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가이드 (12)
평소처럼 아침이 밝았다. 나는 오늘도 평소와 같이 5시에 일어나 조깅을 다녀오고 일과를 준비했다.
이제 차우린을 깨워서 어린이집에 보내면 아침에 할 일은 다 끝난다.
평소에는 우진이가 부스럭대면 차우린도 같이 일어나는 편인데, 어제 게임하면서 노느라 늦게 자서 그런지 차우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진이가 차우린을 더 재우기 위해 식당도 안 데려가고 아침을 포장해 왔건만 더 이상 놔두면 우리 모두 지각이다. 이제는 깨워야 했다.
우진이는 부드럽게 차우린을 깨웠다.
“우린아, 차우린. 이제 일어나야지.”
“우웅, 싫어…….”
“이제 일어나서 어린이집 가야지. 친구들이랑 같이 할리갈리 하고 싶다 그랬잖아.”
“아니야…… 나 안 가…….”
그리고 지옥이 시작됐다.
차우린은 어린이집을 안 가겠다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크게 울던지, 옆방 사는 사람들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나는 찾아온 이웃들을 적당히 쫓아내고 우진이에게 말했다.
“아침밥도 포장해 왔으니까 그냥 저대로 보낼까요? 갈아입을 옷도 따로 챙겨 주고요.”
지금 출발해도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차우린을 달랠 여유가 없다. 잠투정 부리던 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테니까 일단 보내 놓으면 될 것이다.
나는 차우린의 물건들을 챙기며 우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진이도 나랑 같이 나가야 하니까 생각이 비슷하겠지?
한참동안 차우린을 설득하고 있던 우진이가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어요. 그냥 같이 데리고 다니면 안 될까요?”
으잉? 그게 무슨 말이야? 기껏 어린이집 알아봐서 보내는데 데리고 다녀?
하지만 우진이가 하는 말이니까 그러기로 했다.
애를 어린이집에 안 보내기로 했더니 오히려 시간 여유가 생겼다.
우진이는 그 시간 동안 애를 달래고 먹이고 씻기고 입혔다.
우진이가 공들여서 달래 줬더니, 차우린은 아까까지 울고불고 난리 쳤던 애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시 쌩쌩해졌다.
“오빠, 오빠. 오늘도 총 빵야빵야 해? 언니 오빠는 언제 와?”
172호실로 온 차우린은 우진이의 바지춤을 붙잡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래도 안 우니까 된 거겠지.
나는 차우린에게 내 스마트워치를 쥐여 주면서 말했다.
“이제 오빠는 바빠서 너랑 못 놀아 주니까 이거 갖고 놀고 있어.”
“왜? 저번에는 안 그랬잖아.”
“그건 그때고 지금은 안 돼. 우진이 엄청 바빠. 못 놀아 주니까 어린이집 가라고 한 건데, 네가 안 갔잖아.”
나는 부드럽게 차우린을 타일렀다.
하지만 내 부드러운 어투에도 차우린은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또 대성통곡의 시간이 돌아왔군. 하지만 172호실은 넓고 방음 처리도 잘되어 있어서 괜찮다.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차우린에게 혼자 울기 좋은 위치를 알려 주려는데, 172호실의 문이 열렸다.
“선배, 우리 왔어요! 가이드님, 안녕하세요!”
“가이드님, 이제 완전 유명 인사 됐던데요?”
“맞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시끌벅적한 청소년들의 등장으로 차우린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차우린은 애들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전엔 한 번도 안 하던 아는 척을 시작했다.
“언니, 나도 왔어.”
“어? 우린이~ 오랜만이야. 너 유치원 다닌다며. 오늘은 안 갔어?”
“응. 가기 싫어.”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서 좋겠다.”
애들끼리여서 그런가 뭔가 대화 코드가 맞는 모양이었다. 차우린은 장하나에게 붙어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우진이를 훈련시켰다.
오늘이 신년 회의 다음 날이기 때문에 S급 애들은 여유가 있지만, 우진이는 아니다.
S급 애들 훈련에 대한 평가 결과는 이미 나왔지만, 우진이는 봄에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S급 애들에게 오늘은 그냥 우린이와 놀아 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나는 S급 애들의 훈련 평가 결과랑 회의 결과 자료를 보느라 바쁘지만, 애들은 바쁜 일이 다 끝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차우린은 심심하지 않았고 우진이도 열심히 훈련을 받으며 오전 일과가 지나갔다.
***
차우린은 오늘따라 아주 행복해 보였다.
하긴 아침부터 울어서 원하는 바를 이뤄 냈는데 기분 좋겠지.
연구소에 따로 차우린의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하는 나는 그냥 바빴지만 말이다.
차우린은 서류상으로는 협회원도 아니고 그냥 외부인이기 때문에 연구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김 국장에게 열심히 상황을 설명하며 차우린이 임시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줬다.
계급 깡패 국장의 힘으로 연구소에 들어온 차우린은 혼자 신이 나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오빠, 이거 봐봐. 엄청 이상하게 생겼어.”
