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훌리건 (8)
그렇게 그 자리에서 도망쳤지만, 나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우진이와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괴수 잔해 처리반과 인명 구조팀의 인수인계가 끝나서 우리 팀이 복귀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애가 현장에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 차우린도 같이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복귀하기 위해 팀장으로서 팀원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우리를 데려갈 텔레포트 이능력자를 기다렸다.
다른 팀이 현장으로 나올 때 텔레포트 이능력자를 달고 왔으니, 따로 부를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보통 훌리건 임무에서는 이능 파장에 예민한 훌리건이 있을까 봐 텔레포트를 자제한다. 그래서 우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훌리건 임무가 끝나고 뒤처리를 해 줄 사람들이 출동한 거라, 텔레포트 이능력자가 같이 왔다.
텔레포트 이능력이 있는 에스퍼들은 수가 많지 않고, 등급이 높은 텔레포트 에스퍼는 협회 내에서 최고의 이동 수단이기 때문에 현장팀에 소속되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 연구소 소속이며 현장팀이 긴급 출동하거나 따로 호출할 때만 현장에 나타난다.
그리고 부른 팀에게 따로 수수료를 청구한다.
게다가 호출을 해도 현장에 나타나는 값도 별도로 청구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다른 팀과 함께 왔을 때 무조건 텔레포트로 복귀하는 게 이득이다.
복귀하기 위해 모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센터로 데려다줄 텔레포트 에스퍼가 나타났다.
이런 꿀알바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 박해미였다.
이런 식으로 마주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놀랍지도 않았다.
박해미는 A급 텔레포트 이능이 있는 에스퍼라서 오늘처럼 단체 이동이 있을 때 거의 꼭 나온다.
아무래도 A급이라 출력량이 크다 보니 혼자서 단체를 다 옮길 수 있기 때문에 협회도 박해미가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박해미도 거적때기를 온몸에 칭칭 감고 있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박해미는 원래 세상만사에 무심하고 자기 이익에 제일 관심 있는 사람이라, 나는 쌩하니 무시하고 가이드인 우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늘 하던 짓을 했다.
“가이드님, 일단 출발하기 전에 가이딩부터 해 주시겠어요? 도착하고서도 부탁합니다. 이건 현장으로 인한 이능력 사용이니 현장 가이드님께서 채워 주셔야죠.”
박해미는 이렇게 현장팀에서 가이딩을 뽕 뽑아 먹기로 유명했다.
연구 센터 내에선 가이딩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채울 수 없어서 그런 건지, 현장에 나오면 가이딩을 쪽 빨아 먹고 가는 텔레포트 에스퍼들이 많았다.
특히, 이능력 연구 센터는 위험 수치만 안 넘기게 관리하고 계속 이능을 쓰게 시키니까 밖에만 나오면 더 가이딩 받으려고 수작을 부렸다.
현장에서는 에스퍼가 만전을 가할 수 있도록 가이딩을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박해미가 지나쳤다.
‘우진이는 D급이라고. D급 가이드한테 A급 에스퍼의 가이딩을 하라고 시키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고.’
우진이는 출발 전에 한 가이딩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박해미가 이미 다른 팀 가이드한테 가이딩을 받고 온 상태여서 채워 줘야 하는 용적이 크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에가협에 도착하고 나서 한 가이딩은 달랐다.
우진이는 D급이라 가이딩 용적이 작은데, 무려 A급 에스퍼의 흐트러진 파장을 생으로 가라앉혀야 했다. 길바닥에서 고단계 가이딩을 할 수 없으니 당연히 1단계 가이딩으로 말이다.
그리고 당연한 사실이지만 1단계 가이딩은 효율이 제일 나쁘다. 그냥 손만 닿으면 되니까 아무 데서나 가능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중앙 센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우진이한테 손깍지를 끼고 가이딩을 뽑아 가는 박해미는 같은 급수도 15분은 걸리는 걸 2분 만에 끝냈다.
비슷한 크기의 파장인 사람이 적당한 출력으로 안정적이게 가이딩을 했을 때가 15분 걸리는 것인데 그걸 2분으로 단축한 것이다.
급수에 따라서 파장의 크기와 용적이 다르고 이 크기에 비례해서 적정 출력량이 정해진다.
D급인 우진이가 A급인 박해미를 적정 출력량으로 가이딩 하려면 당연히 몇 배의 시간이 걸리게 된다.
D급 가이드의 용적이 적으니까.
그런데 이 시간을 단축했다는 건, 적정량 이상의 출력이 빠져나갔다는 의미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너무 적다고 수도꼭지를 뜯어서 더 큰 구멍으로 물을 받아 간 행위라고 생각하면 된다.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얼마 없는데 말이다.
