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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히어로-63화 (63/81)

63. 가이드 (8)

다행히 저번처럼 늦게 가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차우린보다 늦게 집에 가는 애들이 분명히 많았다.

하지만 차우린은 오늘도 기분이 나쁜 상태로 우리와 재회했다.

차우린은 우진이가 아무리 달래 주려고 애를 써도 차에 올라타서 출발하는 순간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편한 정적 속에서 차우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나 오빠.”

‘아니, 왜 하필 나를 불러? 우진이가 바로 옆에 있는데.’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백미러에 비치는 차우린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어…… 왜 불렀어, 우린아?”

“글씨 못 읽으면 바보야?”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내 대답을 들은 차우린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울어? 난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내가 잘못한 거야?’

당황해서 운전 중에 백미러만 계속 힐긋거렸다. 백미러에는 차우린을 달래 주는 우진이의 모습이 비쳤다.

“왜 그래? 오늘 어린이집에서 누가 글씨 못 읽는다고 놀렸어?”

“김원영이, 흑. 나 이름 못 읽는다고, 흑. 바보랬어…….”

김원영은 차우린과 동갑이라는 어린이집 친구였다. 그, 차우린이 어린이집 첫날에 때렸다는 애 이름이다.

“걔 그냥 첫날에 맞았던 걸 그렇게 복수한 거 아니야?”

그냥 애들 싸움 문제였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팍 식었다.

“그런 건 주먹싸움이 짱이야. 저번에 우린이가 이겼다고 하니까 다음에도 이길 거라고. 걱정할 거 없어.”

하지만 김원영의 이름을 들은 우진이는 오히려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럼 김원영은 글자 읽을 줄 알아?”

“응…….”

차우린의 대답을 들은 우진이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

방에 도착하자마자 우진이는 차우린을 위해서 산 한글 공부 책과 숫자 공부 책을 모두 꺼냈다.

그동안은 바쁘다는 이유와 차우린이 아직 흥미가 없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 오던 것이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차우린. 여기 앉아 봐. 너 이제 오늘부터 공부해야 해.”

“싫어. 오빠가 나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아니야. 이젠 해야 해. 김원영도 글자 안다며. 너도 이젠 알아야지. 내일부터 일곱 살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신년이구나. 까먹고 있었네.

“나 내일부터 일곱 살이야?”

“그래. 일곱 살 되니까, 이제 글자 알아야지.”

“그럼 나 일곱 살 되면 할게.”

“…….”

우진이는 차우린의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지만,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그러자고 했다.

“그래. 신정이면 빨간 날인데 쉴 수도 있지. 그렇지만 이제 일곱 살 되면 공부할 거야. 알았지?”

“응~”

차우린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우진이를 끌어안았다.

우진이도 기껏해야 허벅지밖에 안 오는 차우린을 안아 주었다.

동생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던 우진이가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야의 종은 치나요? 이젠 보신각은 없지만…… 여기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걸 보면 혹시나 해서요.”

‘어…… 제야의 종이 뭐더라? 들어 본 거 같긴 한데…… 근데 협회에 종이 있던가? 못 본 거 같은데.’

협회는 이런 연례 행사를 본격적으로 챙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

햇수로는 3년, 아니 이제 4년 차지만 1월 1일을 본격적으로 챙긴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작년이랑 재작년에는 애들이 불러서 같이 술을 마신 기억밖에 없다. 게다가 작년 술자리에서는 이화영이랑 김상혁이 싸워서 이젠 안 모이기로 무언의 맹세를 한 상태다.

그런데 그때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나? 잘 모르겠다.

한참 기억을 복기하는 중인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야, 강하나! 안에 있냐?”

또 김상혁이었다.

***

“이야~ 가정이 참 좋아요. 그렇죠? 항상 훈련 아니면 임무밖에 모르던 사람이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시끄럽고. 왜 왔어?”

“신년이잖냐, 신년. 이렇게 해가 싹 바뀌면 말이야. 지난해의 아쉬운 점 지우려고 한잔, 새로운 해를 기대하며 한잔. 이렇게 마셔야지.”

