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연구원은 내밀었던 손을 내렸다.
나는 투지를 다지며 연구원을 주시했다. 싸움에서는 기선 제압이 중요하니까 빈틈을 보이면 바로 파고들 것이다.
보통 연구원들은 매우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지금은 우진이한테 못된 소리를 할 타이밍이다.
내 예상대로 연구원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막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겁줘서 미안하다, 꼬마야. 아저씨가 잘못했어.”
“엥? 뭐야, 웬일이야? 사과를 해? 네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속으로 해야 할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연구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이상해?”
“어, 좀 그런 편이지?”
“……넌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야, 협회원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의 연구원으로 보고 있지.’
이번에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데 성공했다.
그랬더니 연구원도 내게서 금방 눈을 돌렸다. 그는 마치 나한테 어떤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우진이를 보면서 굽실거렸다.
“애가 아주 똘똘하게 생긴 게 가이드님을 쏙 빼닮았네요. 그런데 일반인이면 가이드 시설에 못 들어갈 텐데 다운타운으로 이주하실 예정이신가요?”
“……?”
연구원의 기습적인 신상 털기에 우진이가 당황했다.
우진이는 마녀에게 말을 빼앗긴 인어공주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난처한 상황에서 당황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나는 우진이 손을 잡고 인파를 뚫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우진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차우린이 물었다.
“오빠, 우리 이사 가?”
“어, 이사? 갑자기 웬 이사야?”
“아까 그 아저씨가 ‘이주’랬잖아. 이사 가는 거 아니야?”
차우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우진이뿐만 아니라 나도 당황했다.
차우린 얘는 평소에는 어휘력이 부족하다가 하필 지금 말귀가 트인 거지?
나도 고개를 돌려 우진이를 봤다.
지금 우진이는 사정이 좋지 않아 나랑 같이 지내고 있지만, 여유가 생기면 거주 구역에 집을 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등급이 높으면 협회에서 막겠지만 우진이는 D급에다가 가이드 국장의 지지까지 받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했다.
이쯤 되니 나도 궁금해졌다.
“우진 씨, 나랑 안 살고 이사 갈 거예요?”
어느새 내가 우진이 코앞까지 다가갔는지, 서로 얼굴이 매우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우진이가 나랑 따로 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잖아. 난 아까 그 연구원 같은 남도 아니고 말이야.
우진이의 생각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좀 더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어쩐지 점점 얼굴이 붉어지던 우진이가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밀어냈다.
“……이건 너무, 너무 가깝잖아요.”
난 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우진이의 손바닥이 입까지 막아 버린 터라 대답할 수 없었다.
우진이는 길고 곧게 뻗은 팔로 날 쭉 밀어냈다. 미약한 힘이었지만 우진이가 원하니까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날 어느 정도 밀어낸 우진이가 드디어 손바닥을 떼어 줬다.
시야를 확보한 나는 오매불망 우진이만 바라봤다.
새하얀 대리석 조각상 같은 우진이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설산에 피어난 봄꽃처럼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섭리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점이 더 아름다웠다.
벚꽃잎 같은 입술이 열리며 우진이가 말했다.
“시,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니까 빨리 사육장으로 가죠.”
우진이는 나를 앞질러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귀 뒤까지 작약 꽃잎처럼 붉게 물든 걸 보니 쑥스러운 모양이다.
‘부끄러움 많은 것도 귀엽고 잘 빨개지는 것도 귀여워.’
나는 우진이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사육장으로 이동했다.
***
괴수 구레나룻 사육장 사람들은 오늘도 기운이 넘쳤다. 어제 평가와 회의 결과가 좋았나 보다.
하지만 그들도 차우린을 반겨 주지 않았다.
“어머, 웬 어린애야? 아~ 가이드님의 애구나. 똑 닮았네~ 금방 갈 거죠?”