D급의 쥐꼬리만 한 용량을 순식간에 뽑아 간 박해미는 혼자서 만족하고 유유히 가 버렸다.
A급 에스퍼에게 무지막지하게 가이딩을 빨아 먹힌 우진이는 박해미가 손깍지를 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았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서 주저앉는 우진이를 부축했다.
가엾은 우진이는 단기간에 엄청난 출력량이 빠져나간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처럼 몸을 떠는 우진이는 가련하고 안쓰러웠다.
그리고 나의 새끼 고양이는 이틈을 타서 내 거적때기를 벗겨냈다.
“……!”
사람이 어이가 없으면 할 말도 없어진다던데 지금의 내가 그랬다.
그리고 우진이는 아까 봤던 모습을 또다시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꼴이 그렇게 신기한가?’
우진이는 눈을 땡그랗게 뜨며 놀라는 모습도 잘생기고 귀여워서 얄밉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지나다니는 곳에 떡하니 서서, 구경거리가 되어 줄 생각도 없었다.
지금도 S급 애들이 나 쳐다보고 있는 게 기분 나쁘다고.
나는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우진이를 품에 안아 들고 차우린을 옆구리에 낀 다음 내 숙소로 달려갔다.
애들한테 해산하라는 말은 못 해 줬지만, 상황 보면 걔들도 적당히 연구 센터로 복귀하겠지.
***
내 방문 앞에 도착한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우진이랑 차우린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 잠깐만요. 하나 씨! 전 그냥 하나 씨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우진이의 말이라면 항상 끝까지 듣는 나였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우진이의 말을 듣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다.
협회에 있는 모든 숙소는 거주자의 지문이 손잡이에 인식되어야만 열리기 때문에 내 방 현관문은 나만 열 수 있다.
들어가거나 나갈 때마다 내 지문을 인식해야만 문이 열린다.
우진이도 내 방에 거주할 수 있게 허락받았지만, 거주자로 등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문을 열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면 내가 열어 줄 때까지 밖으로 못 나온다는 뜻이지.
나는 잠시 가둬 놓은 우진이를 뒤로하고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지금은 우진이가 보고 있지 않으니 몰골을 숨길 필요도 없다.
얼굴을 가렸던 거적때기가 벗겨지든 말든 목적지를 향해 뛰어갔다.
오늘처럼 눈썹과 머리털이 녹아내리는 일은 정말 무지 많이 겪었다.
내 주 업무는 괴수를 상대하는 일이니까. 괴수 중에 산성 액체를 뿌리는 놈은 엄청 많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냥 액체만 적당히 닦아 내고 모자나 뒤집어쓰고 다녔다.
지금이야 민둥한 모습이지, 며칠 지나면 다 자라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새를 못 참고 놀리려 드는 놈들은 몇 대 때려 주면 그만이다. 이렇게 가리고 유난 떨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진이한테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징그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아까 놀라던 모습을 보면 착하고 마음 여린 우진이는 내 머리털이 새로 자랄 때까지 마음 아파할 것이다.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 나는 의료 센터 건물에 도착했다.
***
“아니, 부상도 입지 않은 분이. 고작 미용 목적으로 복원 이능을 받으러 오셨다고요? 미치셨어요?”
“그렇지만 제 말을 한 번 들어 보세요. 한진 씨는 C급이니까 만전 상태가 아니어도 안 들킬 수 있다니까요? 제가 여기 12년 있었는데 그 정도 순리도 모르겠어요?”
나는 의료 센터에서 신체를 복원해 주는 에스퍼를 찾아왔다.
물론 의료 센터의 이능력은 함부로 낭비하면 엄청 혼난다.
특히, 화영이 같은 A급은 언제나 만전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화영이와 이능 종류가 같지만, 등급이 두 단계나 낮은 김한진을 찾아왔다.
아무래도 등급이 낮으면 처벌 수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등급이 낮을수록 관리도 느슨한 편이라 입단속만 잘하면 안 걸릴 수도 있고.
그리고 김한진은 유혹에 약한 사람이라 이런 부탁을 하기 편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코코 가루를 꺼내 김한진의 손에 쥐여 줬다.
“그리고 이건 별거 아닌데. 방금 임무 갔다 오면서 얻은 전리품이에요.”
코코 가루는 에가협에서 금지한 물건이 아니지만 조제하는 건 협회 외부에서만 가능하다.
의료 센터에 짱박혀 사는 사람은 얻기 힘든 물건이란 뜻이다.
가뜩이나 일이 많아서 심신이 지친 의료 센터의 에스퍼가 이걸 안 받을 리가 없다.
“이, 이건……! 흠, 흠! 이렇게까지 부탁하신다면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따라오시죠.”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나는 김한진을 따라 아무도 없는 직원 휴게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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