보아하니 본인 때문에 술자리가 파투 났으니 나랑 마시러 왔나 보다.

“근데 나 밖으로 안 나갈 거야.”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이렇게 챙겨 왔지! 여기서 마시자고. 우진 씨도 같이 먹어요!”

상혁이 놈은 꽤나 본격적으로 술상을 차릴 생각인지, 술은 물론 프라이팬에 요리 재료까지 챙겨 왔다.

어쩐지 가방이 너무 커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까지 챙겨 왔을 줄이야.

“오늘 내가 김상혁표 특제 파전을 맛보게 해 주겠다 이 말이죠.”

아직 허락도 안 했는데 김상혁은 열심히 재료를 꺼내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술은 또 왜 그렇게 많이 챙겨 왔어. 우진이 술 못 먹는데.’

“나도! 나도 먹을래!”

차우린은 김상혁의 텐션에 전염되어 같이 신이 났다.

“그래! 우린이 너도 같이 한잔하자!”

아니. 차우린도 술 못 마셔. 어린애잖아.

“요리를 잘 하시나 봐요?”

우진이까지 김상혁에게 관심을 보였다.

뭐, 김상혁의 화려한 세팅과 현란한 도마 소리를 들으면 한 번쯤 들여다보게 되긴 한다.

하긴, 김상혁은 원래 요리랑 청소가 특기였다. 그런데 깔끔을 너무 심하게 떨어서 자기 방에서 음식 냄새가 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내 방에 와서 요리를 하고 갔다. 내가 없을 때는 창문으로 드나들었지.

우진이가 같이 살게 된 이후로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말이다.

***

김상혁이 요란스럽게 준비한 요리는 치즈가 들어간 해물파전이었다.

우리는 김상혁이 가져온 15병의 막걸리와 쌀로 만든 음료수를 세팅하고 함께 먹었다.

한창 먹는 중에 우진이가 아까 나한테 했던 질문을 김상혁에게 했다.

“두 시간 뒤면 열두 신데, 제야의 종을 치나요?”

“제야의 종이요? 아~ 종이 없어서 칠 수는 없죠~ 그런데 옛날에 녹음해 둔 종소리는 틀어 줘요. 다운타운에 있는 보신각 터를 복구 중이긴 한데 아직 한참 멀었거든요. 종소리 듣고 싶으시면 방에 있는 TV 틀면 됩니다~”

“다운타운에 보신각이 있어요?”

우진이가 깜짝 놀라면서 다시 질문했다. 보신각이 뭔진 모르겠지만 우진이한테는 중요한 정보였나 보다.

“보신각 터가 그쪽에 있어요. 순찰 관제소-D 근처예요. 근처라고 부르기엔 좀 먼가? 아무튼, 기준점으로 둘 건물은 거기가 제일 가까우니까요.”

그쪽에 그런 곳이 있었구나. 관제소-D 근처는 우진이를 찾느라 샅샅이 뒤졌던 곳이지만 전혀 몰랐다. 봤어도 모를 거 같긴 하지만 말이다.

우진이랑 김상혁은 한참 동안 종로니, 광화문이니 하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 둘의 대화에서 내가 알아듣는 거라고는 지하철뿐이다. 지하철도 한 번도 못 타 봤긴 했지만.

어쨌든 나도 같이 이야기에 끼고 싶다.

땡그랑- 찰박

어떻게 하면 지금 당장 우진이 몰래 김상혁을 쫓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에 컵에 담긴 액체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우린이 음료수가 담긴 컵을 놓쳤다.

그런데 차우린의 상태가 이상했다.

항상 예민하고 까칠한 애가 음료수를 엎었는데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차우린? 너 왜 그래?”

차우린의 이상 행동에 우진이가 곧바로 반응했다.

“아, 잠든 거구나.”

우진이는 걱정스럽게 차우린을 보다가 바로 안심했다.

