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가이드 (9)
내가 크리스마스니 신정이니 하는 기념일에 관심이 없는 건 이유가 있다.
쉬는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월 1일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날은 작년의 활동에 대한 총 평가결과와 신년 회의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저 신년 회의는 한 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높으신 분들의 정책 회의이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저 회의에서 결정하는 것들이 올해의 일거리를 결정짓는다.
작년에 의료 센터에서 긴급 환자를 수없이 구하면서 명성을 떨쳐도 저 신년 회의에서 현장 임무에 중점을 두면 현장직 의료팀으로 발령 날 수가 있다.
물론 개인 평가가 좋을수록 원래 일하던 곳에 남은 확률도 높아지지만, 정책 결정자들의 마음이 워낙 갈대 같아서 예상하기 어렵다.
나름대로 베테랑들은 기밀 사항의 일부를 알고 있어서 회의에서 나올 결과를 예측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거의 빗나가기 마련이다.
최종 결정권자는 협회장인데, 다들 협회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니까 말이다.
그래도 나는 협회장 다음으로 입김이 센 국장에게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한 가지는 확신했다.
올해에는 ‘현장 전문 가이드’가 부활할 것이다.
***
1월 1일이 아무리 중요한 날이라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평소와 같다.
평소처럼 개인 훈련을 틈틈이 하고 주어진 일과를 수행하면 된다.
오늘은 김상혁을 옆방으로 치워야 하는 일이 한 가지 더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으니 괜찮다.
나는 차우린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우진이와 평소처럼 172호실로 갔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S급 애들은 신년 맞이 연구 평가한다고 오늘은 못 온다고 한다.
“그럼, 오늘 오전 일정은 없는 건가요?”
우진이가 눈을 빛내며 좋아했다.
우진이의 겨울 호수 같은 눈동자가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는 것처럼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아뇨. 우진 씨는 단련해야죠. 들어가세요.”
“…….”
그렇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
오전 일과가 끝나도 신년 회의가 끝났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원래 중요한 회의다 보니, 오래 걸리는 편이긴 하다. 보통 저녁쯤에 끝났던 거 같은데 올해는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우진이와 함께 오후 일정을 하러 갔다.
***
오늘은 S급 애들이 연구 평가 때문에 172호실의 자리를 비웠는데, 건물의 반대편에 위치한 연구소들은 굉장히 바빠 보였다.
이능 개량 연구소도 어찌나 바쁜지, 나랑 우진이가 도착한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바쁜 곳에서도 여유로운 사람이 있었다.
“우진아! 지금 왔어? 새해 복 많이 받아~ 하나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이드 이한새였다.
‘저 사람은 왜 맨날 일을 안 하고 있을까?’
많이 궁금했기 때문에 물어보기로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한새 가이드님! 오늘 연구 평가 하는 날이라 연구소는 바쁜 거 같던데, 가이드님은 평가가 다 끝나셨나 봐요?”
“네~ 아무래도 전 가이드니까요~ 이동 이능력을 연구하는 연구소라서 가이드인 저보다는 에스퍼들이 바쁘더라고요. 해미랑 선이도 다들 바빠서 이따가 가이딩할 짬이나 날지 모르겠네요~”
능글능글한 가이드는 에스퍼들은 다들 바쁘고 힘들겠다고 하면서 나한테까지 힘내라고 격려를 해 줬다.
이한새 가이드한테는 실례의 말이겠지만, 잠깐 김상혁과 같이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물론, 김상혁과 이한새 가이드는 당연히 다르다. 특히, 얼굴이.
이한새는 우진이의 친구답게 생겼어.
“한새, 너 저번에 연구 센터 건물 밖으로 나가는 거 아니면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잖아. 지금 일 없으면 우리랑 다닐래?”
우진이가 뜬금없이 이한새한테 동행을 청했다.
‘나는 쟤랑 같이 다니기 싫어, 우진아.’
