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내가 키우게 된 S급들 (17)
낙엽이 책장에 긁히는 듯한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장소가 바뀌었다. 사방이 깜깜한 게 EMP라도 터졌나나.
(EMP: 전자기펄스, 핵폭발로 생기는 전자 방출 효과로, 전자기펄스의 영향을 받는 곳에 있는 모든 전자기기는 파괴된다.)
나는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박해미의 브리핑을 기다리다가 흠칫 놀라는 박해미의 얼굴을 보았다.
우진이랑 우린이가 나와 함께 현장까지 이동했기 때문이다.
박해미의 이능은 접촉자를 같이 이동시킨다.
그런데 박해미가 나를 붙잡았을 때 나는 우진이의 손을 잡고 있었고 우진이의 다리에는 차우린이 매달려 있었다.
박해미는 늘 그냥 나만 보이면 바로 끌고 왔으니 내 상황은 살펴보지 않은 듯했다.
나는 지금 우진이의 감시자이기 때문에 되도록, 10미터 이내에 있으면 좋긴 하다.
잠시 볼일이 있으면 우진이를 밀폐된 내 개인공간에 두고 오든가 임시 감시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지금처럼 긴급상황이 발생해 내가 어쩔 수 없이 긴급 출동을 해도 우진이 감시역을 비우면 내 잘못이 되니까.
갑자기 어두침침한 장소에 옮겨진 우진이와 우린이는 많이 불안해 보였다.
둘을 달래 주려고 하는데 해미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뭐, 상관없겠지. 여긴 지하 12층이야. 너도 알다시피 M-30721의 사육장이지. 보다시피 놈이 사육장을 탈출했다. EMP 파장을 계속 흘려서 화력 있는 무기를 못 쓰는 건 알고 있겠지?”
“그래, 뻔하지 뭐. 그래서 날 데려온 거잖아. 맨손으로 제압하라고. 기계식 권총도 주기 싫어서 말이야.”
“지금 이 층이 완전 폐쇄되어서 아직 외부는 안전하지만, 파장이 외부에 효과를 주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해.”
“아, 그건 당연하지. 너 일 끝나기 전까지 저 두 명도 안 내보낼 거잖아. 최대한 빨리 끝내야지. 폐기해도 되지?”
“사망자가 7명이고 그중 2명이 연구원이야. 생포해도 폐기될 거니까 빨리 끝내자고.”
박해미는 간단하게 설명을 마치고 나에게 야광 팔찌를 한 움큼 주었다.
해미랑 나는 아직 꺾지 않아 빛나지 않는 팔찌들을 들고 이동하려 했는데 엄청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다.
“아, 우진이!”
나는 허겁지겁 우진이 곁으로 가서 여기에 꼼짝 말고 있을 것을 당부했다.
전등이 다 나갔기 때문에, 비상용으로 존재하는 희미한 야광등의 빛으로는 실루엣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지만, 우진이의 불안에 찬 얼굴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끝내겠다는 다짐을 하며 해미의 이능으로 함께 이동했다.
‘후딱 끝내고 우진이 달래 줘야지.’
M-30721은 협회에서 붙여 준 괴수의 분류 번호다.
에가협은 괴수가 등장한 7년 동안 꾸준히 그들을 기록했으며 분석하고 연구해 왔다.
협회에 기록된 정보에 따르면 M-30721은 평균 5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크기의 개다. 물론 우리가 아는 개와는 조금 형태가 다르다.
녀석은 머리가 두 개 달렸으며 가슴팍에는 EMP 파장을 내뿜는 검푸른색의 구슬이 박혀 있다.
가슴팍의 구슬은 연구원들이 M-30721의 ‘핵’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저 전자기펄스(EMP)를 내뿜을 뿐, 딱히 놈의 약점은 아니다.
핵을 파훼하지 않으면 화력 좋은 무기들을 못 쓰는 건 꽤나 성가시지만 말이다.
그리고 핵이 멀쩡한 놈이 사육장을 탈출해서 계속 난리를 치면 폐쇄된 지하 12층의 방어벽을 뚫고 더 깊은 지하층이나 위층에 파장의 영향이 갈 수도 있다.
지상까지 영향이 가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전자기가 전부 망가져서 모든 행정이 마비되고 게이트 브레이크 수준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래서 이놈은 신속하게 해치워야 한다.
***
박해미는 괴수 근처로 좌표를 찍어 놨었는지, 우리는 놈의 뒤에서 바로 10미터 떨어진 위치로 이동됐다.
벽에 붙은 야광등의 희미한 푸른 불빛이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핥아먹는 놈의 형태를 비추었다.
