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훌리건 (13)
오늘 아침부터는 할 일이 늘어났다. 조깅 다녀오고서 수업 준비물만 챙기면 됐었는데, 이젠 수업 전에 차우린을 다운타운에 있는 어린이집에 내려 주고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주는 적응 기간인지 뭔지, 우진이도 같이 어린이집에 가야 한단다.
그래서 내 할 일만 늘어났다.
나는 어린이집에 우진이랑 차우린을 내려 주고 수업을 갔다 온 다음에 우진이를 다시 픽업하고 와서 따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수업을 두 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우진이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는 건데 응원해 줘야지.
어제도 어린이집 보고 와서 쪽지 시험 쳤고 이따 오후에도 한 번 더 치기로 했다. 머릿속에 때려 박는 건 아무래도 쪽지 시험 자주 보는 게 짱이지.
어쨌든 나는 두 사람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차 시동을 켰다.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동안, 차 내부는 조용했다.
아파서 이틀이나 쉰 우진이는 아침에 일어나려니 힘들었는지, 조수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차우린은 뒷좌석에 앉아서 가기 싫다고 꿍얼거렸다.
참 상쾌한 아침이다.
***
데려다주고 오는 시간이 예상보다 짧아서 평소보다 연구 센터-a동 172호에 빨리 도착했다.
지금은 고위험군 에스퍼 특별 교육 시간이 아니면 사용되지 않는 곳이라 내가 설치한 사격장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음, 준비한 과녁판이랑 탄환이 별로 안 줄어든 걸 보니 얘들 연습 안 했구나.”
어쩐지 보내 준 동영상에 나온 자세들이 너무 똑같길래, 복사해서 붙여넣는 식으로 조작한 것 같더라니.
이렇게 내 의심이 확신 되는 사이 172호실의 문이 열렸다.
“아직 10분이나 남았는데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 매번 정각에 오잖아.”
“오늘은 빨리 가는 게 낫다니까? 총알이랑 과녁판 개수 줄여 놔야 할 거 아냐. 티 안 나게 하려면.”
“설마 그런 거까지 확인하겠어?”
“확인하고도 남을 사람이긴 해.”
서로 떠들어 대면서 들어오던 아이들은 먼저 172호실에 온 내 모습을 보고 조용해졌다.
그렇지. 조용해질 만하지. 훈련 안 했다는 증거 현장이 딱 걸렸는데 말이야. 게다가 증거 인멸도 하려고 한 걸 걸렸잖아.
이제 내가 애들한테 한 소리 할 타이밍인데, 나보다 장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요, 선배. 뭐 물어봐도 돼요?”
“뭔데? 너네의 방탕함에 관한 처분 얘기면 지금 몸으로 겪을 거니까 안 물어봐도 돼.”
“아니 그거 말고…… 근데 고작 이틀 논 거로 쩨쩨하게 굴지 마요. 선배가 먼저 수업 펑크 냈잖아.”
“그래서 수업시간에 사격 연습한 거 영상 찍어서 보내랬잖아. 난 너네가 보낸 동영상 3시간짜리 두 개 빠짐없이 다 봤거든? 합쳐서 6시간인 거. 너네 딱 5분만 쏘고 5분짜리 연속으로 붙여넣어서 3시간으로 만들었더라?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아, 알았어. 잘못했다고요. 그런데 나 아직 질문 안 했어.”
장하나는 미꾸라지처럼 중요한 주제에서 빠져나갔다.
“뭔데, 그래?”
“선배, 왜 머리 스타일 바꾸고 나서 옷 더 귀엽게 입어요? 가이드님이랑 같이 다닐 때부터 지긋지긋한 유니폼 아닌 스포티한 스타일 되긴 했는데, 지금은 완전 놀이공원 알바생 됐어.”
“맞아, 후드 모자 곰돌이 귀랑 얼굴 달렸잖아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어요? 바뀐 머리 스타일이랑 잘 어울리긴 해요.”
“에가협의 동자승이었는데, 갑자기 에가협의 마스코트처럼 변신하긴 했어.”
조용은 또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너네 날 동자승이라고 부르고 있었어? 같이 현장 나가는 우리 팀 사람들이 날 그렇게 부르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얘들까지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은 좀 충격이네. 연구 센터에 갇혀 사는 애들마저 그렇게 불렀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날 그렇게 부른 거지?
새삼스럽게 남들의 이목이 신경 쓰였다.
‘설마 우진이도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그런데 우진이는 지금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니까 된 게 아닐까?’
우진이는 나랑 같이 살게 된 이후로 거의 아침마다 내 옷을 골라 주고 있는데, 내가 머리를 기른 뒤로 더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추천해 줬다.
그 모습이 어쩐지 즐거워 보여서 뭘 골라 주든지 간에 다 입고 다니고 있다.
오늘 골라 준 후드 티 모자에 곰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이게 우진이 맘에 든다면야, 못 입을 것도 없긴 하지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나는 오늘을 위해 준비한 수업 재료들을 꺼냈다.
오늘은 그동안 못했던 체력 훈련을 중점으로 할 것이다.
얘들이 주말까지 사격 연습 해 봤자 뭐 얼마나 늘겠어. 사격 연습 같은 건 일단 기초 체력부터 키워 놓고 해도 충분하다.