하지만 우진이한테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러니까 거절해라, 이한새.
“그럴까? 사실 나도 이능 개량 연구소 밖에는 거의 안 가 봤거든.”
아 진짜, 이한새는 나랑 안 맞는다.
결국, 나는 가이드 두 명을 데리고 다른 연구소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
우리가 도착한 곳은 구레나룻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개량해서 연구하는 사육소다.
이곳의 연구원들이 우리에게 꼭 매번, 가능하면 매일 와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 국장도 괴수를 길들이는 사육소는 자주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그러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나와 우진이, 그리고 이한새 가이드는 어제처럼 사육장 전용 장갑과 앞치마, 장화를 신고 먹이를 주러 사육장에 들어갔다.
-끼기기기기기!
-끼긱!
-끼끼끼
기분 탓인가? 어제보다 놈들이 더 시끄럽게 우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도 나에게 달려들지 않고 얌전히 주는 먹이나 받아먹었다.
내가 우진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더니, 오늘은 우진이에게도 달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새한테는 아니었다.
“으아악?! 이게 뭐야? 오지 마! 왜 나한테만 그래?”
이한새는 눈앞까지 뛰어오르는 괴수한테 불안을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개량이 아주 성공적으로 잘 돼서 사람도 안 무는데, 순 엄살이야.’
우진이도 딱히 이한새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우진이와 함께 편안하게 괴수 구레나룻의 모이를 던져 주면서 평화를 만끽했다.
***
“차우진! 이게 뭐야?! 안전한 일이라며?!”
“안전했잖아. 털끝 하나 다치지도 않았고.”
“어우, 야! 그래도 괴수 밥 주기 체험은 좀 아니지. 난 아직도 괴수만 보면 심장이 벌렁거려.”
이한새는 사육장을 나오자마자 투정을 부렸다.
여기 사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이 괴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나 보다.
그렇지만 사육장의 연구원들은 그런 인간에 대한 특이 사항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희 미르나래는 이렇게 귀여운걸요? 영상 한번 보세요. 벌렁거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바뀔걸요?”
[끼기기기 캬아아!]
흥분한 연구원은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괴수 영상을 틀어 주면서 이한새에게 들이댔다.
“하하하…… 귀엽네요. 그렇지만 저는 오늘 처음 봐서 낯설었다고 해야 할지, 뭐 그렇네요. 자주 보면 확실히 사랑스럽겠어요.”
“그렇죠? 우리 미르나래는 사랑스럽다니까요? 오늘 우리 연구에서 미르나래의 안전성이 널리 알려져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래야 저희 연구팀도 직접 미르나래에게 밥 주고 할 텐데 말이죠.”
“그래도 전 걱정은 안 해요. 미르나래가 안전하단 건 사실이니까.”
“맞아요. 안정성 검증만 받으면 올해부턴 본격적으로 훈련 과정 들어가야죠.”
“그렇죠! 올해 안에 본격적인 상용화 준비 시작하자고요!”
이한새는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열성적인 연구원들에게 둘러싸여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만 잔뜩 들었다.
‘마치 어제의 내 모습을 보는 거 같군.’
그렇지만 이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구경하니까 재밌었다.
“그러니까, 강하나 에스퍼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엥? 왜 얘기가 나오는 거지?
“관찰 결과, 미르나래가 그래도 순종적으로 구는 대상은 강하나 에스퍼님이 유일하니까요. 안정성 검증을 받고 나면 미르나래의 훈련 담당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
“아, 그런 얘기였구나. 그런데 왜 나한테 안 물어보고 결정 난 것처럼 말해요.”
“중앙에 말해서 허락은 이미 다 받아 놨으니까, 오늘처럼 편하게 몸만 오시면 됩니다!”
아니 왜 나한테 안 물어보고 허락 먼저 받아요? 연구소 사람들 진짜 이상해.
