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훌리건 (11)
가이드 국장과 긍정적인 전망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우진이한테 돌아왔다.
의료 센터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던 우진이는 우리가 없는 사이에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뜨고 있었다.
“오빠아악~!”
차우린이 붙들고 있던 내 손을 뿌리치고 우진이한테 뛰어갔다.
“응급실에서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면 안 돼!”
이건 차우린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라서 뛰쳐나가는 차우린을 놓치고 말았다.
‘나까지 뛰어다니다가 또다시 쫓겨나느니 그냥 놓치는 게 낫지. 어차피 코앞에 누워 있는 우진이한테 가는 건데 별일 있겠어?’
콰당-
“으아아앙!”
별일이…… 있네?
‘어린애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혼자 넘어지고 우는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고 있는데, 누워 있던 우진이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안색이 파리한데, 뭘 일어나고 그래. 당장 뛰어가서 도로 눕히고 싶었지만, 응급실이라 뛸 수 없었다.
나름 빠른 속도로 걸어갔지만, 우진이가 코앞에 있는 차우린을 일으켜 주는 게 더 빨랐다.
“괜찮아. 안 다쳤어. 뚝 해.”
“여기 아프니까, 호 해 줘.”
차우린은 진짜 환자인 우진이 앞에서 엄살을 부렸다.
‘뭐, 어린애니까. 그럴 수도 있지.’
우진이가 어리광을 다 받아 주고 안아 주기까지 하니까 차우린은 금세 방긋방긋 웃었다. 아까 울었던 게 마치 거짓 눈물이었던 것 같다.
기분이 좋아진 차우린은 평소처럼 우진이한테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나 하나 오빠랑 화내는 아줌마 만나고 왔어. 어, 그래서. 어, 아줌마가 어, 오빠가 팀장 된대.”
“그게 무슨 말이야?”
“어, 아줌마가 오빠 팀장 만들 거라고 하나 오빠랑 얘기했어.”
‘아니, 이 꼬맹이가 아직 기밀 사항인 걸 다 말하고 다니네?!’
나는 딴사람들이 들을까 봐 재빨리 끼어들었다.
“우진아, 아니 우진 씨 일어나셨네요~ 금방 일어나서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아, 무슨 얘길 꺼내야 하지?
평소에는 할 말이 많았는데 차우린이 다짜고짜 기밀 사항을 말해 버리는 바람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린애 앞에서 찬물도 마시지 말아야 한다더니 이래서 그런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거니 하면서 편하게 생각했더니 실수한 모양이다.
나는 할 말을 쥐어짜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우진이가 정말 잘생겼다.
오늘따라 하얀 얼굴에 살짝 홍조가 비치는 게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홍조를 보니까 생각난 건데, 우진이가 아까 열이 심했었는데. 지금은 괜찮나?
나는 손을 뻗어 우진이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아니, 이건 사심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열만 재 보려는 거야.’
그런데 우진이 얼굴이 아직도 뜨겁다. 만져 보기 전보다 더 빨개진 것도 같고? 수액까지 맞고 있는데도 이러면 심각한 거 아냐?
나는 걱정이 돼서 한 발짝 더 다가가, 우진이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우진이의 겨울 호수 같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새하얀 우진이의 얼굴도 엄청 빨갛고 말이야.
‘왜 그러지? 열이 계속 오르는 건가?’
나는 우진이 상태를 더 자세하게 살피기 위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그러자 얼굴이 더 달아오른 우진이가 몸을 뒤로 확 빼 버렸다.
그러더니 벽에다 뒤통수를 엄청 세게 박고 말았다.
쾅-
우와, 아프겠다.
“우진아, 괜찮아?”
오른팔에는 차우린을 안고, 왼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우진이는 부딪친 뒤통수를 손으로 만져 보지도 못하고 눈물만 찔끔 흘렸다.
“으아아, 어쩌지? 뇌진탕 일어난 거 아냐? 화영이 다시 부를까?”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우진이를 침대에 앉혔다.
어느새 우진이 품에서 벗어난 차우린은 우진이 뒤에 서서 ‘호~’하면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주고 있었다.
나도 질 수 없다. 뒤통수에 혹이라도 난 건 아닌지 살펴봐야지.
그런데 우진이가 이젠 자유로워진 오른팔로 나를 밀어냈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거리 좀…….”
너무 가까이 붙어서 답답했나? 나는 우진이의 요청으로 살짝 거리를 벌렸다.
이제 됐나?
“그런데 저를 팀장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뭔가요?”
아니네.
안타깝게도 우진이는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일어나도 자신의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잘생기고 똑똑하기도 하다니 정말 멋있지만 좀 곤란하네. 아직 아무 데도 말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우진이가 물어보니까 대답해 줘야지. 당사자이기도 하니까 알건 알아야지.’
그래도 최대한 비밀로 해야 하니까 나는 우진이에게 귓속말을 해 줬다. 자상한 우진이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내 얘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가이드 국장님이 우진 씨를 현장 팀장으로 임명할 생각이세요.”
너무 길면 누군가 엿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짧게 말해 주었다.
뭔가 차우린이 한 말이랑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중요한 사실을 전해 준 건 맞으니까.
나는 검지를 입가에 대고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잘 듣고 이쁘네, 우리 우진이.’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도 모르게 우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진이도 이번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얼굴만 붉게 물들였다.