“견학? 견학이요? 외부 일반인이? 그건…… 흠~”
“이제 안전성 테스트 통과했으니까 일반인 접촉도 가능하게 됐잖아. 기념으로 영광의 첫 일반인 접촉자 시켜주는 거 어때?”
“오~ 그거 괜찮다! 그러자! 들어가도 좋아요, 꼬마 손님~”
“…….”
재수 없는 연구원 놈들이 차우린을 실험용으로 쓰겠다고 코앞에서 밝혔지만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저런 사람들에게 차우린을 맡기느니, 함께 사육장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게 뻔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연구원들은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지, 차우린이 입을 수 있는 크기의 보호 장비를 준비해 줬다.
차우린 본인은 우진이와 나처럼 보호 장비를 입게 됐으니 마냥 신나 보였다.
“오빠, 오빠! 이거 봐! 내 거야!”
“그래그래. 입혀 줄게. 이리 와.”
“아니. 내가 할 거야.”
내가 옷을 입혀 주려고 다가갔더니 차우린은 그 짧은 다리로 열심히 도망쳤다.
하여간 이상한 곳에서만 자립심이 있어서는. 우진이도 처음 입을 때 내가 도와줬는데 네가 어떻게 혼자 입는다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차우린은 장비의 고정용 끈을 다 풀어 헤친 채로 뛰다가 끈을 밟고 넘어졌다.
“으아아앙! 아파-”
당연히 아프겠지. 여기 바닥은 만약을 대비해서 괴수의 공격을 최소한의 피해로 버틸 수 있게 만든 특수금속이니까. 화재 피해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카펫 하나 깔지 않았다.
그런 바닥에서 넘어졌으니 아프긴 엄청 아플 것이다.
“차우린, 너 괜찮아? 오빠 봐봐. 어디가 아파?”
“여기, 흑. 나 여기 아파.”
놀란 우진이가 곧바로 차우린을 살펴봤다.
나도 함께 다가가서 차우린을 살펴봤다.
차우린이 아프다고 주장하는 무릎은 까지지도 않았고 멍들지도 않았다.
‘얘 뭐지? 그냥 엄살인가?’
혹시 뼈를 다친 건가 싶어서 만져 보기까지 했지만 멀쩡했다. 알고 보면 애가 참 튼튼하다니까.
“우린이 너 하나도 안 다쳤네~ 씩씩한 어린이는 울지 않는 거야. 얼른 일어나.”
“아니야. 아파. 아프니까 오빠가 ‘호’ 해 줘야 돼.”
“그래그래. 해 줄게.”
“하나 오빠 말고! 우리 오빠가!”
투정 부리는 거 들어주려 했더니 차우린은 내 머리털을 당기면서 화를 냈다. 하여간 고집 세고 성질 나쁜 꼬맹이 같으니.
착하고 다정한 우진이는 차우린의 생떼를 들어줬다.
“자, 이제 안 아프지?”
“아니, 아프니까 안아 줘.”
“…….”
우진이와 나는 차우린의 뒤치다꺼리를 끝내고 마침내 사육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진이 품에 안겨서 사육장에 입장한 차우린은 들어오자마자 내려 달라고 난리를 쳤다.
자신의 두 발로 사육장 안에 선 차우린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오빠! 저기 이상한 거 있어!”
차우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당연하게도 괴수의 구레나룻이었다. 여긴 걔들의 집이니까.
괴수의 크기가 작아서 그런 건지 차우린은 겁내지도 않고 괴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끼이이이익?!
-끼이이이이!
그리고 놀라운 풍경이 벌어졌다.
우진이나 이한새 같이 커다란 성인 남성도 안 무서워했던 놈들이 차우린을 피해서 도망다녔다.
“어디 가? 같이 가!”
물론 차우린은 놈들이 도망간다고 기죽지 않았다.
아주 땅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괴수들을 쫓아갔기 때문에 사육장은 차우린과 괴수들의 발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때, 사육장 벽면에 달린 스피커가 울렸다.
