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 마이 히어로-66화 (66/81)

66. 가이드 (11)

땡-

탁상벨이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후훗, 내가 일등으로 눌렀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종을 쳤지만, 주변 분위기가 이상했다.

‘분명 나한테 기회를 뺏겼는데 왜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 거지?’

의아해진 나는 탁상용 벨 주위를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을 쳐다봤다.

다들 즐거운 얼굴이다.

“지금 치는 타이밍 아니었구요~ 주변에 카드 한 장씩 돌려.”

김상혁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신나 죽는 모습이 기분 나쁘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고 따졌다.

“내가 왜 카드를 돌려야 해? 똑같은 그림 나왔잖아! 뒤집어서 똑같은 거 나오면 종 치는 거 아니야?”

“어, 그런 거 아니야. 이게 화투냐? 똑같은 그림 찾기게?”

김상혁은 빈정대면서 내 카드를 받아 갔다. 아직도 규칙을 몰라서 맞받아치지 못하는 게 분했다.

그래도 나는 규칙을 착실하게 지켜서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한 장씩 내 카드를 나눠 줬다.

다 나눠 주니, 이제 딱 2장 남았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앞에 놓인 내 몫의 카드를 내려다봤다.

‘이거 카드를 다 잃으면 지는 게임이랬지.’

그런데 내 차례가 되자마자, 질 위기에 처했다.

아직 내 뒤에 네 명이나 더 남았는데 말이다.

“나! 이제 내가 할 거야!”

내 다음 차례였던 차우린이 신이 나서 외쳤다.

앞에 놓인 카드를 한 장 뒤집은 꼬맹이는 같은 그림이 하나도 안 나왔음에도 종을 울렸다.

땡-

‘뭐야? 대체 규칙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모르는 게임 규칙을 차우린은 알고 있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흠, 우린아.”

“웅?”

“지금 종 치는 거 아니야. 너도 하나 오빠처럼 카드 줘야 돼.”

아니네. 차우린도 나랑 다르지 않았다.

우진이가 차우린의 옆에 붙어서 사람들에게 카드를 나눠 줬다.

덕분에 내 카드가 한 장 늘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차우린은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우진이한테 짜증을 냈다.

“내 거잖아~! 왜 내 거 줬어. 다시 가져와!”

기어이 우진이를 때리기 시작하는 차우린한테 이한새가 말을 걸었다.

“규칙이잖아, 우린아~ 계속 때리면 오빠가 아파해요. 그만하자, 응?”

이한새가 옆에서 찝쩍거리자, 차우린은 이한새도 때리기 시작했다.

“이거 땡 하는 거라고 했잖아! 왜 내 거 가져가!”

“아, 아파! 얘 되게 손 맵네?! 나 좀 도와줘!”

차우린에게 얻어맞은 이한새는 우진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음씨가 비단결 같은 우진이는 물론 이한새를 도와줬다.

“차우린! 다른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내 거 가져갔잖아!”

우진이가 제법 엄하게 야단쳤지만, 차우린은 기죽지 않았다. 우진이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차우린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게임 규칙 제대로 안 가르쳐 줘서 미안해. 오빠가 하는 거 봐봐.”

마침 다음 차례였던 우진이가 차우린을 안은 채로 게임을 진행했다.

“네가 했던 거처럼 차례가 되면 이렇게 카드를 뒤집는 거야. 오빠가 뒤집은 카드에 뭐 그려져 있어?”

“사과.”

“저기 보면 다른 카드에도 그림이 보이잖아. 우린이 이제 숫자 셀 줄 알지? 사과가 몇 개 있어?”

“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잘했어, 우린이 똑똑하네. 사과가 여섯 개지. 그러면 종을 울리는 게 아니야.”

“그럼 언제 해?”

“그림이 다섯 개일 때만 누르는 거야. 다섯 개 아닌데 울리면 카드 줘야 하는 거야. 이게 규칙이야. 알았지?”

우진이는 조곤조곤하게 규칙을 설명해 주며 어린애를 달랬다. 우진이의 설명을 듣고 난 차우린은 얌전해졌다.

하긴 우진이의 적당히 낮고 부드러운 음색을 들으면 날뛰던 괴수도 얌전해질 것이다. 얼마나 감미로운지, 그냥 게임 규칙을 설명하는 것뿐인데도 마치 한 편의 시를 낭송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설명도 차분하게 잘해 주는 덕분에 차우린은 게임 규칙도 잘 이해했는지, 더 이상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우진이 덕분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 평화에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다.

“에이~ 우진 씨! 이걸 공개적으로 다 말해 버리면 어떡합니까~ 나름 관찰력 테스트였는데 말이죠. 하나도 다 알았잖아요.”

“……이건 게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가르쳐 줘야 했던 거잖아요.”

“가끔은 공정하지 않은 게임도 해 봐야 인생을 배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김상혁의 미친 소리에 우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깟 게임이 뭐 별거라고 어린애한테 규칙도 가르쳐 주기 싫어하는 거야.’

김상혁의 헛소리에 나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 공정하지 않은 게임을 원한다 이거지. 그런 거라면 내가 실컷 즐기게 만들어 주겠어.

***

김상혁이 카드를 뒤집자 레몬 그림이 드러났다. 개수도 딱 다섯 개다.

김상혁을 비롯한 대부분 사람이 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지만 모두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찰싹-

“아야!”

짝-

“악!”

짝!!

“으악!”

나는 종에 손을 뻗는 척하면서 종을 노리는 사람들의 손을 살짝 때렸다.

