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가이드 (19)
나는 추락하던 곽태원을 한 팔로 단단히 붙들고 벽에 매달렸다. 로프 덕분에 매달리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곽태원이 추락사하는 건 막아 냈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괴수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박치기를 하고 있었고 거기서 좀 더 여유가 생기면 꼬리까지 휘둘러 공격하려고 했다.
지금까지는 곽태원의 이능력으로 꼬리를 휘두르려는 상황을 막아 냈지만 이제는 그 방법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크윽-”
곽태원이 신음을 토해 냈다.
내가 붙잡았을 때 늑골이 부러진 건지, 자꾸만 갈비뼈 부근에 손을 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떨어져 죽는 것보단 늑골 골절이 나으니까 곽태원도 나를 원망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곽태원이 골절 때문에 이능력을 써야 하는 타이밍을 모른다면 큰 문제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세 사람 중에, 거대 지네가 꼬리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겁을 줄 수 있는 이능력을 가진 사람이 곽태원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겁을 준다기보단 사생결단으로 끝장내는 스타일이라 지금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
‘이대로 무력하게 버티느니 그냥 곽태원을 내 로프에 매달고 내가 괴수에게 뛰어드는 게 낫지 않을까? 두 사람의 안전은 보장하기 힘들겠지만 괴수를 처리할 수는 있을 텐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극단적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때마침 괴수가 거대한 꼬리를 위로 올려세우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허리춤의 로프를 풀어서 곽태원에게 매달았다.
그리고 벽에 발을 단단하게 딛고 다리에 힘을 줬다. 이능력을 추진력으로 사용하여 단숨에 괴수에게 들이받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발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탕-
저 멀리서 희미한 총성이 들렸다.
나는 곧장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회색빛 먹구름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하늘 아래 거대한 괴수의 모습만 보였다.
‘우리 팀에는 저격수가 없다시피 할 텐데, 내가 환청을 들었나?’
나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괴수를 향해 뛰어올랐다.
***
차우진은 조준경을 들여다보면서 혀를 찼다.
괴수의 머리 정 가운데를 맞추려고 했으나 놈이 움직이는 바람에 더듬이를 맞추고 만 것이다.
협회에서 만든 특수탄환답게 구멍이 뚫린 거대한 더듬이는 곧 힘을 잃고 끊어졌다.
저 괴수의 외형은 지네에 가까워서, 괴수도 지네 특유의 외피를 두른 더듬이를 갖고 있었다.
탄환으로 그 더듬이를 끊어 냈으니 위력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괴수의 단단한 외피는 파괴할 수 있었다.
대부분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저 괴수도 머리를 쏘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차우진은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을 가다듬었다.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며 그의 사격 솜씨를 칭찬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 오가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차우진의 신경은 온통 조준경의 너머에 쏠려 있었다.
괴수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차우진은 괴수의 움직임 패턴을 머릿속으로 그려 냈다.
예상대로라면 곧 괴수의 머리 정중앙이 조준경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곧 그의 예상대로 괴수가 움직였다.
차우진은 방아쇠를 당겼지만 곧바로 후회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조준경 안으로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갈색의 부드러운 곱슬머리였다.
그것이 강하나임을 알아본 차우진은 사색이 되었다.
“하, 하나 씨!”
그는 조준경으로 그 처참한 광경을 볼 자신이 없어 뒤로 나동그라졌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부축해 주었다.
“차기 팀장님 괜찮으세요?”
“놀란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하나 에스퍼가 맞았으니까요.”
“맞아요. 상황 보세요. 무사해요.”
차우진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몸을 세웠다.
그리고 사람들의 재촉에 시선을 돌려 중계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에는 바닥에 엎어진 강하나와 괴수의 몸뚱어리가 있었다.
“하나 씨…….”
차우진은 마치 기어가듯이 화면 앞으로 겨우 이동했다.
드론 카메라로 조그맣게 잡힌 강하나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작아서 얼마나 크게 다친 건지 알 수 없었다.