하긴 벌써 11시가 훌쩍 넘었다. 놀아 주는 사람도 없는데 차우린이 깨어 있기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우진이는 차우린을 번쩍 안아 들어 침대로 데려갔다.

이제 여섯 살 어린애를 들어 올릴 만큼 근력이 붙은 걸 보니 감개무량했다.

앞으로 우진이의 근력 훈련과 체력 훈련을 더 잘 봐줘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김상혁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진짜 잘생겼다.”

김상혁의 시선은 당연하게도 우진이를 향해 있었다.

우진이가 잘생긴 것은 고정불변의 절대 진리였지만 김상혁이 우진이를 보면서 저러니까 기분이 나빴다.

“야, 열두 시 되기 전에 내 잔이나 받아.”

“어? 어 그래.”

나는 김상혁을 빨리 꽐라로 만들어서 재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우진이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연달아 세 잔을 먹였지만, 김상혁은 아직도 곯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까보다 더 흥청망청 취해 보이는 게 한두 잔만 더 먹이면 성공할 것 같다.

차우린을 침대에 눕히고 옷까지 갈아입히고 온 우진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를 중심으로 오른쪽엔 김상혁, 왼쪽에는 우진이가 앉았지만, 김상혁은 가운데의 내가 전혀 걸리적거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우즨~씨! 드뒤어, 오셨군녀! 쟈, 어서 안쟈요. 제 잔을 받으십셔~”

김상혁은 남는 컵을 아무거나 붙잡아서 막걸리를 콸콸 부었다. 꽐라가 하는 짓이 그렇듯이 김상혁이 따른 막걸리는 죄다 흘리고 넘치고 난장판이었다.

그런 꽐라의 행태를 본 우진이가 기함했다.

“세상에…… 김상혁 씨, 너무 취하신 거 아니에요?”

“에이~ 아늬에여! 곧 열듀시다. 티븨틀어, 하나야.”

나는 김상혁의 요구대로 TV를 틀었다. TV 화면에는 12시까지의 카운트다운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이런 게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

“이거 뱌! 1분 남았녜! 댜들 뽤뤼 잔 들어!”

나는 테이블 밑에 따로 빼 둔 쌀 음료수로 우진이의 잔을 바꿔치기 한 다음, 김상혁의 말대로 따랐다.

올해의 마지막 잔을 마셔야 한다고 난리를 치던 김상혁은 그 잔을 원샷하고 장렬하게 잠들었다.

‘후, 드디어 목표를 달성했다.’

TV 화면을 보니, 열두 시까지 이제 5초가 남았다.

새해를 코앞에 두고 잠든 꽐라를 본 우진이가 말했다.

“김상혁 씨는 술에 약하신가 보네요.”

‘아니. 술에 약한 건 너야, 우진아. 네가 지금 멀쩡한 건 내가 계속 잔을 바꿔치기해서 그래.’

하지만 우진이에게 이런 진실을 밝힐 수는 없으니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나는 능청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이제 종 치는 데 저랑 같이 한잔해요, 우진 씨.”

“그럴까요?”

우진이가 웃으면서 응해 주었다.

차우린이 잔다고 불을 꺼 두고 TV만 켜 둔 상태였는데, 갑자기 방 안이 밝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너무 아름다운 걸 보면 기억력이 감퇴한다고 그랬던가.

그래서 그만 우진이 잔을 바꿔치기하는 걸 깜빡했다.

TV 화면에는 초록색 천장이 달린 나무로 된 건물에 커다란 종이 있는 사진이 나오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주량을 과신했던 우진이는 막걸리를 원샷하고 내 옆에 곤히 잠들었다.

나는 잠든 우진이에게 어깨를 빌려줬지만, 우진이의 키가 큰 편이라 머리를 내 머리에 기댄 모양이 됐다.

나는 우진이가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몸을 더 밀착했다.

우진이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대고 있으니 우진이의 맥박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우진이랑 계속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

TV 화면에는 여전히 제야의 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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