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 마이 히어로-73화 (73/81)

73. 가이드 (18)

우진이는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빨갛게 물든 우진이의 귓바퀴가 우진이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수줍음이 많은 우진이는 언제나 귀여웠지만, 이렇게 고개도 들기 힘들어하는 모습은 조금 가여워 보이기도 했다.

나는 우진이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우진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면서 다독이면 금방 진정하겠지?’

나는 우진이의 넓은 등에 손을 올렸다.

내 손이 닿자, 우진이가 움찔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마치 홍목련 같았다. 홍목련은 꽃잎의 겉면은 화려한 색이지만 속은 하얗다는 점이 여리고 순수한 우진이랑 많이 닮은 것 같다.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우진이의 눈가를 닦아 줬다. 새벽이슬 같은 물기가 내 손가락에 묻어났다.

“우진 씨, 울었어요?”

나는 추론한 결과를 그대로 우진이에게 물었다.

“……아, 아니에요.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내 질문에 당황한 우진이가 내 손을 밀어냈다.

우진이가 나를 밀어내도 나는 우진이랑 떨어지기 싫었다. 나는 우진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우진이의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우진 씨. 저한테 화났어요? 제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미안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나는 붙잡은 우진이의 손을 내 볼에 비비며 우진이를 올려다봤다.

이젠 우진이 얼굴이 더욱 새빨간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거기서 더 빨개질 수도 있었구나. 그래도 여전히 귀엽고 잘생기긴 했지만, 의도했던 건 아니었는데.’

난 우진이가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옆에 앉은 거였는데 말이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진동도 무시하고 우진이에게 집중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야, 강하나! 구석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브리핑 오라는 연락도 안 받고.”

나를 찾아온 건 천유하 씨만큼이나 오랜만에 보는 송주하였다. 아니, 얘는 대련 대회 때 만났으니까 그 정도는 아닌가?

아무튼, 송주하 덕분에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스마트워치로 브리핑에 참석하라는 메시지가 울리고 있었다.

***

나는 주하와 우진이와 함께 야외에 설치된 간이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우리 대괴수 섬멸팀의 김희원 팀장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우릴 노려봤다.

눈은 하나밖에 없지만, 눈빛은 남들의 세 배로 강렬했다.

나는 괜스레 찔끔해서 우진이를 데리고 구석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팀장님은 그런 나를 막았다.

“탐색 조원 강하나 에스퍼. 일행과 함께 이쪽으로 와라.”

남들 눈에 안 띄려고 했건만, 팀장님은 나랑 우진이를 콕 집어 앞으로 불러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쪽 자리로 이동했다.

곧바로 자리에 앉으려고 했으나, 팀장님은 그것조차 막아 냈다.

“자랑스러운 대괴수 섬멸팀 여러분! 우리는 항상 최전선에서 인류를 지켜 내는 위대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인류를 지켜 내기 위해 협회의 요청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으며 오늘은 협회의 요청으로 새로운 임시 인력이 들어왔다. 다들 환영해 주도록.”

팀장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우레와도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우진이는 내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자신을 향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쩐지 오늘의 우진이는 여러모로 지쳐 보였다.

이제 막 임무 시작인데 말이다.

***

이번에 출현한 괴수는 몸통 길이가 500m는 족히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지네였다.

출현한 위치도 상당히 나빴다. 거주 구역의 D 관제소에서 겨우 500m 떨어진 지점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진이가 최근에 안 좋은 일을 겪은 장소와 가까워서 더 기분 나빴다.

더군다나 베이스캠프는 저번에 우진이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던 지하 철도 근처였다.

이러다가 우진이한테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당장이라도 우진이 곁에만 붙어 있고 싶었지만, 임무 중이라 그럴 수 없다는 게 슬펐다.

나는 대기 지점에 서서 커다란 지네가 꿈틀거리는 모습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치익

<강하나. 듣고 있나?>

가슴팍의 하네스에 달린 무전기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곧바로 무전을 받았다.

“네. 탐색 조원 강하나. 듣고 있습니다.”

<타깃은 어떻지?>

“아직 이동은 없습니다만 고개는 협회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돌리는 건 가능하겠나?>

“시도해 보겠습니다. 지금 갈까요?”

나는 이번만큼은 팀장의 지시를 착실하게 기다렸다.

이번 괴수는 일반인 거주 구역이랑 너무 가까운 곳에 출현했기 때문에 자의적인 판단보다는 팀 전체의 신중한 판단하에 조심스럽게 진행되는 것이 좋았다.

