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훌리건 (9)
의료 센터에서의 볼일은 빠르게 끝났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도 김한진 외에는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완전 범죄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임무가 일찍 끝난 탓에 하늘은 아직도 푸르렀고, 시베리아 기단에서 불어온 찬 바람이 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살랑—
살랑? 머리통 쪽에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감각이 바람을 타고 스쳐 갔다.
‘목 언저리도 살짝 간지러운 것 같고. 대체 뭐지?’
생소한 감각에 괜히 멋쩍어서 뒤통수를 긁었다.
폭신—
“……?”
뭐야, 이거? 왜 이렇게 손가락에 잡히는 게 많아? 김한진에게 그냥 눈썹이랑 머리털을 복구해 달라고 했을 뿐인데, 머리 길이가 예전과 다른 느낌이다.
‘뭐, 그래도 징그러운 꼴은 면했으니까 괜찮아.’
현관문까지 도착한 나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우진 씨, 저 왔어요~! 아까 보기 흉해서 많이 놀랐죠? 이제 괜찮아~”
“……!!”
다정한 우진이는 내가 잠시 의료 센터에 다녀온 동안에도 차우린과 놀아 준 모양이었다. 방 밖까지 들리던 차우린의 웃음소리는 내가 방에 들어서자 뚝 끊겼다.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만 쳐다봤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보길래 살짝 머쓱해질 무렵, 차우린이 말했다.
“하나 오빠, 왜 대머리 아니야?”
“대머리는 너무 못생겼잖아. 그래서 한번 길러 봤어. 어때, 어울려?”
“웅, 귀여워.”
차우린은 내게로 달려와, 내 머리털에 관심을 보였다.
어린애한테 야박하게 굴 이유도 없으니 자세를 낮춰서 차우린이 원하는 만큼 실컷 만져 보게 해 줬다.
내 머리를 조물조물 만져 대는 차우린의 등 뒤로, 우진이가 다가왔다.
어쩐지 긴장이 되어 등줄기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내 머리가 이상한가? 거울로 확인 좀 하고 올 걸 그랬나?’
머릿속에 별생각이 다 떠오르는 중에 우진이가 말을 걸었다.
“하나 씨. 머리가……. 아니, 그게…… 몸은 괜찮아요? 아까 괴수한테…… 그…….”
천사처럼 착한 우진이는 아직도 내 몸을 걱정해 줬다.
못돼 먹은 협회 놈들 중에선 이렇게까지 내 걱정을 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우진이는 천사 같은 게 아니라 천사 그 자체인 게 틀림없다. 일단 생긴 것부터가 수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으로 남긴 천사의 모습이니까.
“……역시 천사인 게 틀림없어.”
“네?”
“저야, 아주 팔팔하죠~ 아까는 그냥 머리카락이 좀 녹았을 뿐이에요. 보기 흉해서 헤어스타일을 바꿔 봤는데 저 어때요? 잘 어울려요? 급하게 돌아오느라 거울은 아직 안 봤는데, 그래도 머리털 녹은 것보단 보기 편하죠?”
“아…… 네. 귀여워요……. 가발이 아니구나.”
우진이는 내 머리가 진짜가 맞나 궁금했는지, 차우린처럼 내 머리카락을 만져 보기 시작했다. 두피까지 만져 보는 게 아주 전문적이었다.
“진짜 머리카락이네……. 몇 분 만에 어떻게 머리를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속눈썹도 진짜예요?”
복구 이능력자인 김한진 씨가 코코 가루 뇌물을 받고 능력을 팍팍 써 준 건데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지?
의료 센터 에스퍼의 이능을 미용 목적으로 쓴 걸 윗선에 들키면 시말서를 써야 한다.
‘흠,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하지? 우진이한텐 거짓말하기 싫은데.’
내가 힘차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 우진이는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는 등 열심히 만졌다. 내 머리가 맘에 드나 보다.