사망한 협회원의 시체를 쩝쩝거리며 처먹던 놈은 실낱같은 텔레포트 이동음을 들었는지 곧바로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입에서 누린내 나는 소화액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놈의 아래턱을 주먹으로 위를 향해 쳤다.
퍽!
꽤 힘을 주고 쳤기 때문에 괴수의 육중한 몸뚱이가 살짝 떠올랐다.
덕분에 괴수 가슴팍의 핵이 내 눈높이에 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정권 지르기로 핵을 깨부쉈다.
일단 제일 급한 것은 해결했으니 괴수의 숨통만 끊으면 된다.
핵의 단단한 유리 조각 같은 파편들이 가슴팍을 치고 나오는 내 주먹을 따라 흩뿌려졌다.
형체만 겨우 분간할 수 있는 야광등 불빛에 반사된 조각들이 공중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그 반짝임 너머에 나를 보는 괴수의 눈동자가 있었다.
내가 때리지 않은 반대편 머리였다.
크아아아아!
핵이 깨진 직후 아직 멀쩡한 괴수의 머리가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있었다.
“……!”
괴수는 입에서 냄새나는 소화액을 흩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M-30721의 입에서 떨어지는 저 액체는 밝은 조명으로 보면 누런색이며 강한 산성을 띠고 있다.
개처럼 생겼지만, 먹이를 섭취하는 과정은 개와 전혀 다르다.
그들은 개와 달리 이빨이 전혀 없으며 입에서 흘리는 소화액으로 먼저 대상을 녹인 뒤, 핥아서 먹는다.
그래서 저 액체에 닿으면 어지간한 건 닿으면 다 녹는다고 보면 된다.
물론 금강불괴인 나는 녹지 않지만 아프긴 해서 닿는 건 싫다. 아무리 나라도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큐티클은 녹는다.
‘그건 사양이지.’
괴수의 아가리가 나를 덮치려는 순간, 갑자기 놈의 움직임이 멎더니 나를 향하던 거대한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괴수의 머리통 위에서는 쭈그려 앉은 박해미가 있었다.
박해미의 한 손은 괴수의 머리통을 짚고 있었는데 손을 치우자 야광 팔찌 스틱으로 추정되는 손톱 만한 플라스틱 조각들이 괴수의 머리통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텔레포트, 순간 이동 이능을 사용하는 박해미는 머릿속에 인지하는 위치 좌표로 이동한다.
이동 대상은 박해미, 본인이고 박해미와 연결된 대상도 같이 이동할 수 있다.
그런데 순간 이동 이능으로 이동하는 좌표에 다른 사물이 있을 때 그대로 이동하면 이동하는 대상과 본래 좌표에 있던 대상이 융합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경우에는 다행히도 순간 이동 이능력자 본인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좌표를 수정해서 이동을 확정하면 융합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자면 순간 이동 이능력자들이 고의로 대상을 융합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박해미는 만약을 대비해서 비상 조명으로 챙겨 온 야광 팔찌를 괴수의 뇌와 섞어 버린 모양이다.
아무래도 여긴 협회의 비밀 실험장이다 보니, 확실하게 숨통을 끊을 만한 적당히 커다란 잔해가 없었나 보다.
‘사육장은 M-30721의 소화액을 버틸 수 있는 튼튼한 공간이니 잘 안 부서졌겠지.’
아무튼, 20센티 남짓 되는 플라스틱 막대기들을 순식간에 움직이는 괴수 대가리에 정확하게 섞어 놓다니, 평생을 전투원 에스퍼로 살아온 박해미다운 실력이었다.
나는 해미에게 입에 발린 칭찬을 하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뺐다.
현장 보고용 자료는 박해미가 알아서 하게 두고 우진이나 보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현장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을 줄 알았던 박해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전자기 펄스 때문에 스마트워치가 먹통이 됐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곧바로 내 시계를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EMP로 인해 내 스마트워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아, 바꾼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새로 사야 하잖아.”
“똥 씹은 표정 하지 마. 시계는 내 것도 네 것도 협회에서 다시 무료로 줄 거야. EMP건이었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 일단 나가자고.”
박해미는 시계 때문에 심란한 나에게 희소식을 전하며 내 손목을 잡았다.
시계 값이 또 나가는 게 아니라면 걱정할 게 없지. 이번 일로 성과금도 들어올 테니까.
나는 안심하고 해미의 이능에 몸을 맡겼다.
지하 12층 입구에 두고 온 우진이와 우린이를 데리고 지상으로 한 번 더 이동하면 다 끝난다.
책장끼리 스쳐 가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우리는 우진이에게 이동했다.
