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가이드 (5)
내 대답을 들은 박해미는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고는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정말 어쩔 수 없이 박해미를 따라갔다.
그렇게 털레털레 박해미를 쫓아가는 내 어깨를 누군가 감싸 쥐었다.
뒤돌아보니, 우진이의 하얗고 쭉 뻗은, 마치 조각상의 일부분 같은 목이 보였다.
시선을 조금 더 올리니, 새벽이슬을 맞은 꽃처럼 차분하고 아름다운 우진이의 얼굴이 보였다.
우진이는 어두운 숲속의 겨울 호수 같은 눈에 내 얼굴만이 오롯이 담겼다.
“하나 씨, 괜찮아요? 정 불편하면 하지 말아요. 전 혼자 해도 괜찮아요.”
날개 없는 천사인 우진이가 내 걱정을 해 줬다.
역시 이렇게 날 생각해 주는 건 우진이뿐이다.
“저도 괜찮아요~ 우진 씨뿐이에요. 이렇게 절 생각해 주는 건.”
난 우진이에게로 몸을 돌려 폭 안겼다.
우진이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꼭 붙였더니, 우진이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쿵쿵 뛰는 우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데, 박해미의 목소리가 나를 방해했다.
“당신 코가 석 자야. 누가 누굴 걱정해. 가이드 국장은 당신 목숨 가지고 강하나를 낚은 거라고. 여기서 무슨 일 시킬 줄 알고 혼자서 한다 그래. D급 가이드가.”
“우진이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사실이긴 한데, 아무튼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나는 열받아서 박해미한테 바로 쏘아붙였다.
그렇지만 박해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그런 건 주변을 봐가면서 하지? 가이딩실 필요해?”
“가이딩 안 했거든?! 너 그렇게 천박하게 말할 거면 그냥 가!”
“나 이런 말 농담으로 안 받아. 확실하게 대답해. 나 연구 센터 안내 안 해도 돼?”
“……안내 책자는 주고 가.”
순간 이동 이능력자 박해미는 쿨하게 이능을 2번 써서 안내 책자를 갖다줬다.
“분명 네가 가라고 했어. 여기에 녹음해.”
“아, 예. 안내 필요 없으니, 박해미 에스퍼는 그냥 가십쇼. 됐냐?”
“그래.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라.”
스마트워치에 내 목소리까지 녹음한 박해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3번째의 이능을 써서 빠르게 퇴장했다.
이제 우진이와 둘이서만 연구 센터 복도에 남게 되었다.
***
나는 박해미가 준 안내 책자를 폈다.
연구 센터에 대한 안내 책자가 왜 진짜로 존재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있으니까 유용하게 써야지.
책자의 첫 장에는 중앙연구 센터의 전체적인 구조에 대하여 써 있었다. 가이드 전용 시설과 장비 개발 시설, 연구소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는 설명과 입구가 3개로 각기 다른 구역으로 통하니까 주의하라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미 아는 내용이니까 그냥 넘겼다. S급 에스퍼에 관한 얘기도 없는 껍데기 같은 설명문 읽어서 뭐 해.
몇 장 더 넘겼더니, 드디어 내가 원하는 연구 센터 세부 전개도가 나왔다.
나는 거기서 우리가 있는 위치를 찾았다.
‘이동 이능력 연구소는 출입구와 제일 가까운 연구실이니까, 이쯤이 우리 위치겠네.’
그 위치에서 제일 가까운 연구소부터 쭉 훑어봤다.
‘어디를 가 볼까? 괴수 사육소는 패스. 거긴 가끔 괴수한테 먹히는 사람이 나와. 마인드 리딩 연구소는 기분 나쁜 사람이 많으니까 여기도 안 돼. 무기 연구하는데도 당연히 인명 사고 많고…… 음…… 어딜 가야 하지?’
나는 안내 책자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되도록 안전한 곳으로 골라 다니고 싶은데, 다 흉기를 개발하거나 괴수한테 상해를 입을 수 있는 곳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우진이가 다가왔다.
“길을 못 찾고 있는 건가요?”
“어…… 그건 아니고요, 그냥. 어딜 먼저 갈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하하…….”
아무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 안전한 연구소를 찾고 있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으니까, 웃음으로 대충 설명을 뭉뚱그렸다.
우진이는 안내 책자를 같이 훑어보더니,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책의 한 군데를 짚어 냈다.
“그럼 여기부터 가 보는 건 어떨까요? 가이드인 저 때문에 온 거니까, ‘가이딩 연구소’, 여기가 괜찮겠네요.”
하필 골라도 제일 본인에게 최악인 장소를 골랐네.
저 ‘가이딩 연구소’는 가이드의 무덤이나 지옥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이 건물에 그런 장소가 있다고 알려 주면 충격받겠지?’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우진이의 표정을 살폈다.
온화하고 수려한 저 얼굴에 경악이 서리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우진이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우진이의 손을 잡고 다짜고짜 가까운 연구소로 이끌었다.
“생각해 보니까 여기가 제일 괜찮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가까운 곳이 최고죠!”
그렇게 나는 우진이를 데리고 ‘괴수 사육소’로 들어가고 말았다.
***
괴수 사육소는 아무래도 괴수를 키우는 곳이다 보니, 내부가 상당히 넓은 곳이다.