우진이가 내 머리를 좋아하니, 생각 없이 오버해서 이능을 써준 김한진에게 감사한 마음까지 생기려 한다.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던 우진이가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창백한 겨울 하늘 아래에 눈과 살얼음이 내려앉은 호수처럼 시리게 맑고 쓸쓸한 푸른빛이 담긴 청회색 눈동자가 지척에서 내 눈을 담았다.
내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속눈썹이 예쁘네요, 하나 씨.”
세찬 진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심장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아니었다.
진동이 느껴지는 부위는 손목이었다. 내 스마트워치에서 ‘김하나 국장’이라는 문구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
김하나 국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가이드 국장실로 나를 불러냈다.
우진이도 같이 오라고 그래서 내친김에 차우린까지 다 함께 왔다.
딱히 우린이를 맡길 곳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김 국장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현장 보고서.”
딱 한 마디만 내뱉고 한 손을 쭉 내미는 김 국장이 상당히 얄미웠다. 아니, 이거 권력 남용 아니야? 보고서 건네받는 담당자 따로 있는데 말이야.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거르고 중요한 말만 꺼냈다.
“저 방금 복귀했거든요? 보고서가 어딨어요, 보고서가.”
“그럼 브리핑이라도 해. 자질구레한 건 됐고 저놈 위주로 해 봐.”
김하나는 손가락으로 우진이를 가리키며 내게 명령했다.
김 국장의 손가락질에 우진이는 깜짝 놀랐다. 왜 코 앞에서 삿대질이야. 우진이 기분 나쁘게.
그렇지만 상대는 계급 깡패 국장이다. 결국, 나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
나의 브리핑은 완벽했다.
나는 우진이가 밉보일 만한 내용은 죄다 빼고, 우진이가 활약한 부분을 최대한 강조해서 김 국장에게 늘어놓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훌리건을 제압한 사격 솜씨는 정말로 훌륭했으니까.
내가 훌리건에게 도착하기 전까지나 훌리건을 상대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한 어시스트는 정말 대단했다.
일부러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살짝 제압만 하는 사격을 함소영이 할 리가 없으니 당연 우진이가 했겠지.
비록 우진이가 임무 내용을 무시하고 독선적인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어 보이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결과는 훌륭했잖아.
이번에 구해 낸 사람들이 못해도 40명은 될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는 결과가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난 우진이가 고집을 부렸다는 이야기는 쏙 뺐다.
우진이의 활약을 나열한 브리핑을 듣고 난 김 국장이 말했다.
“그래, 그래서 사람들을 구하러 가야겠다고 주장한 건 이놈이겠지?”
김 국장은 또다시 우진이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헐, 대체 어떻게 아신, 아니 이게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데요?”
“너는 주어진 임무 틀을 벗어날 생각을 안 하는 놈이고. 나머지도 여기서 키운 어린애들인데 그런 고집을 피우겠냐. 당연히 저놈이 그랬겠지.”
김하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우진이를 가리켰다.
‘쓸데없이 예리한 할망구 같으니.’
가이드 국장 김하나는 뭘 틀린 적이 거의 없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헛다리를 짚길 바랐는데 잘 안 됐다.
이젠 김하나가 우진이에게 선처해 주길 기도할 뿐이다.
‘제발…… 우진이를 연구소에 보내지 마, 김 국장아…….’
“잘했다.”
‘어라?’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구했고 가이드 인원을 늘려 줬으니 칭찬받아야지. 뭘 그리 놀라? 나 그렇게 야박한 사람 아니다.”
‘우와, 김 국장이 칭찬을 다 하고 웬일이야.’
나는 김 국장이랑 12년을 알고 지냈는데, 칭찬받아 본 적이 한 손에 꼽는다.
특히, 명령 이외의 행동을 질색하는 사람이 대체 무슨 일이야. 김 국장이 죽을 때가 됐나?
어쨌든, 김 국장이 우진이를 연구소에 보내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미운털 박힌 것도 빠진 것 같고 잘됐지, 뭐.
나는 기쁜 마음으로 국장실에서 퇴장할 시간을 기다렸다.
이제 그만 가 보라고 말해야 할 타이밍인데, 김 국장이 덧붙여 말했다.