해미의 텔레포트로 가벼운 이동음을 내며 이동하려는 바로 직전에, 쓰러져 있던 괴수가 눈을 뜨더니 내 몸뚱이를 물었다.
***
“……아, 젠장.”
이건 순전히 나의 불찰이다. 핵 깨뜨리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너무 살살 때렸다.
괴수가 나를 덮친 건 피해가 없었다.
텔레포트가 끝나자마자 괴수의 관자놀이로 추정되는 부분을 으깨 버렸더니, M-30721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M-30721가 나를 물고 있는 상태로 우진이 앞에 텔레포트한 것이다.
이런 징그럽고 냄새나는 괴물을 우진이에게 보여 주다니.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내 몸에 남은 M-30721의 잔해를 뜯어내며 우진이를 힐끔 보았다.
“…….”
창백한 야광등 아래에 우진이가 쭈그려 앉아, 우린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어린 동생이 괴물의 주의를 끌까 봐 입을 막고 방향까지 틀어 품에 끌어당긴 모양이다.
덕분에 차우린은 괴수를 보지 못했지만, 우진이는 이쪽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진이는 괴수한테 험한 꼴도 당해서 엄청 무서워할 텐데. 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일 걸 그랬다.
우진이를 달래러 가려는데 박해미가 내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우진이의 팔뚝까지 붙잡은 박해미는 이능을 사용했다.
***
해미가 지상으로 우릴 데려온 건지 눈이 부셨다.
눈이 빛에 적응하고 나니 주변이 보였다.
낯설지 않은 얼굴의 연구원들이 보이는 걸 보면 박해미가 주로 일하는 연구실인 듯했다.
드디어 사위가 환해지니 창백한 얼굴의 우진이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가여운 모습의 우진이에게 다가가려는데 박해미가 내 머리통에 얹은 손바닥에 힘을 주며 만류했다.
“후회하지 말고 내 말 듣지? 너 진짜 그 꼴로 저 사람한테 다가가려는 거야?”
‘내 꼴이 뭐 어떻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박해미의 말에 시선을 내려 내 몸을 살펴봤다.
이제 보니 M-30721의 소화액이 몸에 묻어서 지저분했다.
게다가 입고 있던 옷까지 소화액에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해미 말이 맞다.
이 꼴로 우진이한테 접근하면 소화액 때문에 우진이가 다칠 수도 있었다.
내가 몸을 살펴보는 사이에, 박해미는 어느샌가 소화기를 들고 와서 내 몸에 분사했다.
덕분에 소화액이 어느 정도 중화되어서 안전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더 지저분해 보이는 꼴이 되었기에 나는 그 상태로 연구실에 딸린 샤워실로 씻으러 갔다.
***
상쾌하게 씻고 나왔지만, 문제가 있었다.
우진이가 골라 준 대로 입고 나온 내 옷들은 괴수의 소화액에 녹아서 다시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충 허리춤에 수건을 두른 지금 상태 그대로 밖에 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샤워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었더니 우진이만큼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가이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연구실 가이드인가 보다. 문 앞에 선 가이드가 내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강하나 에스퍼 맞죠? 긴급 임무에서 고생 많으셨다 들었어요. 여기도 여분 옷이 충분하진 않아서 일단 제 옷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입고 나오시면 돼요.”
가이드는 싹싹하게 말하면서 옷을 건네주곤 곧바로 나갔다.
눈대중으로도 우진이와 키가 비슷해 보이던 남자의 옷은 역시나 사이즈가 넉넉했다.
나는 기장을 대충 접어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창백한 얼굴의 우진이가 나를 반겨 주었다.
괴수 때문에 많이 무서웠나 보다.
나는 불안한 우진이를 달래 주려 했으나 우진이가 나보다 한발 더 빨랐다.
우진이는 나를 붙들더니 내 몸을 더듬으며 꼼꼼하게 살펴보고는 나에게 괜찮은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몇 번이고 물어봤다.
나를 걱정하는 상냥한 우진이의 모습은 너무 감동적이고 마치 예술 벽화에 그려진 거룩하고 아름다운 천사 같았다.
나는 우진이가 묻는 말에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노라고 숨김없이 대답했으며 멀쩡한 몸을 우진이한테 직접 보여 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우진이가 내 이능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진이가 그럴 수도 있지.’하고 이해했다.
나는 우진이의 관심을 받으며 열과 성을 다해 우진이를 안심시켰다.
내 노력이 통했는지, 우진이는 많이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창백했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도니 마치 붉은 동백꽃 몽우리 위에 피어난 눈꽃처럼 아름다웠다.
우진이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우진이를 불렀다.
아까 나에게 옷을 가져다준 가이드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6)============================================================