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 마이 히어로-57화 (57/81)

57. 가이드 (2)

아침이 밝자마자 김 국장에게 연락이 왔다.

우진이와 함께 가이드국 국장실에 오라고 한다.

나는 연락을 확인하고 스마트워치의 화면을 껐다.

‘아직 우진이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국장실을 어떻게 가.’

그리고 우진이의 뇌진탕 추이도 살펴야 한다.

평소대로 조깅을 마치고 씻고 나온 나는 아침 식사를 사러 나갔다. 보통은 이 시간에 우진이랑 차우린을 깨워서 식당으로 가지만 오늘은 우진이 컨디션이 나쁘니까 음식을 포장해 올 생각이었다.

조깅할 때만 해도 어두웠던 하늘에 붉은 해가 떠오르며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색이 보랏빛에서 분홍으로 바뀌고, 지척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던 붉은 태양이 점점 하얗게 바뀌며 하늘을 파랗게 바꿔 놓는 과정은 언제나 아름답다.

바뀌는 과정도 순식간이라는 게, 이 광경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 바뀌는 건 순간이지.’

나는 우진이를 만나고 곧바로 달라진 생활 패턴을 떠올렸다.

조깅 갔다 와서 밥먹는 건 예전 그대로이긴 한데, 오늘처럼 일정 없는 날이면 항상 개인 훈련을 갔었다. 방은 그냥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개인 훈련을 가긴커녕, 어린애랑 우진이 보느라 바쁘다.

물론 난 지금 생활이 좋다.

예전보다 정신없어지기는 했는데 우진이를 매일매일 하루 종일 볼 수 있다면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어두운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눈밭 같은 피부, 검은 나비의 날개 같은 속눈썹과 살얼음 위에 성에꽃이 흐드러진 겨울 호수 같은 눈동자는 온 세상의 맑고 아름다운 것을 하나로 뭉쳐놓은 것 같았다. 그런 왼쪽 눈 밑에 있는 점은 요사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설산의 절벽 같은 우묵한 눈매와 날카로운 콧대는 여실히 우진이의 잘생김을 드러내고 있었다. 얇으면서도 살이 도톰한 입술도 탐스럽고 이쁘지.

떠올리니까 더 빨리 실물을 보고 싶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느새 하늘은 푸른빛으로 완전히 물들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우진이는 차우린과 내가 식사를 다하고 뒷정리까지 싹 마쳐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우진이 상태 안 좋으면 계속 방에 있을 예정이라 상관은 없었다.

나는 차우린의 머리나 묶어 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차우린이 주문한 스타일링을 모두 끝냈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강하나-! 내 냄비 돌려줘라-”

김상혁이었다.

에스퍼 숙소 건물은 복도에서 떠들면 그 소리가 방 내부까지 아주 잘 들린다.

그러니까 저렇게 큰소리로 나한테서 냄비를 찾는 김상혁의 행동은 내가 냄비를 빌려 가고 안 돌려줬다고 소문을 내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일주일 좀 넘게 안 돌려줬다고 이런 식으로 보복하다니 정말 쪼잔하다.

나는 곧바로 문을 열어 줬다.

“알았어, 냄비 줄 테니까 조용히 좀 해. 우진이 깬다고.”

“어라? 네가 웬일로 이 시간에 거기 있냐?”

직접 대면하게 된 김상혁은 오히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 뭐지? 그냥 내 이미지만 망치러 온 건가?’

어이가 없었지만, 동네방네 시끄럽게 하느니 놈을 방 안으로 들이는 게 나았다.

나는 언제나 목소리가 큰 김상혁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넌 왜 이 시간에 집에 있냐?”

목소리를 낮추랬더니, 김상혁이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렇게까지 하란 뜻은 아니었는데.

내 귓가에 붙어서 속삭이는 김상혁이 살짝 불쾌했기 때문에 거리를 벌리고 나서 대답해 주었다.

“아직 우진이가 자거든. 그래도 이렇게까진 안 해도 돼.”

“아니,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잔다고?! 잠자는 미녀야, 뭐야?!”

귓속말 안 해도 된다고 했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김상혁 이놈은 하여간 중간이 없다.

“큰 소리 내지 말라니까. 우진이 어제 머리 다쳤었어. 쉬게 둬.”

“오빠가 어제 머리 다쳤어? 어디?”

이젠 또 차우린까지 끼어들었다. 겁도 없고 해맑은 어린이는 침대로 달려가서 우진이의 머리를 헤집었다.

“다친 데 없는데?”

“지금은 없지. 어제 치료했으니까.”

“그래? 그럼 이제 안 아프네. 우린아, 오빠 깨워!”

“웅!”

뭐냐고. 너네 사이 나쁜 거 아니었냐고. 갑자기 의기투합하는 김상혁과 차우린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우진이를 조몰락거리면서 괴롭히던 차우린은 끝내 우진이를 깨웠다.

“으…… 왜애……?”

우진이가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오래 자서 얼굴이 부어도 잘생긴 건 그대로였다. 나는 홀린 듯이 우진이 옆으로 다가갔다.

“우진 씨, 그…….”

나는 우진이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가 말을 잃었다.

어제 창고에서 막 발견됐을 때의 피투성이 모습이 일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진이가 나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하더니 내 얼굴을 만졌다.

“하나 씨, 왜 울어요……?”