“강하나, 너는 시말서 써서 제출하고 가라. 누구 맘대로 머리털 기르는데 이능력을 써.”
“…….”
언제나 모든 걸 맞히는 김 국장 때문에 결국 나는 기쁘지 않은 상태로 국장실을 나왔다.
길이가 너무 길어서 들킬 수밖에 없었나?
내가 시말서를 쓰게 됐으니 김한진도 써야 할 것이다. 혼자 쓰는 게 아니란 사실에 위안이 되긴 했다.
***
국장실에서 나온 우리는 다시 중앙 센터 앞으로 향했다.
장하나가 비품 반납할 줄 모르니까 빨리 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아니, 그거 그냥 들고 가서 비품 관리실 애들한테 넘겨주면 되는데 그걸 왜 못해? 에가협에서 지낸 세월이 적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아, 어디 갇혀 살았…… 구나. 얘네는 S급 에스퍼라고 연구 센터에서만 지냈으니 잘 모를 수도 있겠다.
나는 애들을 이해하기로 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품은 해미가 옮긴 그대로 있었고, 애들도 자리를 지킨 게 아니라 어딜 다녀왔는지 다들 손에 주전부리를 하나씩 들고 어슬렁거리며 모여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봤더니, 이해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야이 씨, 나라면 먹을 거 사러 가는 길에 반납부터 하겠다. 중앙 센터 들어가는 게 뭐 어렵다고. 간식거리 사러 가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면서 비품 관리실은 왜 못 찾아.’
열받아서 애들한테 한 소리 하려 했는데, 장하나가 더 빨랐다.
“우와…… 누구세요?”
“머리가…… 어떻게 한 거예요?”
“우리 버려 두고 미용실 갔다 왔어요?”
장하나를 선두로 함소영, 조용이 내 머리에 관심을 보였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비품 반납실은 못 찾는데 식당은 잘만 찾는다, 너네?”
“선배, 한 시간 동안 미용실 가서 머리랑 속눈썹 붙이고 펌도 했어요?”
“우릴 여기에 버리고?”
“버리긴 뭘 버려? 너네 셋 다 여기서 지낸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알아서 갈 길 가면 되잖아. 비품 반납하는 게 뭐 어렵다고 그냥 길바닥에 놔두고 나한테 하라는 거야. 보고서도 안 쓰는 놈들이 말이야.”
복귀하자마자 브리핑하고 시말서 써서 기분 안 좋은데 어린애들이 이런 잡일까지 시켜서 기분이 더 나빠졌다.
“비품 대여는 내가 팀장이니까 직접 하는 거지. 그런데 반납까지 내가 해야 해? 그냥 갖다주기만 하면 되는 걸 가지고 나더러 하래? 내가 아주 모두의 시다바리지.”
애들은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각자 비품을 손에 들고, 묵묵히 내 말을 들으며 비품 관리실까지 따라왔다.
다음에 또 임무 나갈 일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임무 끝나면 알아서들 반납하겠지. 이런 일로 또 부르면 진짜 혼난다.
비품을 반납하는 순간까지 신신당부를 했더니, 기어이 장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 알았다고요. 비품 반납하는 곳 몰라서 부른 거라니까요. 이제 우리가 반납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선배 펌 어디서 했어요? 한 시간만에 이렇게 하는 곳 어디예요?”
얘넨 왜 자꾸 아까부터 미용실 얘기야? 미용실 들어가 본 적도 없는데. 시말서 썼으니 당당하게 말해야지.
“난 그냥 복구 이능으로 머리카락을 길렀을 뿐이야.”
“허얼~ 그게 천연 곱슬머리예요? 이걸 왜 안 기르고 밀고 살았대?”
“무슨 소리야? 내가 곱슬머리라고?”
“선배, 거울도 진짜 안 보고 살아요?”
“아깐 바빠서 볼 시간이 없었어.”
내 말을 들은 장하나는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손거울 속에는 화려하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과 이쁘게 위로 말려 올라간 속눈썹을 한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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