***
우진이는 어제의 임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 주었지만, 임무가 많이 힘들었는지 몸살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은 훈련을 하지 못하게 됐다.
김 국장이 팀장 재목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닦달하고, 바로 다음 주에 임무가 예정되어 있지만 어쩌겠어. 우진이가 아픈데.
우진이는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열이 내리지 않아서 이마에 해열 패치를 붙이고 누워 있다.
응급실에서 만났을 때 수액이 많이 남아 있길래 심심함도 달래고 내 할 일도 하기 위해 우진이한테 현장 교육 책자를 펼쳐서 암기시켰을 뿐인데, 그 이후로 열이 올랐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지금은 푹 쉬게 두고, 이따 일어나면 죽이라도 먹여야겠다.
나는 식당에서 포장해 온 죽을 냄비에 옮겼다.
정성스럽게 직접 조리하면 더 좋았겠으나 내 방엔 요리 도구가 없어서 사 올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냄비도 내 게 아니고 김상혁 방에서 가져왔다. 방 주인이 안에 없길래 창문으로 들어가서 가져왔지만 말이다.
문은 방주인의 지문인식으로 열리지만, 창문은 아니라서 방에 사람이 없을 때 유용하다.
우진이 먹일 죽을 준비하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긴 했다.
‘뭐 하지? 빨래나 미리 돌릴까?’
혼자 지내다가 세 명이 같이 지내니 은근 잡일거리가 많이 생겼다.
차우린이 여기저기서 인형이나 쿠션 같은 걸 잔뜩 받아와서 빨랫거리는 혼자 지낼 때의 3배가 넘는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차우린은 인형이랑 쿠션을 꺼내서 놀고 있다. 속 편한 어린이 같으니.
차우린은 인형을 우진이 겨드랑이 사이나 손에 하나하나 갖다 놓으면서 열심히 놀았다.
‘근데 저거 놔두면 우진이 열만 더 오르는 거 아냐?’
나는 괜히 겁이 나서 차우린에게 다가갔다.
띵동-
아니, 다가가려 했는데 누군가 내 방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띵, 띵, 띵, 띵동- 띠딩동- 띵동-
“아, 누구야? 그만 눌러!”
나는 당장 현관으로 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 있는 사람은 김상혁이었다.
“뭐야? 왜 왔어?”
“야, 너 이번에 잡은 괴수 엄청나더라! 그거, 업.”
난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 대는 김상혁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이 새끼가 우진이 자는데 시끄럽게 굴고 난리야. 그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김상혁의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입을 막은 손을 놔줬다.
“됐어, 이제 말해 봐.”
“너 어제 잡은 괴수가 ‘알래스카 황소 지렁이’더라? 알고 있었어?”
“알…… 뭐? 뭔 벌레? 뭐야 그건?”
“알래스카 황소 지렁이! 유명하잖아, 그거! 저번에 이 근처 초토화시킨 게 그놈인데 한번 숨으면 땅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서 못 잡는다며. 새끼 친 거만 잡았다고 너도 뭐라 그랬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긴 했다.
‘한 달 좀 더 됐나?’
다운타운은 아니고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일반인들이 꽤 많이 살았다고 들었는데 그쪽이 괴수 때문에 쑥대밭이 됐었다.
그래서 인명 구조팀이랑 괴수 퇴치팀, 우리 팀인 대괴수 섬멸팀까지 합쳐서 대규모로 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뭔가 많이 잡긴 했는데, 실속있는 걸 못 잡긴 했지.’
땅속 깊이 들어가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한동안 그쪽으로 조깅을 다녔었다. 그러다가 우진이도 구했지. 지금 생각해 보니, 나름 추억이네.
“근데 그때 못 잡은 괴수 이름이 왜 ‘알래스카 황소 지렁이’야? 지렁이처럼 생기긴 했지만 에가협에서 붙인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몰라.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 아무튼, 혼자 대형 괴수 해치워서 뿌듯하겠어? 보너스 들어오겠네. 한턱 쏴라.”
“나 당분간 임무 뺑이 돌아야 돼서 바빠. 할 얘긴 그게 다야?”
“어? 어, 그렇지? 현장 다녀온 사람들 다 네가 혼자서 괴수 잡은 얘기만 해. 너의 눈부신 활약이 구출된 사람들 입에도 아주 쉴 새 없이 오르내린다. 축하한다, 야.”
“음…… 그래. 근데 사람들이 뭐 다른 얘기는 안 했어? 가령, 훌륭한 저격수의 이야기라든가.”
“저격수? 그런 이야긴 못 들었는데?”
“아, 그래.”
우진이의 활약을 현장에서 구출된 사람들이 퍼뜨리고 다녀야 그림이 좋아지는데 애꿎은 내 얘기만 나왔다니, 상당히 아쉬웠다.
‘하긴, 우진이의 활약은 직접 겪은 전투원이 아니면 알기 힘들지.’
그렇지만 현장의 목격자들은 많을수록 좋다. 무용담이 많아야 팀장으로서 인정을 받기 쉬우니까 말이다.
우진이를 ‘현장 전문 가이드 팀장’으로 만들기 위해선, 앞으로의 임무에서 우진이가 돋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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