강하나가 괴수의 더듬이처럼 절단 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그토록 강한 위력의 총에 맞았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차우진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술팀원에게 애원했다.
“카메라를, 좀 더 가까이에서 찍을 수는 없나요?”
그는 강하나가 어떤 상태인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기술팀원이 대답이 없자, 차우진은 다시 한번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많이 당황스러워 보였던 기술팀원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크흠! 원래 드론이 파손될까 봐 접근 촬영은 잘 안 하는데. 그래도 차기 팀장님이 부탁하시니까 특별히 해 드리는 거예요, 아시겠죠? 저 원래 이런 부탁 안 들어드립니다.”
그는 드론을 조작하여 더 가까이에서 상황을 촬영했다.
덕분에 차우진은 강하나의 상태를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입은 옷의 군데군데가 찢어지긴 했지만 피에 물든 곳이 없는 걸 봐서는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다.
차우진은 기술팀원에게 좀 더 부탁해서 강하나의 얼굴까지 확인했다.
비록 의식이 없고 흙먼지투성이였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과 아기자기한 이목구비의 아기천사 같은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되었다.
분명 괴수만 처리하면 건강한 모습으로 그와 다시 재회할 것이다.
차우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괴수를 조준했다.
***
분명 무언가 강력한 게 내 왼뺨을 강타했다.
진짜 아팠는데 금강불괴의 이능력 때문에 상처를 입지 않아서 정체를 모르겠다.
그것 때문에 괴수의 단단한 머리와 박치기까지 했지만 괴수와의 박치기보다도 정체불명의 그것이 더 아팠다.
아직도 환상통이 느껴져서 나는 괜히 생채기도 없는 뺨만 문질렀다.
아까 총소리 같은 걸 들었던 게 환청이 아니었나 보다.
우리 팀엔 저격수를 할 만한 사격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신무기 테스트하겠다고 장난치다가 나까지 쏜 거겠지.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일하는 중이니까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따지는 것이 좋겠지.’
내가 괴수보다 먼저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괴수와 다툼없이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말이다.
나는 괴수의 머리통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머리를 깨부수는 게 제일 확실하기 때문이다.
외피는 아직 안 때려 봤지만 엄니는 부숴 봤으니까 그거랑 비슷하게 힘을 주면 깨질 것이 분명하다.
괴수의 머리통에 도착한 나는 머리를 쉽게 깨부수기 위해 그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뭐라 해야 할까, 괴수에게 생기가 없었다.
고작 이빨이랑 눈알 몇 개 잃은 걸로 괴수가 생기를 잃었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괴수의 정수리 쪽으로 이동한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괴수의 머리통에 주먹만 한 관통상이 있던 것이다.
***
괴수의 숨통을 직접 끊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웠지만 어쨌든 임무는 끝났다.
나는 폐건물에 매달려 있는 팀원들이나 구해 주러 되돌아갔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너머로 해가 지고 있는지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데 멀리서 우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들렸다.
“하나 씨!”
나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진이가 나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다 무너진 시멘트 덩어리들을 헤치며 우진이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마침내 내가 서 있는 높은 지반까지 올라온 우진이가 정면으로 나를 바라봤다.
먹구름이 우진이의 뒤편에서 산산이 조각나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주황빛 하늘을 드러냈다.
그 아름다운 배경에 전혀 뒤지지 않는 외모의 우진이가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우진이의 표정은 분명 안도하고 기뻐하는 얼굴이 맞는데, 어쩐지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
신화 속의 역경을 이겨 낸 위대한 천사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어두운 먹구름의 하늘이 태양과 멀어지며 감청색으로 물들고, 아직 미련이 남은 태양이 황금빛의 지평선을 만들어 내며 우진이를 강조했다.
어두운 세상의 빛나는 위인의 형상을 한 우진이가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태양은 지고 있고 우진이가 나에게 다가올수록 세상은 어두워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진이는 내 앞에 있다.
나는 가까워진 우진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우진이도 나를 마주 안았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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