거주 지역을 둘러싼 자기장 방어막이 있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은 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괴수가 너무 거대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았다.

물론 우리는 거주 구역을 지키는 것이 1순위이므로, 팀장님이나 송주하 같은 사이코 키네시스들은 괴수를 공격하는 것보다 거주 구역 근처에 방어막을 두르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괴수가 갑자기 돌변해서 거주 구역을 공격하는 경우의 수를 대비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도 방어막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방어막이 완성되면 곧바로 괴수의 관심을 끌면서 공격을 가할 것이다.

나는 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출발하도록.>

팀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는 다리 근육에 이능력을 사용했다.

다리 근육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힘을 사용해서 괴수를 향해 뛰어올랐다.

한겨울의 세찬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곧이어 괴수의 단단한 껍질 틈에 손이 닿았다.

괴수의 몸통에 매달리는 것에 성공한 나는 균형을 잡아 그 위로 올라섰다.

다리를 사용해서 기어 다니는 놈이다 보니 애벌레처럼 종파를 이용해 꿈틀대지 않아서 균형잡기 쉬웠다.

안정적으로 괴수 위에 올라탄 나는 괴수의 대가리를 향해 뛰어갔다.

그렇지만 막무가내로 괴수 대가리를 깨부술 생각은 아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수가 기다란 몸을 사용해서 얼마든지 거주 구역에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거주 지역과 멀어져야 해.’

나는 사명감을 품고 거주 구역과 반대쪽인 방향인 곳에서 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시커먼 몸통과 다르게 새빨간 대가리를 가진 괴수의 거대한 독니가 곧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은 거슬리는 사냥감 같은 느낌을 줘야 해. 금방 쫓아가면 잡을 수 있는 날파리 같은 존재처럼 보여야 한다.’

나는 내가 해내야 할 역할을 머릿속으로 암기하며 괴수의 독니에 달려들었다.

***

괴수의 독니에 매달린 나는 비명을 삼켰다.

내 얼굴만 한 수십 개의 눈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네는 얼굴의 맨 앞쪽에, 더듬이 바로 뒤에 눈이 달려 있지 않나? 그것도 시커멓고 구멍 몇 개 뻥뻥 뚫린 것 같은 눈이 말이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네에 대한 지식을 떠올리며 속으로 불평을 토해 냈다.

나는 흰자위에 시퍼런 눈동자가 훤히 보이는 수십 개의 눈알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농구공만 한 눈알들은 얼마나 열심히 나에게 집중했는지, 내 모든 움직임을 따라서 눈동자를 굴렸다.

‘와, 진짜 징그럽다.’

차라리 어딜 보는지 짐작할 수 없는 진짜 지네의 눈알이 보고 싶었다.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면 나에게 더 나은 조건이야. 나는 저놈이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게다가 저 괴수는 내 사소한 동작까지 눈으로 좇을 정도로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

목적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저놈이 날 쫓으려 할까? 역시 작은 상처 하나쯤은 입혀야 하겠지?’

나는 괴수가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제일 가까운 눈알을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

“와…… 성공했네요.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말이죠.”

“어그로는 확실히 잘 끌잖아. 천직이지.”

“그래도 괴수가 몸부림칠 때는 식겁했어요. 이쪽으로 피해 올까 봐. 저번엔 그렇게 사고 쳤잖아요.”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지. S급인 우리가 수습해야지.”

차우진은 베이스캠프에 남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멀어지고 있는 괴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가 남은 베이스캠프에는 비전투 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방어막을 유지하고 있다는 S급 염동력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D급 가이드인 차우진은 이곳의 팀장이라는 안대를 쓴 중년 여인의 지시에 따라, 비전투 인력으로 분류되어 캠프에 남았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괴수를 유인하러 간 강하나가 성공하길 바라면서 괴수만 쳐다볼 뿐이었다.

초고층 건물보다도 거대한 괴수가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차우진은 저번에 혼자서 괴수를 상대하던 강하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썹과 머리카락이 다 녹아내렸던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고, 아무에게도 보이기 싫어 다 썩어 가는 더러운 천 조각으로 얼굴을 가리던 모습이 다시 생각났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가여웠는지 스스로는 알고 있을까?

그때보다 몇 배나 큰 괴수와 상대하고 돌아오는 모습은 또 얼마나 엉망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자신은 전투를 위한 팀의 팀장이 될 거라고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모두가 강하나에게 감탄하고 있는 베이스캠프에서 차우진은 홀로 강하나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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