1층의 천장이 3층만큼 높은 곳이고, 지하 연구소와도 이어지는 곳이다. 저번에 박해미가 우릴 데려간 지하 시설도 이곳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우진이는 괴수 사육소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난간 너머로 보이는 광활한 공간에 살짝 압도된 것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설치된 모니터의 화면으로는 각각의 괴수들의 상태가 중계되고 있었다.
나는 우진이를 데리고 사육소의 관제실로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관제실에는 사육소를 모니터링하는 인력들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늘 같은 일을 하느라 따분했던 관제실 사람들은 먼저 우리를 아는 체했다.
“가이드국에서 보내 줬다는 잡일꾼이구나! 안녕하세요! 잘 오셨어요!”
“말 좀 가려서 하세요. 가이드 국장이 직접 파견한 사람한테 잡일꾼이 뭐예요. 어서 오세요. 사육소 연구원 채서영이에요.”
채서영이 우진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저는……D급 가이드…… 차우진입니다.”
우진이가 악수를 받으며 자기소개를 했더니 연구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D급?! 가이드 국장이 D급을 보냈어?!”
“D급을 어디에 써? 여긴 B급 이상만 받아 주는 거 그 양반이 모를 리가 없는데?”
“가이드를 D급으로 보내 줄 거면 적어도 한 세 명은 보내 줘야지. 상도덕이 없는 양반이네.”
무례한 놈들은 우진이를 마주하면서 불평을 쏟아 냈다.
“적당히 하죠? 애초에 가이딩 인력 땜빵하려고 온 거 아니거든?! 그럴 거면 에스퍼인 나를 안 보냈지!”
“그쪽은 또 가이드가 아니야? 미친다, 진짜. 가이드 보충 좀 해 달라니까 다 무시하고. 그쪽은 누구신데요? 분류 번호랑 이름 좀 들읍시다.”
“B9103960 ‘강하나’요.”
“하, 에스퍼는 또 B급이야? 연구소는 A급 출력량이 기본인 것도 모르나…… 어? 강하나?”
투덜거리던 연구원은 내 이름을 듣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이 반응, 뭔지 알 것 같다. 이미 서너 번 겪어서 익숙해졌다.
“우리 동자승이 개종을 했어? 그것도 그리스 로마 신화로?”
그래도 이번 건 표현이 좀 신선하네.
“난 종교 안 믿어. 그런데 그리스 로마 신화도 아직 믿는 사람이 있어?”
“귀엽다~ 그 까까머리 모공 안에 저런 털이 숨어 있었단 말이야?”
“알고 보니 가발인 거 아니야?”
연구원 놈들은 내 주위로 모여들어서 내 머리털을 만져 보려고 하기 시작했다.
손등을 냅다 후려쳐 버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우진이가 내 어깨를 잡고 본인 쪽으로 당겼다.
미약한 힘이었지만 우진이의 뜻대로 따라갔다.
‘우진이가 이런 박력 있는 모습을 보여 주면 따라야지.’
우진이의 결연한 표정은 주꾸미같이 생긴 연구원들을 잊어버릴 만큼 멋있었다. 이런 표정을 우진이의 턱 밑에서 바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나는 우진이의 뜻대로 얌전히 우진이만 감상했다.
“그래서 저희의 힘이 필요 없으시단 뜻인가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 어깨를 붙잡은 우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진이는 싸가지 없는 연구원들의 태도에 감정이 많이 상했나 보다.
우진이가 여길 싫어한다면 그냥 가면 그만이다. 괴수 따위야, 사육소 아니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까짓거 괴수 퇴치 많이 다니면 그만이지, 뭐.
나는 우진이의 뜻에 따라 몸을 돌렸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채서영이 우리를 붙잡았다.
“우리가 언제 여러분이 필요 없다 했나요~ 강하나의 노동력을 공짜로 부릴 수 있는데, 왜 거절을 해~”
“공짜 아니야. 일한 거 따박따박 계산해서 일당 다 받아 갈 거야.”
“그래? 그건 좀 아쉽네. 그래도 우리 연구소가 손이 없지 돈이 없진 않거든. 일하러 와준다면 언제나 환영이야. 특히 강하나 에스퍼는.”
연구원들의 노골적인 태세전환에 더 기분이 나빠졌다. 은근슬쩍 무급으로 퉁치려고 했던 거도 기분 나빠. 얘들 분명 우진이만 있었으면 무급으로 노예처럼 부려 먹다가 인명 사고를 냈을 것이다.
그냥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차에 채서영이 한 번 더 우리를 잡았다.
“에이~ 일단 우리 얘기 좀 더 들어 봐. 그렇게 매정하게 가지 말고. 어쨌든 여기 온 건 우리한테 얻을게 있어서 온 거 아냐? 괴수의 생태 정보라든가, 그런 거. 가이드 국장이 또 현장 가이든지 뭔지 그거 만드나 봐?”
“너희한테 아쉬운 소리 들으면서 모을 정보는 아니니까 괜찮아. 우린 간다.”
“에이, 에이~ 뭘 그렇게 섭섭하게 굴고 그래~ 이번 달까지 모은 생태 데이터 줄게. 우리랑 같이 일하자.”
“지금 당장 전송해 주면 할게.”
채서영의 솔깃한 제안을 놓치지 않았다.
채서영은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던 건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수락했다.
나는 내 스마트워치에 생태 데이터를 다 옮겨 담고 나서야 채서영이 시키는 일을 시작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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