“오빠, 저거 봐봐.”
“오빠, 오빠!”
게다가 자꾸 큰소리로 우진이를 불러 대는 통에 매우 난감했다.
‘우진이랑 나도 여기서 눈에 띄어 봤자 득을 보는 게 없는데 괜히 데려왔나?’
그냥 김상혁이나 아무나 불러서 차우린을 맡기고 올 걸 그랬다. 우진이도 지금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옆에서 우진이가 자꾸 불러 대는 차우린에게 대답했다.
“갈 테니까 뛰지 말고 거기서 기다려.”
우진이는 귀찮게 구는 차우린에게 단 한 번도 짜증을 안 내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줬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완벽할 수 있지? 생긴 것도 신의 예술 작품인데 성격까지 성전에 나올 만한 성인 같을 수도 있는 거야?
심지어 우진이는 차우린과 같이 다니는 게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정말 대단하다.
차우린과 함께 천진하게 웃는 우진이를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항상 사람을 날 세우게 만드는 연구소지만 가끔은 긴장을 풀어도 되지 않을까?
나도 우진이와 함께 차우린의 비위를 맞춰 주며 연구소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것저것 구경하며 돌아다니던 즐거움은 금방 무산되었다.
우리를 앞질러서 먼저 뛰어가던 차우린이 혼자서 연구소 직원들을 마주하게 됐기 때문이다.
한 20미터 떨어진 거리였지만 신체 강화 이능력자인 나한테는 무슨 말이 오가는지 들렸다.
“어머, 얘 그거 만지면 안 돼!”
“여기 웬 어린애가 있어?”
짜증 나는 연구소 직원들은 혼자 떨어진 차우린을 불청객 취급하며 괴롭혔다.
“꼬마야, 너 자꾸 어른들 귀찮게 하면 엄마 아빠가 너 버린다?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어른들 말 안 들으면 버려지는 거야~ 그러니까 그거 건드리지 말고 가라.”
“너 여기서 자꾸 얼쩡대면 괴수가 잡아간다.”
연구원 놈들은 점점 선을 넘었다.
차우린은 기어이 코앞에서 삿대질을 하며 협박하는 연구원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돌처럼 굳었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차우린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삿대질을 하던 연구원 놈에게 똑같이 삿대질을 하며 따졌다.
“야! 네가 뭔데 애를 버린다고 겁을 줘? 우리가 얘를 버리는 것보다 연구소가 널 버리는 게 빠를 거다, 이 새끼야!”
연구원 놈들은 다 일반인이면서 자기들이 괴수에게 먹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거 같더라? 나는 괴수가 잡아간다고 겁주던 놈한테도 삿대질을 하면서 화를 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모여들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구원들이 핀트가 엇나간 사람이 많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지능이 높은 집단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저쪽이 잘못한 걸 알겠지.
군중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정체도 모르는 어린애가 연구소를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야?”
“뭐야, 어떤 새끼야?!”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노려봤다.
먹구름 같은 머리털의 남자가 날 보고 쫄았는지, 어깨를 움찔했다. 그 옆에 있던 두꺼운 안경을 쓴 연구원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야, 그냥 조용히 해. 쟤 강하나잖아.”
“그래 봤자, 축(畜)인데 왜 우리가 눈치 봐야 하는 건데.”
“그 축한테 개죽음당한 피해자가 되고 싶으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든가.”
‘조그맣게 구시렁거리면 누가 못 듣는 줄 알아?’
열받았지만 당장은 참기로 했다. 연구원을 해치면 누구든 폐기 처분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건 한국지부에 11명뿐인 S급이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때리지만 않으면 되니까 마음껏 노려봤다.
한심한 연구원 놈들 사이를 헤치고 우진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하나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우진이는 오자마자 곧장 우린이를 건네받았다.
차우린은 우진이 품에 안기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앙! 오빠…… 저 아저씨가, 저 아저씨가 나 버린대…….”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곧 상황을 알게 된 우진이는 당연하게도 화가 났다.
누가 봐도 분노한 기색이었지만 우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린이만 다독였다.
주변은 우진이를 알아보는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 현장 가이드 팀장 된다던 사람 아니야?”
“맞네~ 왜 가이드 국장이 가이드를 잡일꾼으로 넣었나 했더니 그런 거였구나.”
“애가 딸린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우진이를 돌멩이처럼 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연구원이 가이드 팀장한테 굽실거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이가 틀어져도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린이에게 폭언을 했던 연구원도 우진이를 알아봤는지, 정중하게 나왔다.
“죄송합니다. 이런 세상이다 보니까, 어린아이한테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를 했군요.”
덩치 좋은 연구원이 두툼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우진이는 연구원이 내민 손을 잡지 않고 우린이의 등을 쓸어 주기만 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연구원을 보던 우진이가 말했다.
“저한테 잘못하신 게 아니니, 그 사과는 저보다는 당신이 부당하게 대한 제 동생한테 하셨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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