나는 모래주머니가 잔뜩 달린 밴드들을 꺼냈다.
“선배, 이건 뭐예요?”
“너희를 위한 준비물. 오늘부터 이거 차고 훈련할 거야.”
“……그런데 이건 강화계 애들한테는 의미 없는 거 아니에요? 나만 힘든 거 아냐?”
내가 준비한 물건을 본 장하나는 내가 뭘 시키려는지 이미 파악하고 평소처럼 패악을 떨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애들한테 모래주머니를 달게 하고 뜀박질을 시킬 것이다.
물론 장하나의 말처럼 강화계 애들에게는 의미가 없게 느껴질 것이다. 함소영과 조용은 무려 S급의 신체 강화 이능력자라, 저런 모래주머네가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체 강화 이능력자에게 적합한 무게의 쇳덩이를 준비해 왔다.
장하나도 생각한 걸 내가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나도 신체 강화 이능력잔데.
철저한 준비성으로 장하나의 불만을 잠재운 나는 오늘의 수업을 시작했다.
***
갑자기 훈련 강도를 높여서 그런지, 애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널브러졌다.
수업 종료 선언은 했으니까 알아서 172호실 문 닫고 나가겠지. 어제 그제 해 봤으니까 애들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이제 우진이 데리러 가야 해. 문 잘 닫고 가.”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라고 우진이는 이번 주는 오전은 내내 차우린과 함께 어린이집에 있다가 점심 전에 나온다.
오늘은 첫날이라고 차우린도 점심을 안 먹고 우진이랑 같이 나온다.
“벌써 12시 다 됐네. 빨리 데리러 가야겠다.”
나는 빨리 172호실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3시간 만에 만난 우진이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차우린은 우진이보다 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방금까지 대성 통곡을 했는지, 연신 훌쩍거렸다.
‘뭐지? 점심땐데, 밥 빨리 안 먹여서 그런가? 나도 최대한 빨리 온 건데?’
분위기가 왜 이런 건지 너무 궁금한데, 우진이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말도 못 꺼내겠다.
“차우린. 너 내일도 이러면 오빠 다음부터 안 갈 거야. 알겠어?”
“아니야…… 훌쩍. 같이 간다고 했잖아아…….”
“그건 너 어린이집에서 잘 지내라고 그런 거지, 친구 때리라고 같이 간 건 줄 알아?! 너 내일도 이러면 앞으로 혼자서 가!”
“으아아앙!”
뭐야…… 우진이는 차우린과 뒷좌석에 앉더니, 차우린을 혼냈다.
정황을 보니, 오빠가 같이 있다고 의기양양해서는 어린이집에 같이 다니는 애 때렸나 보다. 애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보호자인 우진이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인 것도 맞지.
뭐, 이해는 하는데 빨리 끝내 주면 좋겠다.
우리 지금 점심 먹으러 가야 해, 얘들아.
***
다행인지 우울한 점심시간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밥 먹는 동안, 차우린이 계속 불쌍한 표정으로 우진이를 쳐다보긴 했지만 울지는 않았으니까 평화로운 시간이지.
나는 이제 우진이 훈련을 봐주고, 연구소 가서 S급 애들 자료 받아 오고, 임무 계획서 써서 중앙이랑 연구 센터에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임무 계획서는 또 뭐야?’
그냥 중앙에서 받은 임무 내용 따라가는데 뭐 이런 거도 쓰래. 연구소 인간들 진짜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S급 에스퍼 데리고 일반인 거주 구역 가려면 계획서를 내야 한다니. 정 불안하면 아예 허가를 안 해 주든가 말이야. 내가 연구원도 아닌데 무슨 S급 에스퍼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계획서를 써서 내야 하냐고.
아, 설마 이번 임무 이거 연구소는 반대했는데 김 국장이 우겨서 하게 된 건가?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가설이 그럴듯했다.
‘하긴 가이드 국장이 아직 연구소 정도는 이겨 먹을 힘이 있긴 하지.’
연구원 놈들도 김 국장이 강행한 우격다짐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마음에 평화가 오니까 주변의 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하, 하나 씨…….”
“네, 왜 그러세요?”
우진이가 훈련 중에 숨을 몰아쉬며 나를 찾았다.
‘우진이는 어쩜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도 밤이슬을 맞은 한 떨기의 백합 같을까?’
살짝 상기되어 발그레한 얼굴도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검은 나비 날개 같은 우진이의 속눈썹이 우진이의 헐떡임에 맞춰 잘게 흔들렸다. 그 밑에 숨어 있던 겨울날의 호수 같은 옅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찾았다. 헐떡이던 얇으면서도 탐스러운 입술이 나를 향해 말했다.
“잠깐만…… 헉, 잠깐만 쉬었다 하면…….”
가엾은 우진이는 숨을 몰아쉬느라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하긴, 훈련이 힘들겠지. 죽다 살아나서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잔병치레도 잦아서 체력도 많이 떨어졌을 텐데, 훈련이 버거울 것이다.
그러니까 세심하게 잘 봐줘야지.
“아까 쉬어서 안 돼요. 거의 끝났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건강해지도록 훈련을 잘 시켜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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