[강하나 에스퍼, 차우진 가이드. 저 애 좀 말려 주세요. 미르나래들이 괴로워하잖아요!]
유리창 너머의 연구원들이 차우린을 말려 달라며 호소했지만 별로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차우린이 저렇게 혼자 뛰어다니며 힘을 빼 놔야 밤에 잘 자는데 저걸 왜 말려. 남한테 피해 주는 거도 아닌데 말이야.’
우진이랑 나는 연구원들을 무시하고 먹이통에 들어 있는 먹이나 바닥에 뿌렸다.
먹이통만 비우면 나갈 수 있으니, 적당히 끝내고 나가야지.
***
하루 종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한 차우린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밥을 먹다가 갑자기 우진이를 껴안고 웬일로 내 볼에 뽀뽀까지 했다.
좀 당황스럽다. 너 차우린 맞아? 아까 괴수 구레나룻이랑 바뀐 거 아니야? 알맹이가 바뀌었다든가, 변장한 구레나룻이라든가.
물론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직접 꺼내지는 않았다.
차우린이 기분 좋을 때 적당히 할 일 다 마치고 재우면 되는데, 굳이 심기를 거스를 필요도 없잖아.
하지만 우진이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차우린, 이제 일곱 살 됐으니까 이거 하자.”
우진이는 한글 공부 책을 가져와 내밀었다.
“음~ 나 오늘은 하기 싫은데~”
차우린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우진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우진이는 그 정도 거절에 물러나지 않았다.
“일곱 살 되면 한글 공부하기로 했잖아.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일곱 살은 바보야. 차우린 너 바보 하고 싶어?”
아…… 이 대화 패턴은 흐름이 안 좋다. 좀 더 진행되면 차우린이 울어서 다들 당황하기 딱 좋은 패턴이다.
나는 분위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린이가 한글 공부하면 오빠도 옆에서 같이 공부할 거야. 오빠랑 같이 공부하면 되겠다, 그렇지~?”
“오빠도 한글 공부해?”
“아니, 그럴 리가. 다른 공부하지.”
“그냥 오늘은 안 하면 안 돼? 안 하면 내가 보물 보여 줄게.”
‘얜 무슨 어린애가 툭하면 교섭을 하려고 해?’
하지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보물이 뭔데?”
“기다려 봐.”
차우린은 쪼르르 달려가더니 자신의 어린이집 가방을 들고 왔다.
저 어린이집 가방은 차우린의 패션 아이템으로 어린이집에 가지 않아도 꼭 들고 다니는 물건이다.
물론 오늘도 나랑 우진이한테 번갈아 맡기면서 하루 종일 들고 다녔다.
“내가 오늘 받은 거야. 봐봐.”
차우린은 다운타운에서 코코 가루를 밀매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 가방 안에는 새하얀 공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너 그 공은 어디서 났어?”
난 차우린의 가방에 손을 넣고 공을 꺼냈다.
그런데 공의 질감이 이상했다.
“이게 뭐지? 고무도 아니고 플라스틱도 아니고…… 어라?”
차우린의 가방에서 쑥 꺼내 본 공은 모양도 이상했다.
공은 한 20센티 크기의 타원이었다.
타원 형태의 공도 있나? 만져 보면 온기도 있는 것 같은데…….
아, 잠깐만. 이거 설마…….
“우린아……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사육장이야?”
“아까 날개 달린 강아지가 선물로 줬어.”
강아지가 뭔지 잘 모르는 차우린은 사육장에서 본 괴수를 강아지라 불렀다. 괜히 패닉을 일으키지 않도록 정정해 주지 않아서, 이 어린이는 괴수 구레나룻이 강아지라고 알고 있다.
아무튼, 차우린의 대답으로 확신이 섰다.
우리의 룸메이트는 사육장에서 괴수 알을 훔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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