‘응? 울어? 내가?’

알고 보니 우진이는 내 눈물을 닦아 준 거였다. 우진이가 훑고 간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났다.

우진이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감촉이 좋았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눈을 살포시 감고 우진이의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단단하고 따뜻하고 우진이 냄새가 나는 게 기분 좋았다.

처음엔 당황해서 굳었던 우진이의 손도 차츰 내 얼굴을 감싸며 쓰다듬었다.

“어우, 내가 이런 줄도 모르고 멋대로 방문해서 미안합니다.”

한창 분위기 좋은데 김상혁이 산통을 깼다.

“이런 줄 알았으면 내가 안 왔지. 눈치가 없었네. 나는…… 이만 가 볼게.”

아무도 궁금하지 않았겠지만, 김상혁은 알아서 빠져주겠노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에스퍼 숙소 현관문은 방 주인이 아니면 열 수 없기 때문에 김상혁은 우리가 있는 침대 쪽 창문으로 다가왔다.

나와 우진이 옆에서 협탁을 밟고 창문 밖으로 몸을 빼는 김상혁은 참…… 사람이 없어 보였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던가 말던가 창틀에 매달린 김상혁은 손까지 흔드는 여유도 부렸다.

“그럼 난 갈게. 안녕~”

“안녕.”

우진이가 가정 교육을 빡세게 시킨 보람이 있게, 인사성 밝은 차우린이 유일하게 김상혁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김상혁은 11층의 높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김상혁이 나가자마자 바로 창문을 닫았다.

실족사한 에스퍼에 대한 얘기가 없는 걸 보니, 김상혁은 무사하게 방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

다행스럽게도 우진이는 뇌진탕의 증세가 약했다.

‘살짝 어지러워하거나 피곤해하긴 하는데, 이 정도면 잘 쉬면 낫는다고 하니까 다행이지.’

나는 우진이를 살펴보느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방에서 지냈다. 어지럼증 때문에 갑자기 쓰러진다던가, 다른 증세가 일어나면 곧바로 의료 센터에 데려가야 하니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번에 우진이가 아파서 일정 다 펑크 냈을 때는 잡일 하러 밖으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땐 감기 몸살이고 이번엔 뇌진탕이잖아. 머리 다친 건 위험하니까 옆에서 봐줘야지.

그리고 하루쯤은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우진이 얼굴을 하루 종일 보니까 그런 거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진이랑 아무것도 안 한 채로 하루가 지났다.

***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수업을 나가야 한다. 보고서도 중앙이랑 연구 센터에 각각 내야 하고, 가이드 국에도 내야 한다.

‘우진이도 오늘은 수업에 데려가야 할 텐데, 몸 상태가 괜찮을지 모르겠네. 그냥 오늘 하루도 쨀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에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지금 당장 우진이랑 함께 오라는 김 국장의 호출이었다.

이번엔 콕 집어서 오라고 불러냈기 때문에 어제처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국장의 호출, 이건 5분 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순간 이동 이능력으로 바로 연행된다.

할 수 없이 우진이랑 차우린을 끼고 가이드 국으로 갔다.

똑똑-

국장실 문을 두드리자, 김 국장이 곧장 들어오라고 허락했다.

“올 거면 너희만 오지, 뭘 애까지 끌고 와?”

“그럼 애 어린이집에 맡기고 왔을 때까지 기다려 주든가요. 꼭두새벽부터 호출해서 어쩔 수 없이 데려온 거잖아요.”

“애가 어린이집에 다녀? 거기 누구 한 명 얘 좀 데려다주고 와라. 애가 학교는 다녀야지.”

교육열이 강한 김 국장은 주변 사람을 시켜서 차우린을 데려갔다. 걔 아직 옷도 못 갈아입고 세수도 안 했고 밥도 안 먹였는데.

그래도 할 일이 줄어든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멀어져가는 차우린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김 국장에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왜 부르셨어요?”

“왜 불렀겠냐? 네가 어제 안 왔으니까 불렀지.”

김 국장이 담배를 꺼내 물면서 성의 없게 대꾸했다.

“어제 왜 안 왔겠냐고요. 뇌진탕 있던 거 다 보고받아 보셨을 분이 말이에요.”

나는 김 국장의 태도가 떨떠름했다. 우진이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었는데 사정 하나 안 봐주고 말이야. 피투성이였던 우진이의 모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진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국장은 태연하기만 했다.

“큰 상처도 아닌 걸, 싹 다 낫게 해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뭘 엄살이야? 그래도 어젠 주말이니까 쉬라고 내버려 둔 줄 알아.”

김 국장은 입으로 담배 연기를 뱉고 다시 이어 말했다.

“그래서 어땠나? 직접 훌리건을 잡아 본 소감은?”

“어떻긴, 뭐가 어때요? 그냥 훌리건 잡는 게 늘 똑같지, 뭐. 매년 하는 거.”

“아니, 너 말고 인마.”

김 국장은 나더러 조용히 하라면서 라이터로 내 이마를 툭툭 쳤다. 그리고 재떨이 집어오기 귀찮다면서 손바닥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진짜 귀찮은 할망구 같으니.’

나는 속으로 구시렁대면서 순순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김 국장이 내 손바닥에다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손바닥에 불씨가 남은 담뱃재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대체 뭘 하는 거예요?!”

옆에 있던 우진이가 사색이 되어서는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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