그 생각만 떠올리면 동생이 한없이 가여웠다.
차우진은 품 안의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동생도 그의 품에 몸을 파묻었다.
그런 그에게 강하나가 말했다.
“우진 씨,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 그래도 너무 안 먹으면 힘드니까 조금이라도 먹어요.”
강하나는 또다시 작게 자른 햄버거를 차우진의 입가에 갖다 댔다.
약간 민망해진 차우진은 급히 변명을 했다.
“아, 아뇨. 그냥 눈이 많이 와서요. 우린이가 추워할까 봐 걱정이네요.”
“아까 나올 때부터 계속 오긴 하네요. 그래도 잘 먹으면 안 추우니까요. 이거 드세요. 아~”
차우진은 강하나의 성화에 얌전히 음식을 받아먹었다.
창밖의 어두운 하늘에는 하얀 눈이 끝없이 내리고 있었다.
***
그는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눈밭을 걷고 있었다.
새하얀 눈송이들이 소복이 쌓여, 무너져서 철근이 드러난 흉물스러운 건물들마저 포근하게 덮어 주었다.
하얗게 뒤덮인 세상은 마치 아무런 참사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우아하고 평온했다.
차우진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설원을 홀로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돌을 쌓아올려 만든 계단에 눈이 두텁게 쌓여 있어 미끄러웠지만, 그는 차분히 한 계단씩 밟고 위를 향해 올라갔다.
눈앞에는 반쯤 무너진 오래된 성당이 고아한 모습으로 무심하게 서 있었다.
형태가 아직도 남아 있는 에메랄드빛의 높은 첨탑이 쌓인 눈과 함께 고즈넉하게 그를 반겼다.
어쩐지 오래된 노랫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차우진은 성당의 문 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나무로 만든 커다란 문은 사라진 지 한참 된 듯이, 성당의 입구는 뿌연 먼지가 쌓인 내부를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오른쪽 벽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지만, 차우진은 본래 문이 있던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벽이 무너졌어도 성당의 웅장한 내부는 여전했다.
높은 천장과 하얀 벽 사이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햇빛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명동성당이라 불리던 이 건물은 사람이 떠나가고 부서져도 여전히 경건함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련한 환청인 줄 알았던 노랫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성당의 제대 위에 놓인 축음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축음기가 만들어 낸 아련한 노랫소리가 부서진 성당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축음기의 나팔관에서는 가끔 아버지의 서재에서 들어 본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옛날 가요였다.
차우진은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축음기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축음기 덕분에 오랜만에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노래를 듣게 된 건 기꺼웠지만 이런 폐허에서 축음기가 작동하는 상황은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축음기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제단을 향해 이어진 일직선의 바닥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는 자박자박 걸어갔다.
그가 제단에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때 즈음, 제단 옆의 기둥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차우진 군. 군과 만나게 되어서 반갑네. 노래가 어떤가? 운치 있고 아름답지 않나? 옛날에는 이런 시적 감성을 많이 노래했는데 요즘에는 그러지 않아서 아쉽더군.”
멀끔한 행색의 중년 남자가 차우진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너져 가는 성당과 대조적으로 신발에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남자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차우진은 본능적으로 남자를 향한 경계심이 들었다.
그는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상황을 이미 예상했던 건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을 시작했다.
“뭐, 자네가 나를 경계해도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든다네.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길래, 고심해서 고른 노래이니 즐겁게 감상해 주면 좋겠군.”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얄궂게도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중년 남자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그렇지만 차우진의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나자,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재차 말하지만 난 자네가 마음에 든다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좀 더 즐거웠으면 좋겠군.”
남자는 완전히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도 뒤에 있는 차우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기어코 시야가 어두워지자, 차우진은 지레 놀라 숨을 들이켰다.
“허억.”
당황스러워 부릅뜬 눈에는 익숙한 천장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강하나의 방이었다.
자신이 꿈을 꿨다는 걸 깨달은 차우진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동생이 등을 돌린 채로 자고 있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강하나의 얼굴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새벽빛 속에서도 앳된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보였다.
아침이 오면 이 남자가 눈을 뜨고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반겨 줄 것이다.
차우진은 내일을 위해 눈을 감았다.
어쩐지 꿈속에서 들었던 오래된 노래의 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