***
오늘은 연구소 업무를 조금 일찍 끝냈다.
왜냐하면, 내 동의 없이 중앙 센터에서 내 업무 담당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에가협은 협회원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관심 없기 때문에 즉각 반발하지 않으면 하기 싫은 일을 잔뜩 떠맡게 된다.
‘물론 반발한다고 반드시 안 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난 해야겠어.’
나는 중앙 센터에 들어가자마자, 접수원에게 따졌다.
“저기요! 왜 전 하겠다고 동의한 적이 없는 업무가 중앙에서 허락이 떨어진 거죠?”
“예~ 그러셨군요. 분류 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B9103960 강하나요.”
“예~ 강하나 에스퍼님~ 올해 새로 배정된 업무와 관련된 게 맞나요?”
“네. 사육장 업무요.”
“예~ 그러셨군요. 조회해 본 결과, 상부의 명령이 있었네요. 명령으로 배치된 건 불복할 수 없다는 거 알고 계시죠?”
“예?! 대체 누가요?”
“자세한 것까지는 저희가 말해 드릴 수 없고요. 국장급의 명령이라고 조회되네요.”
‘아놔, 또 김 국장이야.’
국장급의 명령이면 어쩔 수 없다. 나는 바꿀 수 없는 일에 목매지 않는다.
나는 중앙 센터의 카운터에서 빠져나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나랑 같이 온 우진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위로했다.
“하나 씨…… 괜찮아요?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하나 씨는 잘하실 거예요.”
우진이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우진이의 겨울 호수 같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전의 햇살처럼 눈이 부신 우진이의 얼굴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우진이가 눈을 감자, 검은 나비의 날개 같은 우진이의 속눈썹이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에 눈이 부셔서 나도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입을 맞춘 순간에 하늘이 형광등을 켠 것처럼 하얗게 빛났다.
[중대 발표]
[중대 발표입니다!]
[드디어 신년 회의가 끝나고 에가협 한국지부의 방향성이 결정되었습니다.]
시끄러우면서 건조한 기계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
신년 회의 결과는 늘 이렇게 요란하게 알려 준다.
에가협은 5km 반경으로 배리어가 쳐져 있어, 배리어 안쪽에서는 중앙 관리국이 공중에 화면을 띄울 수 있다.
지금은 홀로그램 폭죽이 하늘을 수놓으면서 난리가 났다.
‘내가 신년 회의 결과를 기다리긴 했지만, 하필 타이밍도 이런 때야.’
김 국장은 여러모로 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시끄러운 안내 방송은 계속 이어졌다.
[가장 큰 소식은 ‘현장 전문 가이드’가 올해부터 다시 조직될 예정이라는 소식입니다. 가이드 국장에 따르면 예전 수준으로 착실하게 준비된 팀장이 이번 봄에 새로 부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김 국장은 봄이 오기 전까지 우진이를 다 가르쳐 놓으라는 말을 저렇게 공개적으로 했다.
[‘현장 전문 가이드’는 3년 전에 몰살당해서 맥이 아주 끊겨 버리지 않았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는데요. 에스퍼 국장이 새로운 팀장에 대한 비전을 봤기 때문에 능력은 보장한다고 하더군요.]
철두철미한 김 국장은 에스퍼 국장까지 꾀어 놨구나.
[에스퍼 국장의 비전은 항상 100% 적중한다는 사실을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럼 비전을 봤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해야겠죠? 신년 회의에서는 에스퍼 국장이 봤다는 머릿속 비전의 이미지를 투영한 뒤 상으로 만들어, 진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그 이미지를 다 함께 확인하시죠.]
팟-
그 말과 함께 하늘에는 현장 임무를 수행 중인 것으로 보이는 우진이의 모습이 크게 나타났다.
‘우와, 저렇게 커다란 화면으로 보니까 진짜 우리 우진이 연예인 같다.’
아니, 근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사람 얼굴을 다 팔아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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