특히, 김상혁은 튼튼하니까 좀 세게 때렸다.

이렇게 아무도 종을 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사이에 대리석 조각품 같은 완벽한 조형의 손이 종을 울렸다.

땡-

우진이였다.

다들 나에게 맞은 손등을 맞고 아파하는 난장판 속에서도 우진이는 고고한 모습으로 카드를 챙겼다.

우진이가 매끄럽게 호수 위를 헤엄치는 백로 같은 자태로 승기를 쥐자, 주변에서 나에게 야유했다.

“야, 뭐 하는 거야! 페어플레이 몰라? 너 이거 반칙이야!”

“사람 말고 종을 치라고!”

물론 나는 고작 그런 항의에 당황하지 않는다.

“종 치려다가 실수 좀 했다고 야박하게 굴지 마.”

‘애초에 너희들이 먼저 시작한 불공정 싸움이잖아. 나는 당당해.’

나는 항의하는 애들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박해미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제 게임 규칙을 알았으니 질 리도 없다.

여기서 내 순발력과 속도를 따라올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

“악!”

“아 씨, 진짜 따갑네.”

“난 그냥 기권하련다. 안 해.”

나는 종을 칠 기회가 올 때마다 다른 애들을 막아 냈다.

네댓 번 막았더니 상황 파악이 빠른 승환이가 기권을 선언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김상혁은 아직도 나를 향해 씩씩거렸다.

“강또, 너 얍삽하게 굴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해! 우진 씨 이기게 해 주려고 이러는 게 정상이냐?!”

“안 될 건 또 뭐야? 너흰 나한테 규칙도 안 가르쳐 주고 시작했는데!”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김상혁과 실랑이하고 있는데, 누군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손뼉을 세 번 쳐서 우리를 집중시킨 이한새가 말을 꺼냈다.

“우리 서로 감정 상할 말 그만하고 그냥 우진이가 이긴 걸로 하고 게임 끝냅시다. 아주 철벽 수비라서 도저히 틈이 안나네요. 우진이 든든하겠다~”

“아니, 난 그럴 생각은…….”

“에이~ 그런 거치곤 꼬박꼬박 잘 가져가던걸. 어차피 네가 1등할 거, 좀 더 빨리 해.”

이한새는 민망해하는 우진이를 몰아세웠다. 쟤는 왜 우진이를 괴롭히고 난리야! 나는 우진이를 위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냥 우진이가 빨라서 내가 못 막은 건데 왜 그래요! 우진이는 아무 잘못 없어!”

“…….”

갑자기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 침묵을 뚫고 승환이가 말했다.

“뭐, 그래. 그런 걸로 하고. 나는 이만 갈게. 눈치 없이 괜히 와서 미안했다.”

“이한새, 우리도 가자.”

해미가 뒤이어, 이한새의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이한새는 박해미에게 끌려가면서도 태연한 척을 멈추지 않았다.

“난 이만 가 볼게, 우진아~ 내일 연구소에서 보자~ 오늘 즐거웠어요, 하나 씨. 다음에 또…….”

스슷-

하지만 박해미는 이한새가 인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2명이 사라졌다.

제일 먼저 가 보겠다고 말한 조승환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박해미는 인사도 안 하네. 아무튼, 오늘 나름 재밌었다. 상혁이 음식도 맛있었어.”

상식인인 승환이는 우리와 인사를 나누며 기분 좋게 헤어졌다.

A급 에스퍼인 승환이는 한 층 위인 12층에 산다. 11층은 B급 에스퍼 거주 구역이지만, 12층부터 건물의 마지막 층인 15층은 A급 에스퍼가 거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승환이는 혼자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제 남은 손님은 김상혁뿐이었다.

나랑 우진이, 그리고 차우린까지 모두 김상혁을 쳐다봤다.

‘얘는 안 가나?’

우리의 시선을 느낀 김상혁은 멋쩍은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뭘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나 잘생긴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게임이나 한 판 더 할까?”

“아니, 이런 분위기면 너도 가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김상혁에게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그렇지만 김상혁은 이런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에이~ 바로 옆방인데, 뭘~ 할리갈리 한 판 더 할까?”

그런 김상혁에게 차우린이 말했다.

“나는, 아저씨가 집에 가면 좋겠어.”

“…….”

‘잘했어, 차우린!’

아무리 김상혁이라도 차우린의 직설 화법에는 당해내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차우린을 내려다보던 김상혁은 머쓱하게 웃고는 내일 보자면서 방문을 나섰다.

그렇게 드디어 모든 불청객을 쫓아냈다.

모두가 나간 방문을 쳐다보던 우진이와 나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진이가 나를 향해 빙긋 웃어 주며 말했다.

“정신없었네요, 그쵸?”

잠깐 눈이 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그렇게 웃으니까 형광등 100개 켜진 줄 알았잖아.

나는 우진이에게 넋을 놓을 뻔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에헤헤, 그러게요. 다들 우진 씨가 팀장 된다는 게 기쁜가 봐요.”

우진이가 웃어 주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렇게 아름답고 잘생긴 우진이가 나를 향해 웃어 주는데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겠어. 불가항력이지.

우진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차우린이 끼어들었다.

“나 게임 더하고 싶어.”

차우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아직도 방바닥에 늘어진 카드들이 보였다.

카드 게임 하다가 그대로 가 버리더니 카드도 안 챙겨 갔구나.

우리는 차우린이 원하는 대로 게임이나 한 판 더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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